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으로 물들었던 시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다. ​ 눈을 떠보니, 나는 산장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차가운 나무 바닥의 감촉이 선명했다. ​ “욱!” ​ 상체를 들어 올리자 마자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 나는 간신히 욕지기를 참아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 조금 전까지 낡아빠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산장은, 이제 막 지어진 것처럼 고풍스러운 목재 냄새를 풍기며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 생김새는 똑같았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낡음 대신 깔끔함이, 쓰러질 듯한 불안감 대신 견고함이 자리 잡았다. ​ ‘과거다.’ ​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달력을 확인했다. ​ 산장이 시간을 정확히 되돌렸다면, 오늘의 날짜는 1979년 1월 1일이어야 한다. 조화의 편린은 정확히 그날 생성되니까. ​ “제발.” ​ 그러나 내 눈앞에 적힌 날짜는 조금 달랐다. ​ [1978년 12월 26일] ​ 편린이 생성되기 정확히 6일 전.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아슬아슬한데.” ​ 기본적으로 원작에서 시간 여행의 제한 시간은 7일. 그 이상을 넘어가면 자동으로 시간축이 붕괴하여 원래의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 그리고, 다음 기회는 없다. 산장은 사라진다. ​ ‘이러면 마지막 날에 바로 얻어야….’ ​ 계획에 대회 고민을 하던 중. ​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으으응….” ​ 부드럽고 나른한 목소리.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강아린이 여유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더니,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 “잘 잤어?” ​ “….”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차오르는 혼란과 질문을 억지로 억눌렀다. ​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 강아린은 내 당혹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태연했다. ​ 나는 그녀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어떻게 알았어?” ​ 내내 태연했던 그녀는, 12시가 되기 직전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 나도 말이 안 되는 거 아는데, 이 산장의 장치를 모르고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된다. ​ 내 머릿속은 혼란스럽게 돌아갔다. 더 이상 생각을 굴리기보다는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 “영광이잖아.” ​ 강아린은 느긋하게 몸을 펴며 답했다. ​ “모르는 게 있겠어?” ​ 나는 그녀의 말에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영광이 그럴싸한 정보망을 가진 조직임은 맞다. ​ 하지만, 이 산장처럼 원작 속에서도 숨겨져 있는 기믹을 알아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 “영광?”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꾸했다. ​ “나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닌데.” ​ 내 말끝은 의도치 않게 날카로웠다. 강아린은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너가 의심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믿어도 돼.” ​ 강아린은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향해 땅을 가르켰다. ​ “여기, 백두산. 이곳에 세계에서 두 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편린이 묻혀있어.” ​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미묘하게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 “그리고 이 산장.” ​ 강아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 “이 산장은 그 편린의 시간축에 영향을 받은 공간이야. 간단히 말하면, 편린의 에너지가 시간을 비틀어 만든 축이지.” ​ ‘어떻게…?’ ​ 완벽한 정답이었다. 정확히 그런 설정이긴 하다. ​ “어때? 아직도 내가 안 믿겨?” ​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어,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어떻게 정보가 여기까지 닿은 거지? ​ 이것마저 강유성의 죽음이 불러온 스노우볼인가? 그렇다면 새삼 그의 경영 능력이 쓰레기였음이 증명되는…. ​ “그리고 난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은데?” ​ 강아린이 내 얼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붉은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 그녀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 “영광에서도 최고 기밀로 취급해 아무도 모르는 이 정보를 너는 어떻게 안거야?” ​ 이번엔 내가 해명을 해야 할 차례였다. ​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영광 내부에서도 이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내가 이걸 알고 있다는 건? 그녀가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 그렇다고 내게 대답해줄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 그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곧장 산장 밖으로 나섰다. ​ “어디가?” ​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조금은 다급해 보였지만, 여전히 여유가 묻어 있었다. ​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힐끔 봤다. ​ “너도 편린을 찾으러 왔다는 거 아니야?” ​ 밖은 여전히 저녁이었다. ​ 눈 앞에 펼쳐진 설경 속으로 한 발 한 발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비로 뒤덮였던 산장은 이제 순백의 눈으로 덮여 있었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피부를 찔렀다. ​ “나도 그래서.” ​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 ‘편린의 위치와 생성 시점은 내가 알고 있다.’ ​ 백두산 천지. 1월 1일. 편린은 정확히 그날, 그곳에서 생성된다. 원작에서도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물건이었다. ​ 염려되는 것은, 강유성이 죽은 세계선의 영광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나냐는 것인데. ​ 백 번 양보해, 천지 내부에 편린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았다고 치자. 그러나 편린이 생성되는 구체적인 시점까지 알고 있을리가 없다. ​ 나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 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수색하는 척하며 그녀를 떼어놓는 것. ​ 눈 덮인 들판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 -푸흣. ​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리는 그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 고개를 돌리자, 강아린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눈가는 이미 웃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 “아, 미안.” ​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음을 감췄지만, 입가에 남은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맑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 “막.. 고민하는거… 귀여워서.” ​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태연한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근데 있잖아.” ​ 그녀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눈 속을 몇 발짝 걸어와 내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한 단어씩 또렷하게 내뱉었다. ​ “백두산 천지. 그리고 1월 1일. 어때?” ​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 ​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 “춥고 어두운데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 “그냥 따뜻한 산장 안에서 나랑 얘기나 좀 나누자.” ​ 강아린은 내 손을 꼭 쥐고는, 가벼운 힘으로 나를 산장 쪽으로 끌고 갔다. 힘으로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생각하는 걸 포기한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 *** ​ ​ ​ ​ 영광의 정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전부 때려치우고 취직하고 싶어질 정도. ​ 아주 생기는 계획마다 그녀에게 차례차례 박살나는 중이다. 나와 사고의 흐름이 비슷한 건지, 여러모로 피곤한 상대다. ​ “… 그래서, 너도 편린이 필요하다는 거지?” ​ 이제 숨길 것도 없다. ​ “넵.” ​ 내 반응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 팔뚝을 살짝 쳤다. 보통 이런 협상은 좀 거리를 두고 진행하지 않나? ​ 난로 앞이 따뜻하다는 이유로 그녀는 내 옆에 딱 붙어있었다. ​ 내가 반대편으로 넘어가겠다고 했는데, 붙잡혔다. ​ “편린, 줄까?” ​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바라봤다. ​ 아니 근데 이 사람이 진짜…. 내가 뭐, 나 좋자고 편린 먹자는 것도 아니고. 다 세상을 위해서인데. ​ 어차피 그거 얻어도 성시우 전용이라 나는 흡수도 못 한다. 편린을 흡수할 수 있었으면 내가 진작 흡수해서 무한 회귀로 조질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 ​ 물론 회귀는 없어졌지만…. ​ “… 주면 좋죠.” ​ 당연히 속으로만 궁시렁거렸다. 온전히 편린 하나를 내 손으로 얻어야 하는 나는, 철저히 을의 입장이었다. ​ 그녀가 기를 쓰고 편린을 얻으려 한다면, 결국 그녀와 무력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캐릭터랑 그런 식으로 충돌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 그녀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 어쩐지 사람을 약 올리는 것 같았다. ​ “줄게.” ​ 강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건네줄 수 있다는 듯한 태도. ​ “근데 조건이 있어.” ​ “뭔데.” ​ 조건이 없으면 그게 사기다. 대체 뭐를 요구하려는 걸까. ​ 동백검? 이아노의 십자가? ​ 그녀는 내 반응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 “졸업하면… 글로리에 입단해.” ​ 순간 머릿속이 멈췄다. ​ 글로리는 영광의 산하 길드였다. 명실상부 세계 1위 길드. ​ 다시 말해, 조건이라기보다 거대한 제안에 가까웠다. ​ “진심이야?” ​ “응.” ​ 강아린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져 난로 옆에 기대어 말을 이었다. ​ “네가 묵귀인건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이아노의 무덤부터 편린의 위치까지. 단독의 정보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알고 있고.” ​ 그녀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며 싱긋 웃었다. ​ “사용법도 모르는 편린보단, 제대로 된 인재 하나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 그리고 그녀는 한 박자 쉬며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 “그리고 말이야, 네가 내 것이 되면, 편린도 자연히 내 것인 거잖아?” ​ 강아린은 싱긋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어때?” ​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다. ​ “좋죠….” ​ 어차피 나는 졸업 후 글로리에 입단하려 했었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