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쪼옵. ​ 천여울은 아주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달콤한 딸기 라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눈 밑이 퀭한 다른 두 명의 여성이 앉아 있다. ​ 강아린과 하시온. ​ 유하나는 제외.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계승작업을 위해 아버지인 유무진과 폐관으로 들어갔다. ​ 결국 그녀는 천여울의 염장질로부터 현명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 원래 정기 회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시점. 그러나 천여울이 정해인에 대한 거대한 변수를 예고하며, 모두를 집합시켰다. ​ 정말 죽기보다 가기 싫었지만, 궁금했던 것도 마찬가지였기에 강아린과 하시온은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나갈 수밖에 없었다. ​ 강아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천여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짹짹? ​ 아주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어깨에는 하얀 새까지 얹어놨다.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쪽쪽 빨릴 텐데, 순수하게 과시용이라는 뜻. ​ 하시온은 애써 표정을 감췄지만, 천여울의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있는 붉은 자국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제 저녁 들어온 정해인도, 비슷한 위치에 빨간 자국이 있었으니까. ​ ‘설마 진짜로….’ ​ 천여울은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 ​ 그 말에 강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본론만 말해.” ​ 천여울은 그런 강아린의 반응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 “안 했어.” ​ “…….” “…….” ​ 그 한마디에, 강아린과 하시온은 거의 동시에, 자신들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당연히 했을 거라 생각했다. ​ 솔직히, 그녀 둘 모두 자신들이 그런 상황이라면 못 참을 것 같았으니까. 오히려 천여울의 자제력에 놀랐을 정도. ​ “괜히 성녀가 아니시네요?” ​ 강아린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그 말에, 천여울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 “또 그렇지도 않을걸?” ​ 그녀의 대답에 강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천여울은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가슴이 책상에 강하게 눌렸다. ​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 “오히려 내가, 너희보다 참을성이 너무 없어서 방법을 찾아낸 거지.” ​ 천여울은 두 사람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똑히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 “이제, 한 단계만 남았어.” ​ 두 사람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똑히 확인한다. ​ “해인이가 다음 확장 권능을 얻는 순간.” ​ 정적이 흘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모를 리 없었다. ​ “그거면 지긋지긋한 억제력도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아. 확실해졌어.” ​ 이전까지 그녀들은 어렴풋이 추측만 했을 뿐,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편린을 직접 획득하고 그 본질을 엿본 사람. 천여울이 지금 선언했다. ​ 너희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고. ​ “그럼 어떻게 되는지는… 알지?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전의 질투로 가득 찼던 침묵과는 다르다. 이제 세 사람의 눈에는, 명확하고 공통된 목표가 생겼다. '확장 권능.' ​ 마지막 관문. ​ 반드시 넘어서야 했다. ​ ​ ​ ​ ​ *** ​ ​ ​ ​ ​ ​ 간만에, 뱅퀴셔의 숙소, 거실 쇼파 위에 늦은 오전의 햇살을 맞으며 대자로 누워 있었다. ​ 아카데미 기숙사와는 다르게, 넓은 맛이 있다. 조용한 외부.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푹신한 쇼파까지.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 - 뒹굴. ​ 내게 주는 휴식이었다. ​ 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불가람의 공방과 바티칸 등. ​ 이래저래 굵직굵직한 계획들을 열심히 처리해왔다. 덕분에 마음 한구석은 편해진 상태. ​ 그러나 동시에, 다음 해야 할 일에 대해 머리가 좀 아파졌다. ​ 일단 첫 번째 과제. ​ ‘편린 획득.’ ​ 천여울은 성황리에 편린 획득을 마쳤다. ​ 그러나, 문제는 악신이 편린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점. ​ 이제는 속도전이다. 그에 맞춰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편린 습득 시점도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더 앞당겨야만 했다. ​ 그러나 당장 이번 방학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 유하나는 지금쯤 본가에서, 아버지 청운검제의 자리를 전수받는 계승 작업에 들어갔을 터. 지금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다. ​ 강아린의 편린은 좀 더 어렵다. 지금은 연구 기간이니, 불가능. ​ 따라서 남은 방학은, 다른 등장인물은 여기까지다. 남은 방학 동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다. ​ ​ ==== ​ [권능: 조화의 편린(片鱗)] ①파사현정(破邪顯正) ㅡ 사한 것을 부수어라. ② ??? ③ ??? ==== ​ 두 번째 확장 권능. 개방을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 ​ 편린의 확장 권능은, 대상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성장 결과도 다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육성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성시우 육성이 아닌, 정해인 육성. ​ 나는 한 층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휴식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 굳은 결심과 함께, 쇼파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 그러나 그때. - 끼익. ​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왔다. ​ 시온이었다. ​ 아침 일찍부터 볼일이 있다며 나가더니, 막 돌아온 모양.