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하가 새로운 능력을 각성했다. ​ 이클립스. 개기일식(皆旣日蝕)이다. ​ 나 역시 처음 접하는 능력이었다. ​ 대체 어떤 성향의 능력인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따라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 “손.” “응.” ​ 그녀는 즉시 조용히 손을 맞댔다. 나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단단히 손깍지를 끼워 넣었다. ​ - 꽈악. ​ “한번 써봐.” ​ 말보다 행동이 더 가깝다. 이건 직접 느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 윤채하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 속의 격류가 다시금 몰아친다. 빛도, 어둠도, 규정지을 수 없는 무(無)의 마나. ​ 그녀의 손끝에서 마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내 손을 타고 뼈로 스며든다. ​ ‘이건….’ ​ 익숙하다. ​ 묘하게, 편린과 비슷한 힘이다. 마를 멸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힘. ​ 그런데, 그것과 닮았으면서도, 더 원초적이고 미숙하다. ​ 아직 미완의 힘이다. 지금은 개기일식이라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냥 일식 정도. ​ 하지만, 갈고닦는다면 기대할만하다. ​ “고생했어.” ​ 미래의 그녀와 대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지에 도달한 건 확실해 보였다. 독자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는데 성공했다. ​ “대단하네.” ​ 진심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역시, 진짜 천재는 다르다. ​ 윤채하는 조용히 웃었다. ​ 그때, 불가람이 팔짱을 낀 채 껴들며 재촉했다. ​ “회포는 나중에 둘이서 풀고. 이제, 네가 고를 차례다.” ​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러죠.” ​ 불가람의 공방. 아티팩트를 고르고자 한다면, 완벽한 아티팩트를 고를 수도 있다. ​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 불가람은 분명, ‘무엇이든 하나’ 라고 했다. ​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착실히 지킬 생각이었다. ​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공방의 입구 쪽을 향해 한 손을 천천히 뻗었다. ​ 불가람과 윤채하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때. ​ - 슈우우우웅 ​ 공방의 입구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아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 - 탁. ​ 카타스트로피가 내 손에 착하고 감겼다. 익숙한 무게감이다. ​ 요즘에는 회수도 제법 편해졌다. 그만큼 내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 “…그 도마뱀은 왜.” ​ 불가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카타스트로피의 창끝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 나는 조용히 창을 들어, 그에게 보이며 말했다. ​ “‘무엇이든 하나.’ 그렇게 말씀하셨죠?” ​ “……그랬지.” ​ 불가람의 표정에 미세한 경계심이 스친다. ​ 나는 망설임 없이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 “이 창을, 불가람님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주세요.” ​ 잠시, 공방이 조용해졌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가장 좋아 보였다. 불가람은 대장장이의 신. ​ 카타스트로피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이빨이자, 문명 종결수의 잔재. 지금, 이 순간에도 포효를 삼키고 있는 짐승의 송곳니. ​ 이 신화에 가까운 무기가, 불가람의 손길로 재탄생한다면? ​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등줄기가 찌릿하다. ​ “진심이냐?” ​ “예.” ​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 불가람은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을 돌리자 뚝뚝 울리는 소리. ​ “쯧.” ​ 입술을 비틀더니, 혀를 찼다. ​ 그리고. ​ - 탁. ​ 카타스트로피를, 내 손에서 거칠게 낚아챘다. 창이 그의 손에 닿는 순간, 금속이 짧게 울부짖었다. 불가람은 손바닥으로 창의 몸통을 슥슥 닦으며 중얼거렸다. ​ “오래 걸릴 거다. 