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 커는데….”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한 표정을 짓는 윤채하가 내게 손을 뻗었다. 눈동자는 여운에 젖어 반짝거리고 있다. ​ “큭큭.” ​ 가지 말라는 뜻 같았다. 어차피 이 상태로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오늘만큼은 윤채하의 응석을 전부 받아줄 생각이었다. ​ “그래?” ​ “네….” ​ 나는 이불을 조심히 들추고 그 안으로 들어가, 윤채하를 끌어안아 쓰다듬었다. ​ “으응….” ​ 내 품에 안긴 작은 몸이 기다렸다는 듯 더욱 파고들었다. ​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얇은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등줄기,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체온. 그 열기가 내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 - 쓰담, 쓰담. ​ “하으….” ​ - 토닥토닥. ​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내 손길에, 그녀는 긴장이 쫙하고 풀리는 듯 나른한 목소리를 흘렸다. 손바닥을 펼쳐, 머리 위에서부터 어깨, 등, 그리고 다시 목덜미까지. ​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거리며 떨린다. ​ 그녀의 몸에서 나는 라벤더 샴푸 냄새와 이불에서 나는 라벤더의 복합적인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두 향은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침구의 향이 차분하다면, 윤채하의 샴푸 향은 달콤하다 해야 할까. ​ 윤채하는 내 가슴팍에 코를 박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가쁘게 몰아쉬던 숨결이, 점차 고르고 편안하게 바뀌어갔다. ​ 나는 머리를 좀 더 쓰다듬어줬다. ​ “흐으… 후….” ​ 점차 숨이 편해지더니, 마침내 그녀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윤채하의 머리에 입술을 살짝 댄 뒤, 그대로 뒤에 눕혔다. ​ 그녀의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넘겨주었다. 모든 긴장이 풀린 듯, 편안하게 잠이 든 표정이다. ​ - 새근, 새근. ​ 나는 곤히 잠든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 “다 안 큰 거 맞구만.” ​ 그렇게 작게 속삭이며, 이불을 어깨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녀가 깨지 않도록 소리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고 나갔다. ​ ​ ​ ​ ​ ​ *** ​ ​ ​ ​ ​ 길고, 또 아주 지독했던 방학이 끝났다. ​ 오랜만에 가온으로 향하는 날이다. 나는, 늘 입던 교복을 꺼내 입었다. 정확히 말해 교복은 아니고 자주 입는 와이셔츠였다. ​ 익숙한 감촉이 몸을 감싸는 순간, 지난 한 달 반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 불가람의 공방에서 잿가루와 쇳물을 뒤집어쓰며 깨달았던 연대의 가치. 그 대장장이의 손길이 닿아 다시 태어난 카타스트로피와, 마(魔)를 집어삼키며 새로운 힘에 눈을 뜬 윤채하. ​ 바티칸에서 천여울이 얻은 편린. 그리고 악신이… 편린을 인지했다는 좋지 않은 정보. ​ 그리고…. ​ 뭇 여성들과의 관계 발전까지. ​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한둘이 아니다. ​ - 쓱쓱. ​ ‘나는 쓰레기인가?’ ​ 죄책감과 별개로, 몸 안의 어딘가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이 있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번 액셀을 밟으니 멈추지를 못하겠다. ​ 무슨, 여성으로 볼 일이 없다느니 선을 지켜야 한다느니. ​ 그때의 자신감 넘쳤던 정해인은 죽었고. 지금은 그냥 욕망에 충실할 뿐, 미친놈이 따로 없다. ​ 솔직히 말해, 지난 방학 동안 내가 가장 성실하게 임한 과제는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천여울, 하시온, 윤채하까지. ​ 남은 건 강아린과 유하나라지만… 둘 다 일정 문제 때문에 만나지 못했을 뿐. 오히려 심하면 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무거운 짐을 잔뜩 싸고, 나는 새로운 학기를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 그러나 내가 원래 살던 기숙사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섰다. 거대한 안내문 한 장이 붙어 있다. ​ 나 또한, 기숙사로 들어가려고 멈춰 선 것은 아니었다. ​ “어디려나.” ​ 그곳에 내 새로운 기숙사 위치가 적혀 있었기 때문. ​ [정해인] [아스트라(Astra) 1학년동 201호.] 2학기가 되며, 내 기숙사는 바뀌었다. ​ 가온에서는 랭킹이 높은 학생들에게는 더 좋은 숙소를 배정한다. ​ 그냥 단순히 더 좋은 숙소가 아니다. ​ 랭킹 10위 내의 학생들에게는, 사실상의 펜트하우스를 제공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해 정진하라는 배려. ​ “와… 무슨.” ​ 평소 오르던 기숙사보다 언덕을 조금 더 오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새하얀 외벽에 프라이빗한 정원과 테라스까지. ​ 1학년, 2학년, 3학년까지의 펜트하우스 촌이 전부 여기에 모여있었다. ​ 나는 1학년 단지가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 크다. ​ 크고, 좋았다. ​ 다 좋은데…. ​ 문제는 남자 펜트하우스와 여자 펜트하우스의 구분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방이 마주 보고 있는 구조. 