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울은 몸이 튼튼하다. ​ 튼튼한 수준이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강골이다. ​ 그녀의 신체는 어릴 적부터 아르카디아 교단의 온갖 세례와 성수 마찰로 단련되어, 뼈와 혈관 구석구석까지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 그 덕에 잔병치레는 물론이고, 웬만한 마력 공격이나 물리적 충격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 따라서 원작에서는 루트에 따라 최전선에서 방패와 둔기를 들고 힐과 전투를 동시에 하는 홀리 나이트로도 고려된 적이 있었다. ​ 물론, 그 루트의 엔딩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 그러니까 다시 말해, 천여울이 아프다는 것은. ​ 내게 있어서는…. ​ 상당히. ​ 매우, 큰 사건이나 다름이 없었다. ​ 단순히 밤을 새우고,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저런 상태가 될 수 있는 몸이 아니란 소리다. ​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미동도 없는 그녀의 뒷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컨디션 난조가 아닐지도 모른다. ​ “병원 가보자.” ​ 진심이었다. 정밀 검사라도…. ​ - 스윽. ​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일으켜 세울 생각이었다. ​ “읏….” ​ 그러자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마치 차가운 얼음이라도 댄 것처럼. ​ 얘 진짜 아픈가 보다. ​ “일어나, 바로 병원 가자.” ​ 나는 반대편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옆으로 넘기고, 이마에 손을 대었다. ​ ‘열은 없는데….’ ​ “앗!” ​ 그녀는 새된 비명과 함께, 마치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듯 번쩍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자칫하면 넘어질 것 같아서 나는 등을 받쳐줬다. ​ “알, 알았어! 오늘 조퇴할게! 그러니까 그만 만져…!” ​ 어딜 만졌다고 내가. 누가 들으면 각 잡고 만지려고 한 줄 알겠다. ​ 그리고는 내 손길을 뿌리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 - 끼익. ​ 때마침 교실 앞문이 열리며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여울은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도한성 교관 앞으로 뛰어갔다. ​ “교관님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오늘은….” ​ 도한성 교관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훑어보더니…. ​ 나지막이 말했다. ​ “목이 완전히 쉬었네요 천여울 학생. 개학 날부터 아쉽군요. 몸 관리 잘하세요.” ​ “감사합니닷!” ​ 그는 순순히 그녀의 조퇴를 허락해주었다. 천여울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 왜인지 병원으로 직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책상 아래로 워치를 조작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belief_]: 병원 꼭 가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 - 우우웅. ​ 무음이었기에 진동이 울렸다. 답변은 거의 1초 만에 도착했다. ​ [1000_y]: 응 나도 사랑해! ​ “…?” ​ 진짜 어디 아픈가? 결국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나는 워치를 꺼버렸다. ​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윤채하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 “근데… 진짜 안 들렸어?” ​ “뭐가?” ​ “… 아니야. 네가 눈치가 빠르지는 않지 확실히.” ​ 윤채하는 말을 얼버무리더니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답답한 사람을 상대하는 듯한 태도다. ​ 눈치? 내가 눈치가 없지는 않은…. ​ 아, 설마. ​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 여성에게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마법이라 불리우는 날. 천여울은 아무래도···. '미쳤지.' 그런 아이한테 나는 손을 대고 이마까지 만지려 했다.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 진짜 상상도 못 한 부분이었다. ​ ‘근데 목이 쉬기도 하나…?’ ​ 잠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람마다 증상은 다양하게 찾아온다고 하니까. ​ 사과해야겠네. ​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채하는 나를 새초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 꼬집. ​ “아앗….” ​ 윤채하의 말랑거리는 볼을 조물거리며, 내 무심함을 반성했다. ​ ​ ​ ​ ​ ​ *** ​ ​ ​ 개학이다보니 크게 할 일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 2학기에 새롭게 시작된 전공과 교양들도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났다. 덕분에 점심을 먹기도 전에 모든 일정이 끝나버렸다. ​ “같이 하교~ 같이 하교~” ​ 내 옆에서, 윤채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통통 굴렀다. 원래라면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는 정반대 방향이었기에 함께 하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펜트하우스는 구분이 없었기에, 하교를 같이 할 수 있게 됐다. 어쩌면 등교도. "점심 같이 먹고~ 훈련도 같이하고~"​ ​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 팔에 은근슬쩍 매달려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윤채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 “너만 하교~” ​ “?!” ​ 내 단호한 말에, 윤채하는 걷다가 멈춰 섰다. 머리 위에 물음표라도 띄워진 듯한 표정이었다. ​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 “오늘 이사장님 면담.” ​ “…….” ​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 시무룩해진 얼굴이 간식을 뺏긴 고양이 같다. ​ “먼저 가 있어. 좀 걸릴 거야.” ​ 윤채하를 돌려보내고, 나는 약속 장소인 이사장실로 향했다. ​ 이사장실은 가온의 가장 중앙, 행정 타워의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소에 학생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된다. ​ 이곳에 불려온다는 것은, 보통 엄청나게 큰 상을 받거나 혹은 퇴학에 준하는 엄청난 사고를 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 오늘의 나는 아마 후자는 아니겠지.