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철은 질문에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 "강해야죠." ​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옮겨졌다. ​ "강해야 합니다." ​ 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질문을 던졌던 여학생은 그 대답에 납득이 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짧은 10분의 휴식이 지나고, 수업은 다시 이어졌다. ​ "아… 이론 너무 어려워…." ​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쉬는 시간을 틈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긴 천여울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로 고개를 길게 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 ‘내가 디자인하긴 했지만….’ ​ 참 비현실적인 몸매다. 그녀의 신체 굴곡을 은은하게 강조하는 자세는 의도적인 듯 아닌 듯 묘하게 신경 쓰이게 했다. ​ "우리 땡땡이나 칠…." ​ 그녀의 농담이 끝나기도 전에, ​ -따악! ​ "응흣!" ​ 아주 뻔뻔한 태도가 괘씸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딱밤을 한 대 갈겼다. ​ 천여울은 움찔하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오르더니 열기가 감돌고, 얇은 숨결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 “흐으읏….” ​ 그녀의 눈빛에는 묘한 반짝임이 담겨 있었다. ​ '좀 아팠나…?' ​ 나는 살짝 미안해지며 그녀를 쳐다봤지만, 마음을 다잡고 타박했다. ​ "대체 왜 그랬던 거야?" ​ 덕분에 고질병이었던 낮은 유지력이 사라지긴 했다. 그러나 그걸 노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테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 귀한 영약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먹였을까. ​ 내 말에 천여울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데?” ​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마치 기도를 올리듯 중얼거렸다. ​ “아… 자애로운 여신님, 우리를 굽어살피시고….” ​ “….” ​ 모시는 여신 탓. 아주 만능 변명이다. ​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 천여울은 애초에 통제 가능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냥 순간의 변덕으로 발생한 사고로 넘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내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으니, 마냥 뭐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 "… 그래도 조율하느라 공 많이 들었겠더라. 그건 고마워." ​ 내 감사 인사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 평소와는 조금 다른, 순수해 보이는 미소였다. ​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 ​ “뭐.” ​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부끄럼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방금 딱밤… 한 번만 더….” ​ 말이 끝나기도 전에, ​ “거기 떠드는 분들?” ​ 강의실의 묵직한 목소리가 우리를 향했다. 고개를 돌리자, 단상 위의 박광철이 우리를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 “성녀님은 됐고, 잘생긴 남학생. 나오세요.” ​ 박광철은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나를 지목했다. 강의실 전체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쏠렸다. ​ 아무래도, 정신없이 떠드느라 좀 시끄러웠던 듯했다. ​ 천여울은 내가 나가기 쉽게 길을 터주며 모른 척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 결국 주섬주섬 단상 앞으로 나갔다. ​ “자, 우리 남학생분 이름이 뭐죠?” ​ “정해인입니다.” ​ “정해인… 오늘 저는 교수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F로 처리하겠습니다.” ​ 이 미친 양반이? ​ “예?” ​ “다만 이 문제를 푼다면, 모든 수업을 이해한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 그리고 그는 칠판에 적혀있는 문제를 내게 제시했다. ​ “풀어보세요.” ​ 뒤편에서 학생들의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키득거리는 소리. 다들 내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한숨을 삼키며 문제를 살펴봤다. ​ -조화의 편린이 품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현실 공간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의 임계 변환율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고, 그 한계 조건을 제시하시오. ​ ‘아 씨발.’ ​ 그들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워낙 중요한 설정이기에 알긴 아는데, 수학적으로 정의할 정도는 아니다. ​ 조화의 편린은, 시스템이 남긴 권능의 일종이며, 유산이다. 쉽게 말해, 이 세계의 개념을 초월한 고차원의 힘이다. ​ 현재까지 편린은 전 세계에서 총 두 개가 발견되었다. 미국에 하나, 중국에 하나. ​ 실제로는 총 4개가 존재하며, 이는 주인공, 그리고 세 명의 히로인에게 돌아갈 몫이었다. 습득한다고 마구 강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마나와 공격에 고차원적 속성이 하나 더해지는 것이다. ​ 이는 기본적으로 악마(惡魔)와의 전투에 특화된 속성이며. 고 위계의 악마나 마인 같은 존재들은 이 힘을 통해서만 실질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 그 외의 방법은 거의 없다. ​ 굳이 있다면 정말 상상 이상인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나 마나를 퍼부어 공격하는 비효율적인 방식 정도일까? ​ ‘근데 그런 방식을 쓰는 사람은….’ ​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 지금껏 편린의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전부 실패했다. ​ 그 이유는 명확하다. 