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교단의 회의실. ​ 방의 중앙에는 용사, 요한을 포함한 몇몇 인물들이 서 있다. 그들의 리더격인 교주, 성영일은 굳은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 서류에는 바티칸 내부의 협력자가 보낸, 두 줄의 정보가 적혀 있다. ​ “정말입니까?” ​ 침묵을 깬 것은 요한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지로 눌러 담은 분노와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 교주, 성영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 “예, 대한민국 시각으로 오늘 낮에 바로 포탈을 사용해 이곳으로 귀환한다고 합니다.” ​ 그의 확신에 찬 대답에, 요한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바티칸으로 떠난 지 고작 하루. 다행히,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이러면,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극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희망도 곧, 시커먼 질투심에 잠식당했다. ​ “이해가 안 가는군. 대체 왜 외간 남자랑….” ​ 옆에 있던 다른 신자가 중얼거리자, 성영일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회의실을 휘감았다. ​ “우리의 목적은 그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닐세. 천박한 질투는 더더욱 용사의 덕목이 아니겠지요.” ​ 그는 요한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교단의 규율을 바로 세우고, 성녀로서의 그녀의 본분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명분이 가장 중요해.” ​ 성영일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 “성녀께서 도착하시면, 모두 예를 갖추게.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질문할 걸세.” ​ 그의 계획은 명확했다. 천여울의 이번 돌발적인 행동을 빌미로, 그녀의 평판에 흠집을 내고 용사파의 입지를 다시 한번 다지려는 속셈이었다. ​ “교단과의 상의 없이, 근본 모를 외부 남성과 단둘이 바티칸에 방문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 특히, 성녀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정해인이라는 존재를, 어떻게든 떼어놓아야만 했다. ​ 점점 체급이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하는 일이 족족 성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아마 이 걸로… 조금 잠잠해질 것이다. ​ 요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로 들끓는 속을, 억지로 짓눌렀다. ​ 지금은 교주의 계획에 따를 때였다. ​ ​ ​ ​ ​ ​ *** ​ ​ ​ ​ ​ ​ 다음 날 아침. ​ 교황은 정해인과 천여울을 자신의 개인 식당으로 초대했다. 듣기로는, 오늘이 일정이 마지막이라고 하더라. ​ 바티칸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대접해주기 위함이었다. 아침 햇살이 글라스를 통해 들어와 식당을 비춘다. ​ 교황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두 젊은이를 관찰했다. ​ 어제 처음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 두 사람의 의자 사이 거리는 눈에 띄게 가까워져 있었다. ​ 바로 그때. ​ 정해인이 커피를 마시다 입가에 묻힌 아주 작은 크림 자국을, 천여울이 먼저 발견했다. ​ 그녀는 몸을 숙여 자신의 냅킨을 집어 들었다. 교황은 성녀가 냅킨을 건네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예상을 벗어났다. ​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몸을 기울여 정해인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자신의 냅킨으로 직접,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 정해인 또한 그 행동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 서로에게 익숙해진 연인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자연스러움. ​ 교황은 확신했다.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에는 엄청난 진전이 있었음을. ​ 교단에서도 권유하는 편이다. 오르디눔은 꽤나 개방적인 교단이니까. ​ 다만, 아르카디아가 그렇게 개방적이지는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 ​ ‘젊음.’ ​ 그래도 어떻게 두 성인남녀의 열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교황은, 이게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 느꼈다. ​ “지난밤은 잘 보내셨습니까?” ​ 교황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 정해인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지만.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옆에 앉은 성녀에게 향했다 돌아온 것을, 노련한 교황은 놓치지 않았다. ​ 천여울은 한술 더 떴다. 그녀는 정해인을 힐끗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대답했다. ​ “네, 성하. 잊지 못할 밤이었답니다.” ​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깃들어있다. ​ “다행입니다.” ​ 교황은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읊조릴 뿐이었다. ​ ​ ​ ​ ​ *** ​ ​ ​ ​ ​ 교황과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준비된 포탈로 향하기 위해 짐을 챙겨 통관소로 돌아왔다. ​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긴장감이 무색하게, 천여울과 나 사이에는 어색함 대신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큰 태풍이 한 번 지나가니까, 조금 잠잠한 느낌이랄까. ​ 잠깐만… 지나간 게 맞긴 한 건가? ​ 태풍의 눈에 들어와 놓고, 착각하고 있는 걸 수도. ​ 힐끗, 옆에서 걷는 천여울의 입술을 바라봤다. 목에 살짝 부어오른, 붉은 자국.