막말로 방 하나만 건너면 바로 옆집이다. ​ 물론 철저한 마력 잠금장치가 있어 허락 없이는 오갈 수 없다. ​ 그러나. ​ ‘반대로 말하면….’ ​ 허락만 있다면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내 방은 201호다. ​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1층 복도에 나란히 붙어있는 이름표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 [101호 - 강아린] ​ [102호 - 윤채하] ​ [103호 - 천여울] ​ [104호 - 하시온] ​ [105호 - 유하나] ​ 정말 다행인 점은, 남녀가 최소한의 층 구별은 되어있다는 점일까. 그녀들의 방문을 거치지 않고서도 2층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 원작에서 내가 설계했던 이 구조의 이유는 단순했다. ​ 플레이어와 등장인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상위권을 향하기에, 스토리 흐름 및 편의를 위해 한 공간에 몰아넣은 것이다. ​ 연애를 권장하려는 의도이기도 했고. 가온의 취지랑은 또 잘 맞으니까. ​ 그래, 연애. ​ 나는 이마를 짚었다. ​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될지는 뻔해 보였다. ​ 10위 안이라고 모두 숙소를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7위와 9위인 학생은 숙소를 거절했다. 집이 근처였던 모양이다. ​ 결국 10등 내의 남학생은 정해인, 주서준, 요한. 여학생은 강아린, 천여울, 유하나, 윤채하, 하시온. ​ 이 여덟명이 펜트하우스를 이용하는 전원이었다. ​ 나는 1층의 지옥도를 뒤로하고, 복도 밖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 2층의 복도는 1층보다 훨씬 더 한산했다. 방은 똑같이 5개가 있었지만, 문패가 붙어 있는 곳은 세 곳뿐이었다. ​ [203호 - 요한] [202호 - 주서준] ​ 그리고, 내 방. ​ [201호 - 정해인] ​ 나는 201호를 열었다. 워치를 문 앞에 가져다 대자, 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 내부가 펼쳐진다. ​ 눈이 부실 정도로 넓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가온의 전경, 그리고 최고급 가구들과 최신형 전자제품까지. 최근에 지어서 그런지, 솔직히 뱅퀴셔의 숙소보다 좋아 보였다. ​ 나는 짐을 들고, 가장 안쪽에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 문을 열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펼쳐진 상황은 감히 내가 예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 침대 위에, 누가 누워 있었다. ​ 창문의 커튼이 반쯤 쳐진 탓에 방 안은 어둑했지만, 실루엣은 선명했다. ​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조용히 새근거리는 작은 몸. 누가 봐도 여성의 실루엣이었다. ​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 내가 방을 잘못 들어왔나? ​ 혹시 나, 범죄자가 된 건가? ​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 “어? 아, 진짜 미안해. 진짜.” ​ 나는 속사포로 사과를 내뱉고는 그대로 뒤돌아 뛰쳐나갔다. ​ - 쾅! ​ 문이 거칠게 닫혔다. 나는 복도에 선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그리고 다시 문 앞에 붙은 호수를 확인했다. ​ [201호 - 정해인] ​ “뭐야?!” ​ 내 방 맞는데? ​ 나는 워치를 센서에 찍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워치로 인식해서 들어왔으니, 내 방일 수밖에 없었다. ​ 그냥 너무 당황해서 그런 것조차 기억이 안 났던 모양이다. ​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 누구세요. ​ - 끼익…. ​ “…….” ​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 침대는 텅 비어 있다. 나는 홀린 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 분명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처럼 이불 가운데가 살짝 파여있다. 손을 대보니 온기도 남아있었다. ​ 그때, 창문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커튼이 살짝 펄럭였다. ​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 ​ 여기로, 도망친 모양이다. ​ 2층 높이지만, 이 펜트하우스에 사는 학생이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 “…….” ​ 나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닫았다. ​ - 찰칵. ​ 그리고 잠금장치를 걸어, 단단히 잠갔다. ​ 누군지 찾고자 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냥 모르는게 나아 보였다. ​ 오히려 내가 범인을 찾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