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띠링. 띠링. ​ 새벽의 고요함을 찢는 날카로운 알림음. ​ 올 것이 왔구나. ​ 바티칸은 아직 늦은 밤일 테지만, 대한민국은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이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메시지에, 하시온은 이불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감쌌다. ​ 그녀는 침대 깊은 곳으로 더욱 파고들며,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워치를 켰다. 액정의 빛이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 [1000_y]: (사진) ​ [1000_y]: (사진) ​ “… 미친년.” ​ 하시온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 몸에 수건 한 장만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거울 앞에서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여울의 나신. ​ 수건 하나로는 때려죽여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지방 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종이 쪼가리로 가려질 것이라 생각하면, 그게 멍청한 거 아닐까. ​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호텔의 침대 위에서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해인의 모습. 아마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찍은 것이리라. ​ 아무튼, 두 장의 사진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노골적이었다. ​ ‘설마….’ ​ 설마, 하는 마음에도 하시온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조용히, 단톡방을 확인했다. 메시지 옆의 숫자는 이미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 이 도발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는 의미. ​ 하지만 답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 “…….” ​ 그건 하시온도 마찬가지. 괜히 벌집을 들쑤시기 싫은 느낌이랄까. ​ 하시온은 결국 눈을 감고 워치를 덮으려 했다. ​ 그러나, 그때. ​ 그녀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 천여울이 불을 질렀다면, 그녀는 그 불을 옮길 생각이었다. ​ 그녀는 다시 워치를 켜,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마, 어딘가에 저장을 해두긴 했을 것이다. ​ 알파벳을 한참이나 내린 끝에, 마침내 찾아냈다. ​ [summer] ​ 누군가의 연락처. ​ 그녀는 망설임 없이, 천여울이 보낸 두 장의 사진을 그대로 그 연락처에 전달했다. ​ [시온]: (사진) ​ [시온]: (사진) ​ [시온]: 얘네 재밌게 놀고 있나 봐! 사진도 보내주네? ​ 그리고는, 아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감탄사가 담긴 메시지를 덧붙였다. ​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전송된 사진 옆의 숫자가 곧바로 사라졌다. 읽었다는 뜻이다. ​ 하지만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초조함은 없다. 확신에 찬 기대감만이 그녀의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 ​ 몇 초가 흘렀을까. ​ [summer]의 이름 옆, 프로필 상태를 알려주는 작은 녹색 동그라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 [방해 금지 모드] 로. ​ 그것을 확인한 하시온은, 마침내 소리 내어 웃었다. ​ ​ ​ ​ ​ ​ *** ​ ​ ​ ​ ​ ​ ​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 나는 반드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했고. ​ 그런 내 곁에 자연스럽게 그녀들이 관심을 가지고 모여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 ​ 아마 그녀들이 가진 감정에 대한 예측이 확신으로 바뀐 시점은…. ​ 강아린이 가져왔던 그 보드게임 이후일 것이다. ​ 그전까지는 의심에 가까웠지만, 그날 이후 천여울과 나 모두, 그리고 어쩌면 다른 아이들까지. 서로를 향한 심리적 저항감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느꼈다. ​ 나 또한 그녀들을 아끼고, 또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어떤 의미든 간에. ​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이국의 호텔 방에서, 이 순간에 바로 벌어질 줄은 몰랐다. ​ “헤읍….” ​ 천여울이 혀끝으로 내 입술을 슬쩍 간질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난다. ​ 할 듯, 말 듯,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다시 풀어주며 교태를 부린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을 살폈다. ​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남자를 어지럽게 만드는 달콤한 체향이 풍겨왔다. 본능적으로 유혹하는 듯한 행동은 덤. ​ 그러나, 나 역시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 ‘안 잡아먹어?’ ​ ‘다음은 없어?’ ​ 그녀의 모든 행동이, 눈빛이,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내내 천여울에게 휘둘리다 끝날 게 뻔해 보였다. ​ ​ 나도 오늘 바로 거사를 치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끌려다닐 생각은 없다. 