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가볍게 정리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 엄청나게 넓은 방 안에 혼자 있기가 좀 그랬기도 했지만,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 2학기부터는, 랭킹 10위 이내. ​ 펜트하우스 입주자에게만 개방되는 특별한 훈련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완공됐다고 한다. ​ 그 성능을 좀 느껴보고 싶었다. ​ 듣기로는 세계 최고급이라는데, 과연 어떨지···. 가온은 이처럼 랭킹 아래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동기를 부여하고. 위에 있는 학생에게는 내려가면 누리던 걸 못 누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준다. ​ 잔인하다고 보면 잔인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가온의 랭킹은 곧 영웅의 자질이랑 직결되니까. ​ 나는 계단을 내려와 펜트하우스의 정문으로 향했다. ​ “어?” ​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 가, 해인아?” ​ 천여울이었다. ​ ‘… 설마?’ ​ 아니겠지.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몸만 한 거대한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 방금 막 도착한 나처럼 그녀 역시 짐을 풀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 범인은 천여울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지…. ​ “들어가봐, 방 넓고 좋더라.” ​ 나는 그녀의 방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내 시선을 따라 펜트하우스를 힐끗 보더니, 나를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 “내 방? 아니면 우리 방?” ​ “…….” ​ “그래서 어디 가려고?” ​ 그녀의 질문을 애써 무시하자, 웃으며 다시 물어왔다. ​ “훈련장 한 번 가보려고.” ​ “으잉? 같이 가자~ 나도 가보고 싶었어.” ​ 천여울이 칭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캐리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 “짐 풀고 나와 기다릴게.” ​ “응? 밖에 더운데. 안으로 들어오지?” ​ 천여울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아! 그럼 먼저 가 있을래? 훈련하려면 시원한 거 마시면서 해야지. 내가 커피 사 갈게.” ​ 천여울 답지 않은 좋은 제안이었다. "좋네. 먼저 가 있을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 캐리어를 끄는 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나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 단지 중앙에 위치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워치에 센서를 대자,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며 나를 지하의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 - 띵. ​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지하여서 다소 꿉꿉하고 숨이 막힐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상쾌하고 서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 무슨 거대한 미래 연구소에 온 것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 나는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거대한 유리로 만들어진 트레이닝 룸들. 각 룸의 문 옆에는 작은 디지털 장치가 붙어있다. ​ 나는 비어있는 룸 아무 데나 다가가 장치를 조작해봤다. ​ [환경 조절] ​ 보아하니 내부의 환경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듯 했다. 예를 들어 불가람의 내부를 상정하고 타이핑을 하면…. ​ [가상 환경 생성 중….] ​ 유리로 비치는 내부의 환경이 순식간에 시뻘건 용암이 들끓는 지옥으로 변했다. ​ “와우.” ​ 최신은 최신이다. ​ [투명도 조절: 불투명] ​ 룸을 밖에서 볼 수 없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감탄하며 좀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때였다. ​ 내부가 불투명했던 어떤 방이, 갑자기 노이즈가 끼는 소리와 함께 투명하게 바뀌었다. 나는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 “…….” ​ 그리고 그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부의 풍경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 ​ 방 안은 더 이상 차가운 훈련실이 아니었다. 공간 전체가 탁 트인 들판으로 변해있고. ​ 바닥에는 붉은 동백꽃 잎이 레드카펫처럼 깔려있었다.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춤 추듯이 휘날렸다. ​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하나가 있었다. ​ ‘… 검강.’ ​ 검을 휘두를 때마다 꽃잎들이 검기를 따라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흩날린다. ​ 화접검? ​ 맞다. 맞는데…. 내가 아는 화접검은 아니었다. ​ 유무진의 검술인 청운검의 묘리가 세세하게 녹아있다. 화접검이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검이라면, 청운검은 시원시원한 묘리가 담긴 쾌검이다. ​ 그러나 유하나가 펼치는 검술은 그 둘의 묘리가 모두 녹아있었다. 빠르지만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치명적이다. ​ 나는 유리 벽에 기댄 채,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땀방울들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 집중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보니, 그녀가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마침내, 유하나의 마지막 초식이 펼쳐졌다. ​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리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수천, 수만 개의 꽃잎이 일제히 그녀의 검 끝으로 모여들었다. ​ - ……. ​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다. 