“후….” ​ 침대 위에 늘어진 천여울의 입에서 길고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마음이 좀 괜찮아졌다. 아니, 할 만큼 다 한 것 같았다. ​ 뺨을 달궜던 분노는 그보다 훨씬 더 뜨겁고 강렬한 쾌락에 씻겨 내려간 지 오래다. ​ 윤채하의 말을 들었기에, 방음 마법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천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 갑자기 정해인이랑 딱 붙어 있고 싶어졌다. ​ 이유는 없다. 그게 필요한가? ​ “몇 시지?” ​ [PM: 11:40] ​ 벽에 걸린 시계는 밤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딱 괜찮네.” ​ - 톡톡. ​ 천여울은 워치를 켜,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입력했다. ​ [1000_y]: 문 열어 줘 나 지금 갈래. ​ 당당한 선포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으니까. ​ 오늘은 무조건 같이 잘래. ​ “흐응….” ​ 그러나 정해인은 대답이 없었다. 메세지 자체를 읽지도 않는다. ​ 그는 보통 연락이 오면 즉시 읽고 답장하는 성격이다. 그렇다면 지금 경우의 수는 두 가지. ​ 1번, 잔다. 이러면 오히려 떙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다. ​ 사실 문을 열어놓으라는 문자를 보낸 것은 최소한의 체면치레일 뿐, 그의 방에 들어가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 그리고 2번. 외출했다? ​ 이건 조금… 변수다. 훈련일 수도 있으나, 그는 대부분의 훈련을 해가 지기 전에 끝내놓는 것을 선호한다. ​ 혼자 밤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니. 이건 좀 위험할지도. ​ 어쨌든 결론은, 직접 가보는 것이다. ​ 천여울은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한번 확인했다. 얼굴에 붉은 기가 약간 남아있긴 한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 그녀는 조용히… 창문을 통해 나갔다. 옆집 이웃들은 워낙 귀가 밝았기 때문에, 복도로 나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나 지금 정해인 만나러 간다.’ ​ 라고 광고하는 꼴. ​ 소리 없이 발코니에 착지한 그녀는, 익숙하게 외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방문 앞에 섰다. ​ [201호 - 정해인] ​ 도어록을 열 차례다. 정해인의 워치가 없으니, 예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 “음….” ​ 그녀는 디지털 키패드 위에, 망설임 없이 네 개의 숫자를 눌렀다. ​ ‘1104’ ​ 그의 생일이다. ​ - 띠리릭. ​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모든 비밀번호를 자신의 생일로 통일해놨다. 참으로 고마운 부분이었다. ​ 그녀는 그대로 안방으로 향했다. ​ 그러나, 뭔가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 “…?” ​ 천여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 ​ 서늘한 밤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 하시온이네. ​ 이건 뭐 고민할 필요도 없다. 지나가던 개도 알 정도의 진한 체향. 궁수 특유의 기술이자 하시온의 특기, 암행. ​ 도어락을 연 것이 정해인인줄 알고 바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 “진짜 귀신같긴 하네.” ​ 천여울은 헛웃음을 흘렸다. ​ 대체 나간 건 어떻게 알고 혼자 조용히 온 거지?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럽다.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 방향제를 뿌려 향을 지운 후, 잠시 환기를 시켰다.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 - 쾅! ​ 그리고 정해인의 침대로 걸어갔다. 하시온의 잔향이 남아있는 이불을 거칠게 걷어내고, 그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후우….” ​ 그리고, 코를 크게 들이쉬었다. ​ ‘…….’ ​ 와… 이거 뭐지? ​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하시온이 왜 자꾸 여기로 오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의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살짝 감았다. ​ 얼마나 지났을까. ​ - 띠디딕. ​ 차가운 전자음이 그녀의 단잠을 깨웠다. 천여울은 부스스 눈을 떴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안방이 열리고 정해인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의 불이 켜지고, 침대 위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누, 누구세요?” ​ 정해인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했다. 하지만 천여울은 그런 그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오히려 당당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 ‘왜 도망갔지?’ ​ 그녀는 하시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냥 오고 싶어서 왔다. 순수하게 같이 자고 싶다. ​ 그것뿐인데. 딱히 걸릴 건 없었다. ​ 천여울은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녀는 맨발로 굳어버린 정해인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 “이제 왔어?” ​ 그리고는, 침대 쪽으로 슬쩍슬쩍, 그의 팔을 당겼다. 늦게 귀가한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처럼, 사실 이것도 의도한 행위이긴 했다. ​ “안 자? 나 졸린 데.” ​ 아직도 멀뚱멀뚱 서 있는 정해인. 결국 천여울은 정해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어버렸다. ​ - 츕. ​ 그녀는 입술을 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자자.” ​ 그녀는 그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 밤은 길었다. ​ - 부스럭. ​ 그리고 그 창문 밖. ​ 정확히는, 2층 발코니의 차가운 난간 위. 