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대화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뱅퀴셔 숙소 말고, 기숙사로. ​ 짐을 싸야 했으니까. ​ 옷들이랑, 대부분의 짐들은 전부 기숙사에 있었다. 짐을 싸던 도중, 메세지가 도착했다. ​ [1000_y]: 지금 싸고 있어? ​ “아.” ​ 인정한다. ​ 나는 천여울을 매우, 과소평가했다. 그녀의 성격, 그리고 그녀의 위치와 입지까지도. ​ 천여울은 본질적으로,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감정이든, 관심이든. ​ 게다가 그녀는 아르카디아의 정식 성녀. 단독으로 교황과 연결해 협상을 끌어내고, 그 자리에서 바로 허가를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 그리고 천여울은 그 힘을 매우 잘 사용했다. ​ 확정된 날짜는 바로 내일. ​ 내가 찾은 날짜는 3주 뒤였는데…. ​ 과소평가로 인해 치를 대가는 단순하다. 우린 내일 바로 바티칸으로 출발한다. 마음의 준비 따위, 할 시간은 없었다. ​ 그러나, 그보다 날 더 당황하게 한 건 천여울의 태도였다. ​ 시종일관 나와 여행을 가는 것을 원하는 듯한 태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사천리로 모든 걸 진행했다. ​ 이쯤 되면, 내가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천여울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유추하게 된다. ​ 성인 남녀가 단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 그러니까, 그 뜻을 모를 리는 없으니까. ​ “…… 아.” ​ 어떡하지.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 만약 난관이 닥친다면 슬기롭게 넘길 수 있는가? ​ 과연, 참을 수 있을까? ​ “참지.” ​ 결론은, 넘길만 하다였다. ​ 설령 지금의 내가 보드게임 덕에 심리적 방화벽이 무너졌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오픈된 마인드는 아니다. ​ 그리고 그녀 또한 나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추진력일 수도 있는거고. ​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고, 가방의 지퍼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일단, 짐은 다 쌌다. ​ 오래 체류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크게 챙길 것은 없었다. 평소 입던 옷, 속옷 몇 벌, 세면도구, 워치 충전기. ​ 간단한 옷이랑… 그래, 그냥 옷 정도. ​ 뭘 더 챙기지는 않겠다. ​ 나는 워치를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 [belief_]: 다 쌌어. ​ 머릿속에서 아침의 대화가 조용히 재생된다. ​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자.’ ​ 그녀의 말이었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들었다. ​ ‘내일 당장 출발할 비행기는 없을 텐데.’ ​ 게다가 바티칸에는 공항이 없다. 로마에서 따로 또 이동해야 하므로, 상당히 피곤해진다. ​ 천여울은 그 말에 살짝 눈을 깜빡이며,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선언했다. ​ ‘포탈 타자.’ ​ ‘바티칸까지? 직통은 없을….’ ​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 ‘직통 포탈 있어.’ ​ 말문이 막혔다. ​ 교단 내에 있는 극 내부인에게만 허용된 바티칸 직통 포탈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나는 처음 알았다. ​ [1000_y]: 좋아 [1000_y]: 내일 아침까지 교단으로 와~ ​ 답변이 도착했다. 나는 대충 답하고 워치를 닫았다. ​ 다시 한번 짐을 확인했다. 별다를 건 없었다. ​ “정신 차리자.” ​ 이번 여행이 정말 편린 획득만을 위한 여정으로 끝날 수 있을까. ​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 ​ ​ ​ *** ​ ​ ​ ​ ​ 천여울은 짐을 싸고 있었다. ​ 성녀의 드레스룸. 은은한 조명 아래, 비단처럼 윤이 흐르는 드레스들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성복도, 예복도 아니었다. ​ 얇고, 또 너무나 가벼운 소재로 이루어진 옷. ​ 명칭은 잠옷. 허나, 단순한 잠옷은 아니었다. ​ 살짝 비치는 시폰, 등이 드러나는 커팅. 란제리에 가까운, 슬립 웨어들이었다. ​ “이게 나아요? 아니면 이거?” ​ “왼쪽께, 더 잘 어울리셔요!” ​ 시중을 들던 시녀 중 한 명이 답했다. ​ “그래요?” ​ 천여울은 웃으며 옷을 몸에 대봤다. 그녀는 커튼을 가볍게 젖히며 거울 앞에 선다. ​ 속옷 위에 걸친 얇은 옷감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 드레스룸에서는 난데없는 패션쇼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순수하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시녀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천여울은 거울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양손으로 살짝 밑단을 잡아당겼다. 다리선이 살짝 드러나고, 어깨끈이 미세하게 흘러내렸다. ​ 온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천여울은 또 다른 옷걸이에서 두 번째 옷을 들었다. ​ “이거는요?” ​ 이번에는 파자마 상의에, 실크로 만들어진 하의였다. 그러나 앞이, 다 안 잠긴다. ​ 시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손가락을 뻗었다. ​ “이게… 더 예뻐요오….” ​ 둘 다 명백히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지만, 좀 더 나아 보였다. ​ 그 말에 천여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곤 천천히 벽면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 “고마워요.” ​ 시녀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말했다. ​ “근데… 정말, 그분이랑 같이 가시는 건가요…?” ​ 천여울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 “네.” ​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 “흐응….” ​ 천여울은 시녀가 나감과 함께, 옷을 쥐고 있던 손을 탁, 놓았다. 속옷 위로 덧입던 잠옷이 천천히 내려오며, 그녀의 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워치를 켰다. 사실, 그녀로서도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이었다. ​ [1000_y]: 나 내일 여행감 ​ 그래서 천여울은 시원하게 방화했다. 아주 제대로 불을 지폈다. ​ 대상이 누군지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아마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 - 띠링, 띠링. ​ 답장은 예상대로 빠르게 도착했다. ​ [RIN]: 정신 차릴 거지? [RIN]: 짐승 아니잖아, 맞지? ​ 아주 노골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살짝만 삐끗했다면, 저 메세지를 보내는 사람이 본인이었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졌다. ​ 그러나, 결론. 결국 그녀는 아니라는 소리다. ​ [1000_y]: ㅋ ​ [RIN]: ? 천여울은 잠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짧게 웃었다. 즉시 강아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 물론 시원하게 거절했다. ​ 이어지는 메세지. ​ [시온]: 겁도 엄청 많은 주제에 [시온]: 네가 퍽이나 하겠어? ​ “읏.” ​ 정곡을 찔린 느낌이다. ​ 그녀들끼리는 정해둔 선이 있었고, 정해인의 경지가 일정 수준을 넘기 전까지는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천여울도 괜한 억제력이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 그러나…. ​ 지킬 수 있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 “흐… 모르겠는데.” ​ 그게 지금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 ​ ​ ​ *** ​ ​ ​ ​ 바닥이 뒤틀렸다. 