그녀가 휘두른 검기는 내가 기대고 서 있던 강화 유리벽이 움찔거릴 정도의 강력한 파동이었으니까. ​ 모든 꽃잎이 사라진 후, 그녀는 고요히 검을 거두었다. ​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유하나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인다. 나 역시 방학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기에 반가웠다. ​ ‘오랜만이야.’ ​ 나는 웃으며,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 유하나가 다급하게 유리벽으로 달려왔다. ​ - 턱. ​ 하얀 손바닥이 유리벽에 부딪혔다. ​ - 턱. 턱. 턱. ​ 그녀는 출구를 찾기 위해, 유리벽을 더듬으며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못 절박한 모습이다. ​ 나는 그 모습에 웃으며, 내가 있는 쪽의 문을 열었다. ​ “하나야 이쪽이….” ​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 - 휙! ​ 유리벽 안쪽에서 뻗어 나온 유하나의 손이 나를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 나는 균형을 잃고, 그녀의 몸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 코끝으로, 이제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짙고 달콤한 동백꽃 향이 깊게 스며들었다. ​ 내 몸 아래에 깔린 그녀의 몸은, 훈련의 여파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 “하나야.” ​ 나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유하나는 내 목을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 “보고… 싶었어.” ​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긍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보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니까. ​ 유무진을 상대로 계승에 성공하고, 검후로서 다시 태어난 그녀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또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도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모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 그러나, 그때였다. ​ - 띵. ​ 훈련장의 복도를 가로지르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 나와 유하나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유리벽 너머를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양손에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와 본인이 마실 딸기 라떼를 든 여성. ​ 천여울이었다. ​ 나를 찾아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 그녀는 복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유리방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 내가 그녀의 위에 올라탄 채 뒤엉켜 있는 이 민망한 자세를 그대로 보게 된 셈. ​ 천여울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화사한 미소가, 그대로 얼어붙더니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 그 순간 내 품에 안겨 있던 유하나가 씨익, 하고 웃었다. ​ 그녀는 천여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누운 상태로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우아하게 뻗었다. 그리고 열려있던 문을 발끝으로 가볍게 툭, 쳤다. ​ “!” ​ 천여울이 깜짝 놀라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 - 철컥. ​ 하지만 열려있던 유리문이, 그녀의 코앞에서 소리 없이 닫혔다. ​ - 삑. ​ 그리고 다음 순간, 유하나가 손목의 워치를 가볍게 터치하자 투명했던 유리벽이 순식간에 짙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진 천여울의 얼굴이, 그 잿빛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이 공간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었다. ​ 유하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네?” ​ 정확히 보드게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 속에서 천여울과 나는 부부였고, 영주인 유하나는 외부인이었으니까. ​ “방학동안 쟤도 행복했겠지?” ​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 스윽. ​ “그리고, 이제… 아마 더 행복해질 거야.” ​ 나는 유하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희열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 “나도 그랬거든.” ​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 그녀는 깔린 채로 상체를 일으켜,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 “아, 그냥 보여주는 게 나으려나?” ​ “잠깐만!” ​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내 저항을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상체를 눕혀 회피하며 워치를 조작했다. ​ - 삑. ​ 다시 잿빛이었던 유리벽이, 한 치의 흐림도 없이 투명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여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 유하나는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개를 들어 내 볼에, 턱 끝에, 그리고 목덜미에, 보란 듯이 입을 맞췄다. ​ - 쪽. - 쪽. ​ 그녀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으면서 나는 내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유하나도 마찬가지였다. ​ 솔직히 말해 더 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가장 먼저 내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유하나였으니까. ​ “음, 그냥… 안 보여줘야겠다.” ​ 몇 번의 입맞춤 끝에, 유하나는 아주 만족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워치를 터치했다. ​ - 삑. ​ 그리고 유리벽은. ​ 다시 한번 짙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