하나의 그림자가, 미동도 없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하시온이었다. ​ 애초에, 도망친 게 아니었다. ​ “…읏.” ​ 그녀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이었다. ​ ​ ​ ​ *** ​ ​ ​ ​ ​ ​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곳. 뒤틀린 어둠으로 이루어진 악신(惡神)의 옥좌 앞에서, 한 사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 기묘한 형태의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고, 죽은 것마냥 완전히 엎드린 채 미동조차 없다. ​ 옥좌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공간 자체를 짓누르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만이 검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릴 뿐. ​ 그때, 공간을 울리는 음성이 사도의 뇌를 뒤흔들었다... ​ [중원.] ​ 왕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성별도,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기묘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 [굶주림을 억눌러라. 그리고 때가 되면.] ​ 그 순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도의 몸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신의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극한의 쾌락이었다. ​ [중원의, 피어나는 꽃을 정화하라.] ​ “……!” ​ 사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제3석, 벨리알. 그의 얼굴은 광기에 가까운 희열과, 눈물과 감격으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꽃이라 하면, 최근 주께서 발견한 그 정체불명의 힘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옥좌를 향해 울부짖었다. ​ “명을…! 이 미천한 종에게, 주께서 직접…!” ​ 그는 옥좌를 향해 몇 번이고 이마를 찧었다. ​ - 쿵! 쿵! 쿵! ​ “명을 받들겠나이다!!! 주시여!!!” ​ 벨리알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한 줌의 어둠이 되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옥좌에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 그리고 악신의 권좌보다 한 단계 낮은 차원에 위치한, 사도들의 집회소. ​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기괴하게 뒤틀린 기둥들로 이루어진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 - 쉬이이이이익! ​ 연기는 이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 벨리알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다른 사도들은 그저 담담히, 혹은 경멸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벨리알의 광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 벨리알은 그들의 시선을 만끽하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포효했다. ​ “신탁이다!!!!” ​ 그의 목소리는 쾌락에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 그때, 계단의 가장 높은 곳의 바로 아래, 두 번째에 앉아있던 알렉세이가 나지막이 물었다. ​ “무엇이죠?” ​ 그 한마디에, 벨리알의 광적인 웃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갑자기 정색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 벨리알이 신탁의 내용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 “정화하라.” ​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 “중원에 막 피어나는 더러운 꽃을.” ​ 벨리알의 입가에, 비로소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정화하라 명하셨다.” ​ ​ ​ ​ ​ ​ ​ *** ​ ​ ​ ​ ​ ​ ​ 어두운 공동. ​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소멸한, 완전한 무(無)의 공간. 가장 깊은… 의식의 바다. ​ 그 중심에, 흑색 장포를 입은 한 사내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을까. 체감상으로는… 아니 체감도 불가능했다. ​ 그때 바르커스를 죽이기 위해 마지막 남은 모든 억제력을 소진하고 소멸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존재는 세상에서 잊혀야 했다. ​ 하지만. ​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다시 눈을 뜨게 됐다는 건…. ​ 악신(惡神)이, 다시금 세계의 억제력을 어길 만큼 거대한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 부활을 늦추고, 억제력의 페널티를 감당하면서까지 행해야만 하는 일. ​ 흑색 장포의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외부로 향했다. ​ ‘얼마나, 강해졌지?’ ​ 관조하기 시작했다. 잠든 사이 걸어온 길들, 그리고 이륙한 일들. ​ 수많은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 ‘……!’ ​ 예상은 했었다. 어느 정도는 강해져 있으리라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흑색의 사내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 ‘충분하다.’ ​ 이대로만 한다면. ​ 그래,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미 너무 좋은 흐름으로 들어섰다. ​ 어떤 위협이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 그러나. ​ 아마, 이번이 그의 마지막이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