편린은,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그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성시우가 주인공인 이유도, 바로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근데 이거 대충 풀리긴 했나 보네.’ ​ 나는 문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내가 저걸 식으로 풀어낼 수는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도출해내기 시작했다. ​ ‘현실 공간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추출이라 하고, 한계 조건을 시스템의 선택이라 가정하면….’ ​ 나는 칠판에 천천히 몇 가지 요소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조화의 편린은 본질적으로 고차원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 내 목소리가 강의실을 채웠다. ​ 나는 적어 내려간 설명과 도식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 분필 소리가 칠판을 가로질렀다. ​ 그러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분필을 내려놓았다. ​ “… 그래서, 결국 적합한 그릇의 존재 없이는 추출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한계 조건으로 작용….” ​ 말을 끝맺으며 뒤를 돌아봤다. ​ ‘분위기 왜 이래?’ ​ 강의실은 고요했다. 나를 비웃던 학생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칠판에 적힌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박광철을 바라봤다. ​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끅끅대는 소리가 들렸다. 참고 있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 “큽… 네… 간신히 F는 면하겠네요, 교수님, 그렇죠…?” ​ 나는 고개를 돌려 교수를 바라봤다. 교수는 안경을 들어 올린 채, 내가 공식을 정리한 칠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 그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정해인 학생.” ​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 “수업 끝나면 연구실로 찾아오세요.” ​ 그 말을 끝으로, 교수는 강의실을 나갔다. ​ “아하하하하하!!” ​ 그리고 박광철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 ​ *** ​ ​ ​ 6시간이다. ​ 장장 6시간 동안. ​ 교수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론을 푼 방식, 그리고 그 연역 과정에 관해 설명해야만 했다. ​ ‘박광철, 이 미친….’ ​ 난 당연히 어느 정도 풀린 문제였으리라 생각했다. ​ 최근 뱅퀴셔 내부에서도 이 주제는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하나도 증명되지 않은 상태였을 줄은 몰랐다. ​ ‘정해인 학생의 연역 과정이 적합한지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만….’ ​ 교수님은 자료를 훑으며 잠시 말을 멈췄었다. ​ ‘흥미로운 건, 실제로 미국에서 연구 중인 초기 단계와 유사한 골조를 보여줬다는 점이에요.’ ​ 교수님은 이것저것 설명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 그러나 결국 결론은 간단했다. ​ ‘혹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없습니까?’ ​ 나는 단칼에 깔끔히 거절하고 나왔다. ​ 60살 가까이 된 교수님의 울적한 표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 ‘내 금요일이….’ ​ 분명 오늘은 간단히 수업을 듣고, 동아리 신청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 그냥 완전히 어그러졌다. ​ 나는 기숙사로 무거운 발걸음을 향했다. ​ 샤워를 끝내고, 물기를 대충 털어낸 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 대충 TV를 배경음악으로 켜두고. 이번 주말에 얻을 기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일단, 내일 오전에 동백검을 받고….’ ​ 뭘 얻으러 가는게 제일 좋을까. ​ 노트를 툭툭 넘기며 물색하다, 나는 귀에 들려오는 경직된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 -속보입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봤다. [상하이와 아프리카 동부에서 마인들의 동시 습격 발생.] [수백 명의 사상자 발생, A급 영웅 링 차오 포함.] ​ 화면에는 폐허가 된 도시와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비쳤다. 현장에서 울부짖는 사람들, 아수라장이 된 거리,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마인의 실루엣. ​ 내게는 익숙한 그림이었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화면을 바라봤다. ​ ‘시작됐다.’ ​ 마인은 지금껏, 활동은 하긴 했지만 저렇게 전면적으로 습격을 펼치지는 않았다. ​ 마인의 동시다발적인 습격. ​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 그리고 그 신호는, 내가 슬슬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 나는 테이블에 있는 노트를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펜으로 주말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적기 시작했다. ​ ‘동백검 수령.’ ​ 일단 이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 검을 손에 넣으면, 그 다음은…. ​ 나는 펜을 멈추고, 잠시 고민했다. ​ ‘편린.’ ​ 지금까지 발견된 편린은 총 두 개. ​ 하나는 미국, 다른 하나는 중국. ​ 그리고 나머지 두 개 중 하나는, 대한민국에 있다. ​ “백두산, 천지.” ​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쌌다. 말이 천지지, 대한민국 최강이자 최악의 험지다. ​ 위치와 습득 방법을 알고 있는 나로서도 지금 바로 가기에는…. ​ 다시금 돌린 시선, TV 화면 속, 상하이의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길이 치솟는 도시. 그리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 ​ 그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혀왔다. ​ 나는 펜을 들어 노트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 ‘편린 습득.’ ​ 밑줄을 그으며 힘을 주었다. ​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