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다. ​ 어젯밤,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서로를 탐했다. ​ 더 깊은 곳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둘 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느낌. ​ 어쨌든 숨이 막힐 정도의 입맞춤을 반복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보드게임 속으로 돌아간 줄 알았다. ​ 통관소에는 교황이 직접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렸다. ​ 우리도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 “감사했습니다.” ​ “감사했습니다, 성하.” ​ 그에 맞춰 교황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 “테르나의 축복이 함께하길.” ​ 교황의 축복을 뒤로 하고, 우리는 마침내 포탈 게이트 앞에 섰다. ​ 눈앞의 파장이 일렁이며, 푸른 빛의 장막이 소용돌이친다. ​ 나와 천여울은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우우웅. ​ 몸이 분자 단위로 쪼개졌다, 재조립되는 어지러움과 함께. 다시 눈을 떴다. ​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아르카디아 교단이다. ​ 포탈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 그러나 어지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싸늘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 지하 포탈 게이트에서 이어진 중앙 홀. 몇몇 교단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용사파 소속이었고, 그 중심에는 요한이 서 있었다. ​ 대체 어떻게? ​ 바티칸에서의 포탈 이용 시간은 그들이 알 수가 없다. ​ 천여울에게 듣기로, 성녀가 외간 남자와 단둘이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을 그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 그때, 천여울이 나를 돌아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애초에 그들을 신경 쓰는 듯한 눈빛이 아니었다. ​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적의에 찬 시선들을 향한 과시이기도 했다. ​ “집에 왔네?” ​ 그녀는 그렇게 속삭이더니, 주저 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내게 가져다 댔다. ​ “하읍….” ​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혀가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 - 츄릅. ​ 농밀하고도, 보란 듯이 긴 키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충격과 분노로 새하얗게 질려가는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 - 쯥. ​ 한참 후에야, 입술이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그 순간, 요한 옆에 있던 교주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 “성녀시여!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무슨 무례하고 경박한…!” ​ 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하지만 천여울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저 우아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 - 틱. ​ 그러자 하늘에서 작은 빛의 구멍이 열리더니, 백색의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니였다. ​ 그 모습에 홀에 있던 모든 교단 인원들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 “저, 저것은 에리엘님의… 신조(神雕)…?” ​ 물론 에리엘의 새는 훨씬 커다랗고 위엄이 넘치지만, 아무튼 얘도 크면 그렇게 될 것이다. 본질은 같으니까. ​ 천여울이 바티칸 여행을 통해, 에리엘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계승했음이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다. 용사파는 분명 교단의 성녀로서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책임을 묻고, 그 동행인 나를 핑계로 그녀를 압박하려 했을 것이다. ​ 그러나. ​ 성녀가 외간 남자와 사사로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 아르카디아의 성녀가, 불가람의 후계자와 함께. 성지를 순례하여 여신의 권능을 온전히 이어받아 돌아온 것이 되어버렸다. ​ 이 정신 나간 성과 앞에서는, 어떤 트집과 도덕적 잣대도 명분을 잃기 마련. ​ 홀 안의 인원들은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뻥긋거렸다. 물론 교주도 마찬가지. ​ 천여울은 그런 그들을 향해, 아주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홀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죄드립니다. 며칠 전, 제게 에리엘님의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 신탁?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 “에리엘님께서는, 저의 이 성스러운 여정에 이 자, 불가람의 후계자가 반드시 함께해야 할 동반자라 말씀하셨습니다.” ​ 그녀는 말을 마치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부드러운 감촉이 팔을 타고 전해져 왔다. ​ “그리고 저는, 바티칸에서 테르나님의 흔적에 닿으며, 그 신탁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혹시… 이의가 있으신 분이라도 계신가요?” ​ 전부 구라다. ​ 일단 첫 번째, 여행을 제안한 것은 나였고. 두 번째, 에리엘이 그런 신탁을 내릴 리도 없다. ​ - 짹짹? ​ 그러나 천여울의 혼이 담긴 거짓말은, 가니라는 증거 앞에 진실이 되어버렸다.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교주는 굳은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축하드립니다, 성녀님. 교단의 영광입니다.” ​ 천여울은 그제야 나만이 보이는 각도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 “가자.” ​ 그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유유히 홀을 빠져나갔다. ​ - 짹짹? ​ 오직 가니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짹짹거릴 뿐이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