주도권을 가져오는 편이 내 스타일에 맞는다. ​ 적어도 연애 경험에 있어서… 천여울이 내게 비할 바는 못될 테니까. ​ 따라서 나는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천여울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감아 붙잡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 훅, 하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의 신체가 내 가슴팍에 완전히 짓눌렸다. ​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야.” ​ 천여울은 당황한 듯 몸을 살짝 빼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몸을 붙잡고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럴 줄은 몰랐는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다. ​ 나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 “뭐하냐?” ​ 질문을 했으나,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틀어막았다. ​ - 츕. 쭙. ​ 처음의 부드럽고 장난스럽던 키스와는 달랐다. 솔직히 말해, 그런 게 키스라 보기는 어렵기도 했고. 놀란 그녀의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느껴졌다. ​ “흐읍…?!”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아까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통통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틈을 비집고 혀를 밀어 넣어 그녀의 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 츄릅, 베릅…. ​ 그녀의 혀가 놀란 듯 움츠러든다. 나는 그 기가 죽은 혀를 쫓아가, 부드럽게 감아 빨아들였다. 천여울의 입에서 막힌 신음이 터져 나왔다. ​ "흐읏… 하읍… 으응…!" ​ 점차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소극적이던 혀가, 이내 조심스럽게 내 움직임에 응해왔다. ​ “하으… 헥….” ​ 저항은 어느새 쾌락에 젖은 신음으로 변해 있었다. ​ 천여울의 숨결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내 목을 감싸 안으며, 더 깊은 키스를 갈망하듯 매달려왔다. ​ - 쪼옵, 쪽…. ​ 질척이는 소리가 고요한 호텔 방 안을 가득 채운다. 한참 동안, 우리는 숨 쉬는 법조차 까먹어버린 듯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 나도 어딘가 이성이 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이마를 맞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리고 내 입에서, 똑같이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 “하아… 하아….” ​ “후….” ​ 은은한 조명 아래, 붉게 상기된 채 쾌감으로 젖어있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혀와 혀를 연결하는 실이 주욱, 하고 늘어진다. ​ 그 안에는 놀라움과 혼란이 섞여 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 완전히 압도당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늘 당당하던 성녀, 천여울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 명의 여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내가 일전의 보드게임 속 세상에서 눈을 뜨고 한 생각이 있다. ​ 천여울과 나는 게임 속 역할 상 부부였고, 이런저런 입맞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 민망한 기억이지만… 어쨌든. ​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그 세계의 정해인은, 그다지 능력이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체력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지만. ​ 아마, 현실의 정해인. 그러니까, 내가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했다. 지금 내 눈앞의 천여울이 바로 그 증거였다. ​ 그녀는 예상했던 쾌감과 현실의 그것 사이의 거대한 괴리감에,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 내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본 천여울의 어깨가 움찔, 하며 떨린다. 나는 그런 그녀의 땀으로 적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 “걱정하지 마.” ​ 나는 여유를 담아 말했다. ​ “오늘은… 안 잡아먹어.” ​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 “대신, 다음은 없어.” ​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러자 그녀는 아주 천천히,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 내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을 때, 그녀의 손이 스르륵 올라와 내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 “… ?” ​ 내 의아한 시선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방금과는 전혀 다른 눈빛. 젖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어떤 의지가 타오른다. ​ 그녀는 내 손목을 잡은 채로, 내 손가락을 자신의 붉고 뜨거운 입술로 천천히 가져다 댔다. ​ - 쪽. ​ 새끼손가락 끝에,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이 닿는다.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손가락으로 입술을 옮겼다. ​ 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차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 쪼옵. ​ 이번에는 좀 더 깊게, 마치 입맞춤하듯. 나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 - 츄릅…. ​ 그녀는 내 가운데 손가락을 가볍게 빨아들이며, 혀로 그 끝을 요염하게 핥았다. ​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아까보다 훨씬 더 요염하고,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 “기다릴게.” ​ “…….”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뭘 기다리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 “그 다음.” ​ 되찾은 줄 알았던 방 안의 주도권은, 다시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천여울이 원한 것은. ​ 주도권 따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