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깔끔한 정장 차림의 비서가 나를 맞이했다. 가온의 이사장이면 비서 정도는 두는 모양. ​ “이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두꺼운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 - 스윽. ​ 문이 열리자 거대한 통유리창을 등지고 앉은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 가온 아카데미의 이사장, 유성환이었다. ​ “해인 학생! 오랜만이군요!” ​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았다.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가온의 비고, 그러니까 그에게서 나는 카타스트로피를 뜯어냈었으니까. ​ 아직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그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내 등에 붕대로 칭칭 감긴 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 “하하, 편히 앉아요! 편히!” ​ 나는 그가 권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푹신한 감촉이 온몸을 감싼다. ​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군요. 아니지, 뭐부터 축하해야 할까요?” ​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 “한 학기 만에 랭킹 2위가 된 걸 축하해야 하나? 아니면, 불가람의 공방 계승에 성공한 걸 축하해야 하나?”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둘 다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하하하! 아무튼 정말로 축하합니다.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 ​ 그는 향긋한 홍차 향이 감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래서 말인데, 해인 학생.” ​ 그의 눈이 어떤 때보다 빛난다. ​ “가온의 얼굴이 되어주지 않으시렵니까?” ​ “… 얼굴이요?” ​ “네. 얼굴. 우리 가온 아카데미의 전속 모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해인 학생의 그 영웅적인 서사, 묵귀라는 영웅 명으로 특례 입학을 해서… 압도적인 성과로 1위까지.” ​“다른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귀감이, 그리고 가온에 입학하려는 전 세계의 인재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동기부여가 될 겁니다!” ​ 그는 마치 감동적인 연설이라도 하듯, 열변을 토했다. 정해인이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클 것인지에 대한 사탕발림이 이어졌다. ​ 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 ‘준비 열심히 하셨네.’ ​ 보통 가온의 광고 모델은, 졸업 후 대성하여 검증된 기성 영웅들을 막대한 모델료을 주고 기용한다. 영웅의 몸값은 어마어마하니까. 그런데 학생인 나를 모델로 쓰겠다? 모델료도 아끼고, 가온의 위상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 학생에게는 명예라는 타이틀을 주고, 실제로는 몇백억에 달하는 모델료를 아끼려는 속셈. ​ 과연 이사장 다운, 혀를 내두를 만한 수완이었다. ​ 하지만. ​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걸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는 척 잠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주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영광입니다… 이사장님. 하지만 제가 감히 가온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을지….” ​ 그러자 이사장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요, 당연…!” ​ “제가 카타스트로피… 아니지, 백아(白牙) 말고는 장비가 별 볼일이 없어서요…. 아마 가온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요?” ​ 내 말에 이사장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멈칫했다.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며, 더욱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가온에서는 해인 학생을 위해 ‘몇’ 가지 장비를 지원해 줄 수 있답니다.” ​ 몇 가지라. 만족할 생각은 1도 없었다. ​ “아 정말요… 그런데 제 소질이 아시다시피 ‘전인’이라… 특정 장비에 국한되지 않아서요. 가온의 얼굴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그때마다 필요한 장비가 다를까 봐 걱정입니다.” ​ 내 말에, 이사장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 과연, 한번 백아(白牙)를 내줬던 가온의 비고를 다시 열어도 되는가. 모델료와 비고의 가치, 그 사이에서 그의 머릿속 저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 그러다가, 그의 미간이 쭉 펴졌다. 결심을 마친 모양. ​ “걱정하지 마세요. 가온의 비고를, 해인 학생에게만 무제한으로 오픈하겠습니다.” ​ 그리고는 서랍에서 묵직한 검은색 카드키 하나를 꺼내, 내 앞의 테이블 위로 밀어 넣었다. ​ 오? ​ “비고의 출입증입니다. 필요한 장비가 있다면, 언제든 가서 골라보세요! 가온의 얼굴에 어울리는 것으로!” ​ 이건 꽤나 좋다. 끽해야 열댓 개 정도의 아이템을 빌려주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무한대일 줄이야. 가온의 모델료가 생각보다 훨씬 센 모양이었다. ​ 나는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덥석 물었다. ​ “좋네요. 그렇게 하죠.” ​ 나는 방금 전까지의 천진난만하던 표정을 싹 지우고, 테이블 위의 카드키를 집어 내 품 안으로 넣었다. ​ “……?” ​ 이사장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아마 내가 조금 더 고민하거나, 혹은 감격에 겨워 감사 인사를 늘여놓을 줄 알았을 것이다. ​ 그러나 나는 표정을 싹 바꾸며, 제안에 즉시 수락했다. 아마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 가온의 비고 내용물은··· 당신보다는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 정신을 차린 이사장이, 마른기침과 함께 황급히 덧붙였다. ​ “… 혹시 다른 학생들에게 빌려주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안 됩….” ​ “에이, 그럴 리가요.” ​ 아마 그럴 겁니다. ​ “제가 양아치도 아니고.” ​ 나는 양아치니까. ​ 이사장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 우리의 공정 계약은 그렇게 체결되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