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내 옷차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훈련 가게?” 쇼파에 눕기 전부터,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기에 물어보는 듯 하다. ​ “어, 그러려고.” ​ 쉬는 것 자체가 나랑은 그렇게 안 맞는다. 바로 지하로 내려가 훈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 “음… 그럼 잠시만.” ​ 시온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잠시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안에서 옷이 스치는 소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몇 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열린 방문 사이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그녀가 평소에 자주 입는 몸에 딱 붙는 기능성 훈련 복장이었다. ​ 그런데. ​ “…?” ​ 뭔가 이상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했다. ​ 시온이 입고 있는 것은 하얀색 천으로 만든 옷이었다. 성아라 누나가 활 쏠 때 편하라고 만들어 준, 기능성 옷. 문제는 그 옷의 외관 자체가 좀 민망해서, 훈련실 아니면 입지를 않는다. ​ 그러나 지금의 복장은 한술 더 뜬 상태였다.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라인 전체가, 칼을 대고 쭉 그은 듯 일자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 걸을 때마다 그 틈새로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같이 가자.”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나는 한말을 잃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 “… 옷이 왜 그래?” ​ “아, 이거?” ​ 그러자 하시온은 자기 다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내가 불편하다고 하니까, 아라 언니가 찢어줬어. 양쪽이 트여있으니까 기동성이 훨씬 좋아지더라고.” ​ 그 사람은 대체 뭘 만든 걸까. ​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시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내 반응을 살폈다. ​ “그래서, 훈련… 안 가?” ​ 그녀가 한 걸음, 내게로 다가왔다. 찢어진 다리 사이로 보이는 맨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가야지….” ​ 우리는 그대로, 지하 훈련장으로 향했다. ​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고 몇 시간 후. 나는 그대로 드러 누웠다. ​ 그리고 그 상태로, 시온을 구경했다. - 팡! 팡! ​ 시온의 궁술은, 언제 봐도 시원시원한 맛이 있다. 그녀는 손에 딱 맞는 검정 가죽 장갑을 끼고, 상체보다 큰 무거운 활과 화살통을 차고서도, 마치 한 마리의 사자처럼 훈련장을 누볐다. ​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덤벼드는 더미들을 상대로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고, 망설임 없이 화살을 날린다. ​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 기동 타격. 그게 시온이 추구하는 방향성이었다. ​ “좋은데?” 몇마디 말을 얹는 것을 까먹지 않았다. ​ 시온은 내가 옆에서 훈련 피드백해 주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내 칭찬에 그녀의 어깨가 살짝 으쓱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더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 - 파바바박! ​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날린 다섯 발의 화살이 눈앞의 더미 다섯 개의 목덜미에 박혀 들어갔다. 틀어짐 하나 없는, 완벽한 연사였다. ​ 새삼 놀랍긴 했다. ​ 시온이라는 존재는 원작에서는 맥거핀에 가깝다. 그저, 작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 ​ 그러나 지금 내 눈앞의 하시온은 다르다. 살아있었고, 숨 쉬고 있었으며, 내 앞에서 경이로운 궁술을 보이고 있다. ​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 '시온이 이렇게 강하다면, 악신과의 전투에서 핵심 전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스스로 지워버렸다. ​ 시온은 편린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 떨어져 처음 만난 대상이고, 또 내가 제일 아끼는 아이였으니까. ​ 내 선에서 전부 끝낸다. 이게 가장 맞는 표현인 것 같다. ​ 시온은 여전히 과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 “광철 오빠는, 던전 공략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여행 갔어. 할아버지랑 같이.” ​ “그렇다면서?” ​ 뱅퀴셔의 이야기였다. 내가 왔던 그날, 바로 떠났다고 하더라. 워치에 메세지가 와 있었다. ​ “나 버리고.” ​ 그녀가 덧붙였다. ​ “나빴네.” ​ 왜 시온을 안 데려갔지? 내가 위로하듯 뭔가를 더 말하려던 순간. 뭔가 싸함을 느꼈다. ​ “해인이, 너도.” ​ 그 직감에,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하시온이,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활시위는 여전히 더미를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채,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진동한다. ​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사랑스러운 미소는 아니다. ​ 시온이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걔랑 바티칸, 재밌게 다녀왔어?” ​ “…….”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팡! ​ 내가 침묵하자, 그녀의 미소가 살짝 더 깊어졌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시위가 풀렸다. ​ 그러나 화살은 빗나갔다. 더미는 이미 고개를 숙인 후였다. 하시온은 그 아쉬운 결과를 보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 “어라?” ​ 그녀가 팽팽했던 활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리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주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 “내가… 좀 늦었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즉시 격발되는 화살. ​ - 팡! ​이번에는, 완벽한 명중이었다. “그럼, 한 발 더 쏘면 되지 뭐.” 시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