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동백검을 받아왔다. ​ [정해인]: 나 오늘 운동 못 나갈 거 같아 [유하나]: 왜? 어디 아파? [정해인]: 어디 갈 일이 생겨서 [유하나]: 그렇구나… 알았어 ​ 덕분에 오늘 아침 운동도 스킵. ​ ‘어째 계속 빠지는 것 같긴 한데….’ ​ 그래도 다 니들을 위한 것이니, 양해하길 바란다. ​ “어우 씨, 무거워.” ​ 역시 아직 길을 안 들여서 그런지, 굉장히 무겁다. 나는 검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뒤,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 오늘은 백두산이다. ​ ​ *** ​ ​ 터미널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주말이라 사람들이 가득했다. 본가로 가는 사람들, 외출이나 외박을 즐기려는 학생들. 터미널 특유의 분주한 공기가 가득했다. ​ 다만 그 누구도 외출이나 외박을 백두산으로 가지는 않겠지만. ​ 물론 나 또한 외박은 아니다. ​ 정확히는, 외박이긴 한데 결국 오늘 안으로 집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 큰 문제만 없다면. ​ 백두산은 공식적으로 협회가 지정한 험지다. 직통 포탈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협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진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선은 서울로 가는 포탈을 먼저 타야 했다. ​ 흐릿한 빛이 내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밝아졌다. ​ 서울의 터미널은 가온보다 훨씬 혼잡했다. ​ 나는 일반적인 포탈이 아닌, 협회에서 주관하는 특수 포탈 터미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특수 포탈 터미널은 일반 구역보다 훨씬 조용했지만, 긴장감이 느껴졌다. 입구에는 다소 피곤한 기색의 안내원이 서 있었다. ​ 나는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 “백두산을 가려고 합니다.” ​ 안내원은 나를 힐끔 쳐다보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 “특수 포탈은 사전 신청하셨거나, 자격이 있으셔야 합니다~” ​ 나는 잠시 망설이다 주머니에서 가온 학생증을 꺼내 내밀었다. ​ “이걸로 되나요?” ​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가온은 일류 아카데미고, 우수한 영웅 후보생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어디서든 통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 안내원은 학생증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아… 가온 학생이면 거의 다 되긴 하는데요… 백두산은 좀 예외입니다. 워낙 험한 곳이라….” ​ 역시 안되나.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협회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꺼내려 했다. 일전 이아노 무덤 이후, 묵귀라는 새로운 이명으로 발급받은 영웅 신분증이었다. ​ “그럼 이거….” ​ 그러나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 “학생이 무슨 백두산을 가겠다고?” ​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뒤를 돌아보니 전투복을 입은 무리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자의 갑주에는 연꽃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로터스 길드?’ ​ 연꽃 문양을 상징으로 쓰는 길드는 거기밖에 없다. ​ 앞서 걷던 남자가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 “어린 나이에 무슨 허풍을… 여기는 장난칠 곳이 아니란다. 옆으로 비키렴.” ​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봤지만, 무시하고 다시 안내원과 대화를 이어갔다. ​ “그럼 이거로….” ​ 나는 내 영웅 신분증을 제시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격이 증명될 것…. ​ -탁 ​ “내 말이 안 들리나?” ​ 갑자기 내 손목이 강하게 붙잡혔다. 뒤에서 들려온 낮고 거친 목소리에 안내원조차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 ‘누군가 했더니.’ ​ 로터스 길드, 2팀의 선봉, 우장훈. 평소에도 깡패 같은 성격으로 유명하긴 했다. ​ A급 영웅으로 실력은 뛰어나지만,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붙었다. ​ 우장훈은 내 신분증을 힐끔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 “이런 가짜 신분증으로 어딜….” ​ 그는 내 손목을 더 강하게 쥐며 비아냥거렸다. ​ “너같이 생긴 놈을 내가 살면서 본 적이 없단다. 얘야. 영웅 사칭은 중죄인 거 모르니?” ​ 나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싸움을 거는 성격은 아니지만, 걸려 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또 아니었다. ​ ‘이길 수 있나?’ ​ 애매했다.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 그럼 두 번째. ​ ‘뒤처리가 쉬운가?’ ​ 이건 명확히 쉬웠다. 명분과 이유 모두 내 쪽에 있으니까. ​ ‘그럼, 한다.’ ​ 결국 저지르는 게 깔끔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 그때였다. ​ “무슨 문제 있으세요?” ​ 맑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 모두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강아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걸어오며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분은 오늘, 저랑 백두산 탐사를 할 사람입니다.” ​ 강아린은 우장훈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 “물론, 최근 발생한 파장 때문에 로터스에서도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 그녀는 한 발 더 다가오며 우장훈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의 팔에 시선을 잠시 내리며, 눈빛을 차갑게 떴다. ​ “로터스 길드 정도라면, 규정과 절차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 우장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 “또, 저희 산하 길드인 글로리가 기본적으로 로터스보다 우선 공략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실 거고요.” ​ 그녀의 말에 우장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 “아… 강아린님.” ​ 그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태도를 바꿨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아린님의 일행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실례를….” ​ 그가 말을 끝맺기 전에, 강아린이 그의 팔을 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럼, 놓으세요.” ​ 짧고도 명확한 한마디였다. ​ 그녀는 다시 안내원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 “정해인 학생과 저는 협회의 허가를 받았다는 걸로 처리해주세요.” ​ 안내원은 우장훈과 강아린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우장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자, 강아린은 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 “가실까요?” ​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모로 봐도 날 도와주려 하는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 ‘근데 웬 존댓말?’ ​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포탈로 입장했다. ​ ​ ​ *** ​ ​ ​ 강아린과 나는 백두산 초입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바로 뒤에서 로터스의 2팀이 따라붙었으니, 자연스러운 동행이었다. ​ 그러나 그들은 준비해둔 별도의 루트가 있었는지 어느새 사라졌다. ​ “슬슬 갈라질까?” ​ 강아린이 입을 열었다. 내내 존댓말을 하던 그녀는 로터스의 팀이 떠나자마자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그게 나도 편했다. ​ “그래. 나 먼저 간다. 아까는 고마웠어.” ​ “응.” ​ 도와준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물어도 알려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내가 백두산에 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따라서 서로의 목적을 굳이 들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걸었다. ​ 게다가 내가 산을 등정할 방법은 누군가에게 보여지면 곤란하기도 했다. ​ ‘높다.’ ​ 백두산은 원작에서 가장 난도 높은 구역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찾으려는 조화의 편린은 네 개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속성을 지닌다. ​ 따라서 자연스레 성시우의 몫이었다. ​ 천지 깊은 곳에 묻혀 있는 편린. ​ 하지만 문제는 그 편린을 찾으러 가는 과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 최근 백두산에서 나타난 이상 파장. 그건 편린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일으킨 영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여러 길드가 공략팀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강아린과 로터스 또한 그중 하나일 것이다. ​ ‘아마 불가능하다.’ ​ 험지인 데는 이유가 있다. ​ 현 시점의 팀들이 몰려드는 마수들을 뚫고 천지까지 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 원작에서도 스토리 최 후반부의 스펙을 가진 팀만이 겨우 공략할 수 있었으니까. ​ 그럼 나는 어떻게 갈 것이냐? ​ 어느새 나는 마물이 나오기 시작하는 구역에 도착했다. 앞에는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빨간 글씨로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과거로 간다.” ​ 백두산이 이렇게 험지가 된 것은 50년 전, 1979년. ​ 조화의 편린이 천지에 생성된 후 부터였다. 편린이 뿜어내는 고차원의 에너지가 환경을 왜곡시켰고, 마물들은 그 에너지를 먹고 자라 더욱 강해졌다. ​ 그래서 나는 편린이 생성된 직후의 과거로 돌아가, 천지에 묻힌 편린을 손에 넣을 계획이다. 이것이 가장 적은 힘으로 편린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물론, 과거에서 편린을 습득하면, 현재에서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 이 계획에는 숨겨진 기믹이 하나 있다. 원작에서 처음으로 백두산 공략에 성공한 플레이어만이 발견할 수 있는 비밀 장소. ‘오래된 산장.’ ​ 첫 회차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며 편린을 얻은 플레이어들에게, ​ 다음 회차부터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정된 장치였다. 일종의 세이브 파일 같은 느낌. ​ 그래서 나는 그 산장을 찾아야 했다. ​ 산장의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다. ​ 마물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고도 근처,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지역. ​ 따라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 “씨발.” ​ 그 대략적이라는 정보가 문제였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산장은, 해가 지고 나서도 찾을 수 없었다. ​ 해가 지고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산장은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은 온몸을 휘감았고, 나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 어느새 나는 점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산속을 헤매게 됐다. ​ ‘오늘은 안되나….’ ​ 결국 다른 날에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 저 멀리서 낡고 쓰러질 듯한 산장의 형태가 보였다. ​ ‘찾았다.’ ​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비바람을 뚫고 산장으로 뛰어갔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 그러나 단 한 가지가 이상했다. ​ 바로 벽에 걸린 달력. ​ 나는 다가가 달력을 살펴봤다. ​ 다른 가구들이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새 것에 가까운 형태였다. ​ 게다가. ​ “2029년 3월 20일.” ​ 놀랍게도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지 오래됐고, 인적이 드문 위치의 산장에. ​ 최신 날짜로 갱신되어있는 달력. ​ “진짜다.” ​ 드디어 찾았다. ​ 나는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워치를 켰다. ​ [PM 10:20] ​ 어느새 시간은 굉장히 많이 흘러있었다. ​ ‘자정 12시.’ ​ 자정이 되면 이 산장은 작동한다. 그리고 조화의 편린이 생성된 직후의 시간대로 나를 보내줄 것이다. ​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천천히 시간을 기다렸다. ​ 얼마나 지났을까. ​ 나는 눈을 떠 시각을 확인했다. ​ [PM 11:58] ​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었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커지며 긴장감이 높아졌다. ​ 그런데 그 순간. ​ -쾅! ​ 문이 세차게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산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 “뭐야?!” ​ 내가 황급히 몸을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 “강아린…?” ​ 그녀였다. ​ 비에 흠뻑 젖은 셔츠를 쭉 짜며. 그녀는 당당히 산장으로 걸어들어왔다. ​ “야! 야 위험해! 나가!” ​ 나는 놀라며 소리쳤다. ​ 이 산장은 한 명만을 과거로 보낼 수 있도록 설정된 장치다. 둘 이상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 “너무해. 이 날씨에 나가라고?” ​ 강아린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 ​ -찰칵 ​ 그리고 잠갔다. 젖은 티셔츠가 몸에 밀착되어 그녀의 굴곡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 “아까 도와줬는데, 섭섭하네.” ​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당장 나가야….” ​ -째깍, 째깍. ​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가 산장의 고요함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 -뻐꾹, 뻐꾹. ​ 그리고 마침내, 벽에 걸린 오래된 뻐꾸기 자명종은. 음산한 울림과 함께, 자정을 알렸다. ​ “어머.” ​ 강아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나며 미소를 띠었다. ​ “벌써 열두 시네?” ​ 그 순간, 산장 내부의 공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 “아, 씨발….” 늦었다. ​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강아린은 그저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 그리고 곧, 공간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빛이 모든 것을 삼켰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