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진하고도, 묘한 분위기 속, 정적을 깬 것은 천여울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살살 웃었다. 말한 것처럼 아직은 아니라는 표정이다. ​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포탈을 이용한 게 오후 6시쯤이었기에 바티칸은 아직 낮이었다. 분명 ‘아직’은 봐준다고 했다 ​ 아침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 “날씨 좋다 그치?” ​ 천여울이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며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 “오늘 뭐 할 거야?” ​ 궁금할 만도 했다. 편린을 얻겠다는 것은 나만의 목적이었고, 천여울은 이유도 모른 채 나를 믿고 여기까지 동행했을 뿐이니까. 따라서 나는 미리 준비해둔 가장 그럴듯한 계획을 꺼냈다. ​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좀 있어 보이기도 했고. ​ "여기까지 왔으니까,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서 박물관 구경이나 해볼까?" ​ 먼저 온 관광객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관광할 때, 자연스럽게 합류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이 도시의 박물관에는, 편린이 있으니까. ​ “좋아.” ​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게 좋겠다는 내 진의를 꿰뚫기라도 한 건지,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 우리는 방에 가방만 던져둔 상태로 곧장 밖으로 나섰다. 복도 끝에는 수녀가 미동도 없이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천여울이 먼저 다가가 입을 열었다. ​ “수녀님.” ​ “네, 목욕을 준비해 드릴까요?” ​ “아뇨? 그건 아직. 혹시 관광객들 지금 관광하고 있을까요?” ​ “네. 아마 지금쯤 공원을 지나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을 겁니다.” ​ 타이밍이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녀에게 말했다. ​ “저희도 혹시 같이 둘러볼 수 있을까요?” ​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수녀가 먼저 앞장섰다, 숙소를 나와 걷는 길은 조용하다. 성당 건물들 사이로 검은 사제복을 입은 교인들만이 오갈 뿐, 그 복장과 한정한 거리가 이곳이 어디인지 실감 나게 했다. ​ 오르디눔의 건축물들은 아르카디아의 것과는 그 결이 묘하게 달랐다. ​ 우리는 성당들을 가로질러 박물관이 있는 대성당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가이드의 깃발 아래 모여있는 관광객 무리가 보인다. ​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안내해주셔서.” “감사해요.” ​ 천여울과 내가 차례로 인사를 건네자, 수녀는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 “혹시 목욕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 ​ “그건 괜찮….” ​ 천여울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입을 살짝 막았다. ​ “꼭, 말씀드릴게요.” ​ “그럼 이만.” ​ 결국 수녀는 만족한 듯 떠났다. 아무래도 그게 그녀의 임무인 듯했다. 입을 막던 손이 떨어지자, 손끝에서 느껴졌던 은은한 향이 남아 나를 자극했다. ​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의 맨 뒤로 합류했다. ​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듣지 않고 주위를 계속 둘러봤다. 모든 신경은 그 유물이 어딨는지에 대해 쏠려 있었다. ​ 전시관은 생각보다 넓었다. 나는 관광객인 척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 그러던 중, 가이드가 돌로 만들어진 석판을 가리켰다. ​ “This tablet is called Laconian. (이 석판은 라코니안 석판입니다.)” ​ 이거다. ​ 라코니안 성판. 바티칸이 최근 찾은 성물이었다. ​ 갈망의 편린은 이 석판 안에 깃들어있다. 무형의 형태로. ​ 획득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천여울이 저 석판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 ​ 가이드가 손짓하며, 한 번씩 만져보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 바티칸에서는 성판의 진짜 가치를 모른다. 그저 성스러운 기운이 깃든 유물 정도로 여겨, 관광객들이 직접 만져보게끔 허락했다. ​ 성물의 감각을 느껴보기 위함이라나 뭐라나. ​ 그러나 천여울이 전시된 대리석 석판을 만지면, 시련이 시작된다. 천여울 혼자 오롯이 치루어야 하는 것이며, 내가 관여할 부분은 없다. ​ 그녀의 성장 정도는 완벽히 파악했다. 듀얼 캐스팅의 초입에 도달했으니, 조건은 완벽히 달성한 셈이다. ​ 내가 할 만한 일은, 그저 밖에서 지켜주는 정도? ​ 결국 이 기연의 핵심은 획득 방법이 아니라, 획득하기 위한 조건 그 자체에 있다. 듀얼 캐스팅이라는, 그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한 천여울이었기에, 시련 자체는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 그때였다. ​ “나도 만져봐야지.” ​ 천여울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천여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 “왜에?” ​ 잡고 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이유는 있다. 천여울이 석판에 손을 대면 그 즉시 기절하기 때문에, 사방에 관광객이 깔려 있는 낮에는 무리다. ​ 갑자기 아르카디아의 성녀가 기절이라도 한다면? ​ 바티칸 전체가 뒤집힐 일이었다. ​ 하지만 그런 복잡한 속내를 지금 설명할 수는 없었다. ​ “… 사람이 너무 많네. 밤에 다시 오자.” ​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 이 박물관은 공원과 이어져 있어 사실상 24시간 개방된 공간이나 다름없다. 밤이라 하더라도, 오르디눔 측에서도 천여울의 움직임을 제한하지는 않을 거니까. ​ “밤에…? 좋아.” ​ 천여울은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 그때였다. ​ “한 달 전에 심해에서 발견된 석판이라는데… 참 예쁘지 않나요?” ​ 보통 이런 곳에서 말을 거는 건 대부분 외국인이다. 그러나 내 귓가에 들리는 것은, 너무나도 유창한 한국어였다. ​ 고개를 돌리자, 짙은 검은색 머리칼을 단정히 넘긴 미남이 서 있었다. ​ “그러네요.” ​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이상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 “누구세요?” ​ 천여울이 한 걸음 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막아섰다. 