빛이 휘몰아치는 순간,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감각이 돌아온다. ​ “… 아오.” ​ 어지럽다. 포탈이라는 건, 언제 써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 도착한 장소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홀. 둥글게 솟은 돔 천장 아래, 갑주를 입은 근위대들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준다. ​ 바티칸의 포탈 통관소. 천여울은 한발 먼저 나섰다. ​ “아르카디아의 성녀입니다.” ​ 자기소개는 짧다. ​ 그녀는 열 마디 말보다, 얼굴 자체가 신분증이었다. 그 즉시 확인은 끝났다. ​ “동행자분은…?” ​ 근위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녀의 동행자라 하여도, 검문 자체는 생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 “정해인입니다.” ​ 근위대는 다시 물었다. ​ “소지하신 무구는 잠시 제출해주시겠습니까?” ​ 나는 붕대에 돌돌 묶인 카타스트로피를 내밀었다. 불가람의 손길이 닿은 이후, 워낙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기에, 마법적 처리가 된 붕대로 감고 다닌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자동으로 풀린다. ​ 검사를 맡은 수녀가 붕대를 유심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 “혹시… 불가람의 시련… 그분 맞으신가요?” ​ “네.” ​ 나도 확실히 유명해지긴 했나 보다. 내 대답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근위대 몇몇이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놀란 듯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 “……신분, 확인되었습니다.” ​ 나는 카타스트로피를 받아들었다. ​ 그러나 그 순간. ​ - 철컥. - 철컥. ​ 근위대들이 몸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는다. ​ “… ?” ​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 홀의 끝에서, 순백의 의복을 입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느린 걸음이지만, 기품이 느껴진다. ​ “오랜만입니다. 천여울 성녀. 테르나의 축복이 함께하길.” ​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이유 모를 경건함이 느껴진다. 천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추되, 우아하다. ​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성하.” ​ 교황은 살짝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부디 원하는 것을 얻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 그러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이분이, 함께하신다는 정해인 님이시겠지요.” ​ 나는 몸을 숙여 인사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 교황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소문보다 더 단단하신 분 같습니다. 대장장이의 신이 그대를 선택한 까닭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됩니다. 기개가, 남다르십니다.” ​ 교황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맺었다. ​ “과찬이십니다.” ​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천여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 “두 분 모두, 먼 여정을 마치고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은 미리 정돈해 두었으며, 불편함 없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황의 뒤에 서 있던 수녀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 “준비해둔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남은 일정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신 후에 시작하셔도 무방합니다.” ​ “네.” ​ 천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숙소? ​ 뭔가 싸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나와 천여울은 잠자코 수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는, 예상한 관광객 숙소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 내부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이 나온다. ​ “와….” ​ 고급스러운 대리석과 고풍스러운 가구들. 창문으로 눈을 돌리자,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그러나, 그 가운데. 붉은 커튼과 하얀 시트로 장식된 침대가 있다. “…….” ​ 문제는, 방도 하나. ​ 그리고, 침대도 하나였다. ​ 나는 즉시 옆의 수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혹시, 침대 말인데요. 간이침대라도 괜찮습니다. 추가해주실 수 있을까요?” ​ 그 말에 수녀는 흠칫, 미세하게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천여울을 한 번 바라보았다. ​ 그녀는 이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만… 현재 교단 내에 예비 침대는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다른 형태의 침실과 숙소는 준비되어 있지 않으며….” ​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스쳤다. ​ “…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 “아침인데요?” 일어난지 2시간도 안됐다. ​ 내가 덧붙이자, 수녀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되돌아보지는 않았다. ​ 문이 찰칵하고 닫히는 소리. 그제야 방 안이 고요해졌다. ​ 이 고급스러운 공간에는, 오직 우리 둘뿐이었다. ​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천여울이었다. ​ “무슨 문제 있어?” ​ 천여울이 묻는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자연스럽게. ​ 그러고 침대로 향하더니, 털썩 주저앉는다. 스윽. 그녀의 손끝이, 새하얀 시트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사소한 손길 하나에, 방 안의 공기가 묘해지는 기분이었다. ​ “푹신하다~” ​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상체를 살짝 젖혀 기대며 중얼거린다. ​ 그때, 천여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 “와서, 앉아볼래?” ​ 손으로 침대를 툭, 두 번 두드린다. ​ 나는 그녀의 시선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순간, 천여울은 스스로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아, 아니다.” ​ 숨을 한 번 들이마신다. ​ “아침이니까.” ​ 그녀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 햇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췄다. ​ “아직은… 봐줄게?” ​ 그 모습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