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입맞춤이 끝나자, 유하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 - 쪽. ​ 뜨거운 감촉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 내 목덜미에 몇 번 더 입술을 묻어 자신의 흔적을 새기던 그녀는, 이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가 내게서 먼저 몸을 떼어냈다. ​ 그리고는, 나에게서 몇 걸음 물러나 훈련장 중앙에 섰다. ​ “하아… 하아….” ​ “후….” ​ 그녀의 뺨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고, 푸른 눈동자는 짙게 빛나고 있었다. ​ 유하나는 동백검을 들어 올려,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 “내가 얻은 모든 걸… 전부 보여주고 싶어.” ​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결심에 찬 표정이다. 한 명의 검사가 자신의 모든 초식을 보여준다는 것은, 발가벗고 맨몸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어쩌면 가장 원초적이고, 또 관능적인 유혹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 - 스윽. ​ 나는 결국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가 검을 뽑아 드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하나가 동백검을 쥐는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붉은 동백꽃 꽃잎들이 다시 생기를 찾은 것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 곧, 그녀의 춤이 시작되었다. ​ 검무(劍舞). ​ 내가 가르쳤던 화접검(花蝶劍)의 부드러움과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계승한 청운검의 예리함이 완벽히 합일된 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교태로움과 관능적임이 덧칠해져 있었다. ​ 나는 숨을 죽인 채, 전부 지켜봤다. 유리벽 너머로 봤을 때랑은 또 전혀 다르다. ​ 볼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나 또한 알고 있다. ​ 이 수준의 검술을 얻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지. 그 모든 것이 느껴졌다. ​ 마침내, 유하나의 마지막 초식이 펼쳐졌다. ​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수천, 수만 개의 꽃잎이 일제히 그녀의 검 끝으로 모여들었다. 꽃잎으로 이루어진 붉은 검기(劍氣)가 하나의 거대한 칼날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 『무상난화(無上亂花)』 ​ 그녀가 이룩한 고유의 경지였다. 아직 초입이지만 그녀는 마침내 자신만의 길을 피워냈다. ​ - 촤아아아악! ​ 모든 꽃잎이 사라진 후, 그녀는 고요히 검을 거두었다. 훈련장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 유하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 “나 잘했지?” ​ 유하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 “응.” ​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검무보다 아름다웠다. ​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그럼 안아줘.” ​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 쪽. ​ 그리고… 마구 안아줬다. ​ ​ ​ ​ ​ ​ ​ *** ​ ​ ​ ​ ​ “아… 뭐지 이거.”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덮친 것은 지독하게 뻣뻣한 몸이었다. ​ 잠을 설쳤다. ​ 온몸이 뻐근하다. ​ 잠을 잘 못 잤다. 이유는 단순했다. ​ 가위에 눌렸다. ​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깔려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무게가 내 몸을 짓눌렀다. ​ 몸을 아무리 움직여도 꽉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를 않더라. ​ 눈을 뜨려 해도 안대라도 씌워진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잘 기억은 안 난다. ​ 몇 년 만에 눌려보는 가위인지. ​ “하….” ​ 나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곤이 쌓이면 가끔 이런 악몽을 꾸고는 한다. ​ 낯선 환경이기도 하고, 최근 훈련의 강도도 올린 터라 결국 올 게 온 모양이었다. ​ 그래도 그것 외에 펜트하우스의 성능은 확실했다. 침대도 구름처럼 푹신하고, 거대한 최신형 주방까지, 이 정도면 요리를 해 먹는 빈도가 좀 늘어날 것 같기도 …. ​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 ‘이건 진짜 뭐지?’ ​ 방 하나를 통째로 터서 만든 듯한 공간. 통유리창 너머로 가온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욕실. 욕실 구석에는 거대한 거울이 붙어 있는 월풀 욕조까지 존재했다. ​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다. 대체 풀 욕조는 왜 있는 걸까? 혼자 쓰기에는 터무니없이 넓다. ​ 뭐… 결론적으로는 랭킹 올릴 맛이 나는 구조긴 했다. 지독한 동기부여. ​ 몸을 씻고,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 수십 벌의 옷을 걸 수 있는 텅 빈 행거들 사이에, 나의 옷 몇 벌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익숙한, 늘 입던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 그리고 2학기의 첫 등교를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복도를 나서는 바로 그 순간, 내 옆방도 열렸다. ​ 요한이었다. ​ “안녕?” ​ 나는 요한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쯧."​ - 쾅! ​ 혀를 차더니 다시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완벽한 무시였다. ​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이인데, 너만 피곤하지 않을까?’ ​ 그러나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 게다가. ​ “너 지각.” ​ 어차피 안 나오면 지각이다. ​눈을 떠봤는데, 가위 때문에 평소보다 늦게 잔 모양이었다. ​ 결국 나는 뛰기 시작했다. ​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펜트하우스 단지를 벗어나 가온의 본 부지로 향했다. 방학 동안 정비를 싹 해놨는지 아주 깔끔하다. ​ - 위이잉. ​ 저 멀리 은색의 마공학 드론 몇 대가 상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푸른빛의 센서로 캠퍼스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 드론은 자동으로 정해진 구역을 순찰하며 던전 브레이크나, 게이트가 발생한 곳을 감지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 아마… 2학기 동안은 지겹도록 마주칠 친구들이라 보면 된다. ​ 영웅으로서의 기본적인 지식과 이론을 가르쳤던 1학기와는 다르게. 2학기는 좀 더 실습과 파견 위주의 수업으로 진행될 테니까. ​ 본격적인 유닛 활동과 파견 임무의 시작이었다. ​ 그리고, 원작에서는 바로 그맘때부터, 마인들의 습격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마구 뛰다 보니 중앙 강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당에 들어서기 전, 시간을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 ​ 내부는 이미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행사는 아직 시작하기 전. ​ 가온은 시스템은 대학교면서, 또 이런 부분은 고등학교 같다. 개학식이 뭐야. 개학식이. ​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한 것에 안도하며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몸을 밀어 넣었다. ​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았다. ​ - 잠시 후, 2학기의 개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 안내 방송과 함께 장내가 조용해지고, 곧이어 연설이 시작됐다. 축사는 1학기 수석, 강아린이 맡았다. ​ “다음은, 1학년 수석, 강아린 학생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 사회자의 말에, 모든 시선이 단상으로 향했다. 강아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무대 위로 올라섰다. ​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완벽한 표정과 자세. ​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강아린도 이번 방학 내내 바빴기에 만나지를 못했다. 물론 윤채하랑은 다르게 연락은 주고받았다. ​ 짧고, 강렬한 연설이 이어진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여유롭게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행사가 마무리되고, 학생들은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인파에 섞여 B반이 있는 강의동으로 향했다. ​ 간만의 교실이었다. ​ 나는 늘 그렇듯 맨 뒷자리, 전용석인 내 자리로 향했는데. ​ 오늘은 윤채하 밖에 없었다. 천여울은 아직 안 왔다. 늘 가장 먼저 오던 그녀였다. ​ “…….” ​ 100%다. 어제 일 때문이다. ​ 유하나가 아주 큰 일을 저질러버렸다. 나는 조용히 윤채하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으며, 나지막이 인사를 건넸다. ​ “좋은 아침.” ​ “응.” ​ 윤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는 바로 그 순간. ​ - 스윽. ​ 윤채하가 앉은 강의실의 의자에서 소리 없이 내 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녀의 엉덩이가, 내 엉덩이에 완벽하게 밀착했다. ​ “….” ​ 그녀는 티가 안 났다고 생각하는지, 미친 척하며 앞을 바라봤다. ​ “나 챙겨야지. 불가람 님 말 안 들을 거야?” ​ 오히려 뻔뻔하게 나오기까지. ​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 “어이구 계승자님 아니세요?” ​ 윤상혁은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계승은 무슨.” ​ 나도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 사실 아까부터 의식이 되긴 했다.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으니까. 뭔가 잔뜩 물어보고 싶은 표정들이다. ​ 윤상혁은 나와 윤채하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근데… 둘이 사이가 좀 좋아졌네?” ​ 그의 시선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딱 붙어있는 윤채하에게로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몸을 비틀었지만, 윤채하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그 모습에 윤상혁이 한 번 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자기 자리로 향했다. ​ “간다잉.” ​ 바로 그때였다. ​ - 끼익. ​ 교실 뒷문이, 아주 조용히 열렸다. ​ 천여울이었다. ​ 그러나 그녀는 평소의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눈이 퀭했고 밑에는 다크서클까지 있다. 뺨은 비정상적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괜찮아?” ​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피어 올랐다. ​ “응….” ​ “목소리가 완전 갔는데? 감기 걸렸어?” ​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거의 쇳소리에 가까웠다. ​ “괜찮아… 그냥 잘 못 자서 그런지 컨디션이 좀 안 좋네….” 그러나 정작 윤채하는 천여울을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아주 많~이 아프셨나봐. 새벽 내내 아주 끙끙 앓던데? 나는 무슨 귀신 나온 줄 알았···.” 그 말에 천여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윤채하를 쏘아보다가, 간신히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조용히 해···.” ​ - 털썩. ​ 천여울은 그 말을 끝으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