그녀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 “아, 실례했습니다. 폰 세크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영웅입니다. 뉴스에서만 뵙던 분들을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너무 잘 어울리는 유명인이 연인이라… 저도 모르게 말을 걸고 싶었네요. 이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 “연인이요…? 아… 네에… 꼭 비밀로 부탁드릴게요.” ​ 천여울이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 이 기시감의 정체가 뭘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라 해야 할까. ​ 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일체지각(一切知覺)을 발현했다. ​ [폰 세크] ​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평범한 영웅. 마력의 흐름도, 기운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 기분 탓이었나? ​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잘생긴 얼굴은 어디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 “뉴스를 봤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불가람이라… 역시 이번에도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하루 만에, 통과하실 줄이야.” ​ “그 소식이 벌써 여기까지 들렸나 보네요.” ​ “그럼요. 워낙 큰 사건이었으니까요! 하하… 아무튼, 데이트를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 폰 세크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생각을 접었다. ​ 나는 자연스럽게 천여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갑자기 석판을 만질 수도 있었으니까. 어차피 밤이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성판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 나와 천여울은 마치 진짜 연인처럼 바티칸과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웅장한 성당들을 구경하고,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 한번은 젤라토 한 컵을 샀다. ​ "스푼이 한 개인데?" ​ "어머, 미안." ​ 물론 천여울의 실수였다. 진짜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젤라또를 결국 서로 떠먹여 줬다.​ ​ “냠냠.” ​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성판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한참을 걷고, 웃고, 떠들다 보니 문득, 느낀 것. ​ ‘이거 진짜 진짜 데이트잖아?’ ​ 목적이야 어찌 됐든, 지금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연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 어느새, 해가 저물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 우리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 ​ ​ ​ ​ ​ ​ *** ​ ​ ​ ​ ​ ​ - 띵동. ​ 초인종을 누르며, 윤채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아주 늦은 저녁, 윤채하는 다소 성급하게 한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 그녀는 상당히 급한 상태. ​ 분명 공방에서 나오면, 정해인은 확실히 말을 했었다. 내부에서 얻은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애프터케어를 해주기로. ​ 그런데. 나온 이후, 연락이 뚝 끊겼다. ​ 어제는 그렇다 치고, 오늘도 기다렸다. 그런데도 늦은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연락이 안되고, 이러다가 그냥 계속 안 올 것 같아서 먼저 와버렸다. ​ 기다리는 건 성격이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냥 보고 싶기도 하고. ​ 사실 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을 뿐. 비중으로 따지면 앞이 5% 뒤가 95% 정도였다. 시간의 흐름 상 몇 달 동안 같이 있다가, 바로 눈에 안 보이니 마음이 공허했다. ​ 그리고 또다시, 손을 들어 두 번째 초인종을 누르려던 찰나. ​ 문이 열렸다. ​ “… ?” ​ 윤채하는 멈칫했다. 그녀가 기대했던 얼굴, 정해인이 아니었다. ​ 대신, 문을 연 건 하시온이었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 어딘지 흐트러진 옷매무새. ​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하시온도 마찬가지였다. ​ 정해인은 바티칸으로 떠났다. 거기에 마침 뱅퀴셔의 인원들도 전부 나갔기에, 그녀는 홀로 조용히 침대에 누워 패배감을 되새기고 있었다. ​ 그러다 초인종이 울렸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는데…. ​ 문 앞에는 예상 못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곳은 뱅퀴셔의 건물이다. ​ ‘얘가 여길 왜?’ ​ 하지만 시온은 이내 깨달았다. ​ ‘아, 해인이 보러 왔구나.’ ​ 윤채하의 당황으로 물든 눈빛은 너무나 솔직했다. 혼란, 기대, 낙담, 감춰지지 않는 감정들이 궁수의 눈을 가진 시온에게는 줄줄이 읽힌다. ​ 시온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 너도 이제, 알아야지? ​ 이건… 귀한 감정이니까. ​ “해인이?” ​ 그를 찾는지에 대해 가볍게 묻자, 윤채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 “여행 갔어. 바티칸으로.” ​ 시온은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윤채하. 그녀라면, 분명 할 것 같았다. ​ 잠깐 정적이 흘렀다. 윤채하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덧붙인다. ​ “… 누구랑?” ​ 시온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 “여자랑.” ​ 윤채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 “아마… 둘이서?” ​ 패배자는 원래 늘어나는 법이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