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울은 편린의 시련 속으로 조용히 떠났다. ​ 아마, 아주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증명하고, 못하고는 그녀의 실력에 달려있으니까. ​ 나는 붕대로 단단히 감겨 있는 창을 옆에 내려두었다. 곧, 천여울 곁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쓸었다. ​ 잠든 얼굴은 한없이 평온하다. 깊은 꿈에 빠진 아이처럼, 조용히 숨을 고른다.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 나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 나도 알고는 있다. 천여울이 나에게 가진 감정이 어떤 것이라는 쯤은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 인제 와서 외면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 “알았어.” ​ 답을 계속 피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덮었다. 편린을 습득 한다면, 나 역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 그리고, 그때. ​ - 또각. ​ 정적을 깨는 구두 소리가, 박물관의 대리석 바닥 위로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감던 눈을 살짝 떴다. ​ 조명이 모두 꺼진 박물관, 달빛 아래, 어둠을 가르며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하얀 셔츠, 검은 머리칼, 차가운 표정. ​ 낮에 만났던, 자신을 이탈리아의 영웅이라 소개했던 그 남자. 폰 세크였다. ​ 폰 세크는 라코니안 석판 앞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중간쯤에서 멈춰 선 그는, 한 손을 뒤로 가볍게 깍지 껴 고요히 석판을 올려다본다. ​ 한참이나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 “참, 낮에 봐도 지금 다시 봐도… 이 석판은 정말 불경스럽군요.” ​ 기묘한 울림이 말에 담겨 울려 퍼진다. 목소리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진동이, 내 감각을 마구 자극했다. ​ 그의 시선이, 길게 이어지며 내 쪽으로 쭉 미끄러진다. 낮에 봤던 그 눈빛은 아니었다. ​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달빛이 나와, 그만을 비친다. ​ 일전에 느꼈던 기시감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본능적인 직감이, 소리친다. ​ 천여울을 뒤로 살짝 보내 시야에서 가린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팔을 뻗었다. ​ - 스르르. ​ 붕대가 흘러내리며, 짙은 어둠과 금빛이 교차하는 날카로운 창끝이 모습을 드러낸다. ​ 그러자 폰 세크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그의 목소리가, 박물관을 가득 채운다. ​ “사도, 제 이석(二蓆)… 알렉세이 베르가라고 합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달빛을 흡수하듯 물들기 시작했다. ​ - 사락, 사락. ​ 머리카락이 길게 풀려나려, 황금빛이 일렁인다. ​ 한없이 깊은 악의가 방 안에 퍼진다. 나는 천여울의 앞에, 창을 든 채로 섰다. ​ 사도. ​ 이석(二蓆) 알렉세이. ​ 원작, 최악의 적 중 하나. ​ 그는 완벽한 변장술을 사용할 수 있다. 시스템마저 속일 수 있는 재주다. 하지만 편린만큼은, 속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은, 결국 편린이 내게 보내는 경고였다. ​ 다시는 속지 않는다. ​ 나는 침착하게, 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 원래라면, 사도와 악신들은 편린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절대로. ​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여기에?’ ​ 손에 힘을 주어 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알렉세이의 시선이 일순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금세 태연하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 “진정하세요. 오늘의 저는, 그저 관찰자일 뿐입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서요. 누구 덕에 아직 좀 더 요양을 해야 합니다.” ​ 그러자 알렉세이가 농담을 섞으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 분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세이는 변장과 분신, 환영에 능한 자다. ​ 게다가 아직 사도들은 악신의 부활에 힘을 들일 시기이기도 했다. ​ 그렇다 하더라도, 내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 “죽여보면 알지 않을까?” ​ 나는 가볍게 창을 겨눴다. 그러자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하하… 저도 올 생각은 없었는데, 그분이 명령하시더군요.” ​ 알렉세이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고, 목을 가다듬는 시늉을 보인다. ​ “‘알렉세이, 네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오거라.’… 라고요.” ​ 알렉세이는 어설프게 묵직한 톤을 흉내 내며 말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박물관의 어둠을 천천히 거닐며, 유유히 라코니안 석판을 바라봤다. ​ “사실, 저는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힘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요… 그런데….” ​ 그의 시선이 석판 위에 고정된다. 짙은 달빛 아래, 눈동자에 탐욕과 불길한 미소가 어른거린다. ​ “이런… 진짜였네요.” ​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더 이상 놈의 세 치 혀에 시간을 쓸 생각은 없었다. ​ 편린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내 몸을 타고 전신으로 번진다. ​ [파사현정(破邪顯正).] ​ 사한 것을, 부순다. ​ 순간, 나는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창끝을 그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질렀다. ​ 알렉세이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번개처럼 몸을 젖혀 피했다. 금빛 머리칼이 허공을 스치며 흩날린다. ​ 피한 줄, 알았을 것이다. ​ 그러나 내 첫 공격은 허공에서 번져나가며 일렁였다. 마치 수면 위의 파문처럼, 환영처럼 사라진다. ​ 그리고, 공간이 한 번 더 비틀린다. ​ 이형환위(異形換位). ​ 첫 번째 창격이 환영처럼 사라지는 그 순간. 진짜 창끝이 허공을 갈라 알렉세이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 - 콰직! ​ 육중한 파열음과 함께, 창끝이 사도의 목을 관통하는 감각만이 손끝에 남는다. ​ 허초(虛招) 이후, 본초(本招)가 교차하는 일격. ​ 알렉세이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듯,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이 정도일 줄은.” ​ 그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진다. ​ 몸이 휘청인다. 창이 파고든 자리를 손으로 더듬다가,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 피가 금빛 머리칼을 따라 조용히 흘러내린다. 상처가 꿈틀거리며 재생을 시도하지만, 창끝에서 퍼지는 힘이 모든 것을 찢어버리며 막아섰다. ​ “… 재생이 안 되는 군요. 아무리 분신이라 해도….” ​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찌르자마자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분신이었다. ​ 진짜 알렉세이라면, 이 정도 공격에 쉽게 구멍이 나진 않을 것이다. ​ 나는 창에 마나를 더 쥐어짜며, 놈에게 더 다가섰다. ​ “네 주인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 알렉세이는 목을 움켜쥐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금빛 머리칼에 피가 번진다. ​ “글쎄요…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 목소리는 여전히 가볍다. ​ 하지만 아까보다, 한층 더 흐릿해져 가는 존재감이. 이미 분신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확실한 건….” ​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 알렉세이는 고개를 들고, 마지막까지 눈을 빛내며 말했다. ​ “그분께서, 뭔가… 느끼셨나 봅니다.” ​ 금빛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빛난다. ​ “다음에, 또 뵙죠.” ​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알렉세이의 몸이 빛에 녹듯이 사라졌다. 그가 흘리던 피마저도 흔적 없이 증발했다. ​ 창끝에는 미세한 피조차 남지 않았다. ​ 달빛만이 석판 위를 차갑게 비춘다. ​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느릿하게 창을 내렸다. ​ 역시. 제대로 된 답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유려한 화술과 연기로 상대의 심중을 흩뜨리고, 농락하는 성격이었으니까. ​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놈을 만난 것은 오히려 행운에 가깝다. ​ 알렉세이. ​ 그는 악신의 사도이지만, 그 본질은 충성과는 거리가 멀다. ​ 순수한 호기심과 흥미에 더 가까운 존재다. 오직 자기만족과 관찰, 그리고 세상의 뒤틀림만을 쫓는다. ​ 그가 아닌… 충직한 사도였다면, 악신이 눈치챘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 이걸로 알게 됐다. 저번 사도와의 전투부터, 악신은 확실히 무언가를 눈치챘다. ​ “…….” ​ 앞으로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더 촉박할지 모른다. ​ 나는 조용히 창을 붕대로 다시 감으며,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천여울을 바라봤다. ​ 그러나 계획이 달라질 것은 없다. ​ 다만,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 편린의 존재가, 악신에게 드러난 이상. ​ ​ ​ ​ ​ *** ​ ​ ​ ​ ​ 어둠 속, 무언가 스산한 기운이 가득한 거대한 공동. ​ 공동의 중앙, 마치 세상의 중심처럼 우뚝 솟은 왕좌 하나가 어둠을 압도하고 있었다. ​ 그 왕좌 주위를 아홉 개의 옥좌가 원을 그리며 공중에 떠올라, 서로를 에워싼다. ​ - 푸왁! ​ 가장 높은 자리, 그 아래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서. ​ 금발의 남성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갑작스레 피를 토했다. 피를 삼키지 못하며, 연거푸 쏟아낸다. ​ 하지만 그는 웃으며, 손등으로 피를 닦았다. ​ 그러자 그 위, 가장 높은 자리. 어둠을 두른 사도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육중한 기운이 공간 전체를 압박한다. ​ “무슨 일이지?” ​ 알렉세이는 대답 대신, 손끝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짧게,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 “들킬 줄은… 몰랐네요.” ​ 왕좌의 사도가 묵빛의 투구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사슬과도 같은 중압감이 알렉세이를 억눌렀다. ​ “분명 그분께서, 조용히 알아오라 일러두지 않았나?” ​ 알렉세이의 어깨가 압력에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 “그랬나요?” ​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입꼬리만을 끌어올리며 태연하게 받아친다. ​ 왕좌 위의 사도는 아무 말도 없이, 오래도록 알렉세이를 내려다본다. ​ “까먹었나··· 봅니다.” ​ 알렉세이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의 기행을, 그분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 “그렇군요. 영광이네요.” ​ 왕좌 위의 사도는 한참을 침묵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