워낙 날짐승 같은 놈이니까.” ​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 불가람은 이미 창을 품에 안고, 공방 안쪽 깊숙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간만에, 허리 좀 아프겠구먼.” ​ 장인의 투지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는 카타스트로피를 내 안성맞춤으로 마개조 할 것이다. ​ - 콰직. ​ 무거운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에?” ​ 윤채하가 옆에서 짧은 외마디를 내뱉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를 올려다봤다. ​ “미안, 여기에서 좀 더 있어야겠는데.” ​ 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매우 호재다. ​ 일전에 말했듯이, 이곳은 아르카디아와는 격이 다를 정도의 성지. 마력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공기 중에 성 속성과 화 속성의 마나가 동시에 응축되어 있다. ​ 훈련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나는 주변의 공기를 한 번 들이마셨다. ​ ‘억세다.’ ​ 날 것의 마나가 내 폐를 파고든다. 이런 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훈련이 된다. ​ 말이 안 된다. ​ “윤채하.” ​ “어.” ​ “죽었다 생각해. 당분간.” ​ “어?” ​ 지옥 훈련의 시작이었다. ​ ​ ​ *** ​ ​ ​ ​ - 우르릉 쾅쾅. ​ - 쾅쾅!!!! ​ “또 시작이네.” ​ 또 다시, 공방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폭음. 불가람의 대장간에서 흘러나오는 이 굉음은,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뭐, 그만큼 열심히 하고 계시다는 뜻이겠지. ​ 나는 옆을 돌아봤다. ​ “…….” ​ 그러나 옆의 윤채하는 답이 없었다. ​ “헥…헥….” ​ 윤채하가 몸을 기울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고, 운동복은 땀으로 완전히 들러붙었다. ​ 이미 수없이 반복됐다. 땀이 나면, 주변의 열기에 의해서 다시 바짝 마르고. 또 다시 훈련하고. 무한한 반복이었다. ​ “죽을거가태….” ​ 윤채하가 맥아리없이 중얼거린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 “그래도 실마리는 잡히지?” ​ “아….” ​ 그녀는 손을 들어, 눈가에 덮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나는 조용히 다가가 윤채하의 머릿결을 정리해줬다. 주변의 열기로 인해 금방 마르기 때문에, 미리 정리를 해줘야 했다. ​ 윤채하는 내 손길을 받아들이며 편히 누웠다. ​ ‘고생 많이 하긴 했지.’ ​ 내가 이렇게 아이처럼 극진히 보살피는 이유. ​ 지난 몇일간 우리는 윤채하의 새로운 능력에 매달렸다. ​ 이클립스. 개기일식, 혹은 월식. 말 그대로 해를 삼키는 어둠이다. ​ 권능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세 번째 확장 권능은 허기의 탐구자. 따라서 이클립스는 허기의 탐구자에서 분화된 계열이라 보는 편이 맞았다. 허기의 탐구자에서 자연스레 뻗어나간 가지. 그게 바로 이클립스다. ​ 일식(日食)이 결국 해를 먹는다는 뜻이니, 어울리기도 하고. ​ 그래서일까. ​ 요 며칠 동안의 훈련 결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윤채하의 불꽃은 이제 모든 마나를 먹어 치우는, 탐식(貪食)의 불꽃이 되었다. ​ ‘이대로 성장한다면 ···.’ ​ 그 불길은 점점 거세지며, 마를 멸할 것이다. ​ 나는 그런 윤채하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조심스레 이마를 몇 번, 슥슥 문질러주었다. ​ 윤채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린다. ​ 그러나 평화로운 기운을 즐기던 그때. ​ - 쾅! ​ 갑작스레, 공방 안쪽의 두꺼운 철문이 박살이 나듯 열렸다. ​ 윤채하가 벌컥 눈을 떴고, 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불가람이었다. ​ 한 손에는 어깨 너머로 들린 거대한 무언가. 완전히 검게 탄 창이다. 형상은 낯설지만, 기운은 익숙했다. 그러나 동시에 낯설었다. ​ 창 끝에 달려 있어야 할 날이, 월아가 없다. ​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불가람은 말없이 걸어왔다. ​ 입도 떼지 않은 채, 그냥 결과물을 들고 내게 던졌다. ​ - 턱. ​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창을 붙잡았다. 창끝에 달려있어야 했을 날은 확실히 사라져있었다. ​ 그러나 창이 손에 닿는 순간. ​ ‘… 심장?’ ​ 창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심장처럼, 생명체처럼. 맥박이 전해진다. ​ 창신에 음각된 금빛 비늘의 형상, 그 흐름을 따라 알데바란의 호흡이 내 손끝으로 전해진다. 표면은 더욱 검게 변했지만, 고급스럽게 새겨진 금빛 음각이 꽤나 멋스럽다. ​ 불가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름은 그대로 두었다.” ​ 그때,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 『쇄광의 흑쇄 : 카타스트로피』 ​ “마나를 불어넣어봐라.” ​ 그러자, 창의 끝에 있어야 할 날의 위치에, 마나로 이루어진 날이 솟아 올랐다. ​ “오러 블레이드….” ​ 나는 숨을 삼켰다. 눈에 보이나, 만질 수는 없는 날. ​ 겉보기에는 창이나, 내가 원한다면 월아로도 이용할 수 있다. 카타스트로피는 공방일체의 무기로 변모했다. ​ “네 마나가 허락하는 한, 계속 지속될 거다.” ​ 불가람이 담담하게 말했다. ​ “그게 가능하다면… 더 이상 네 창이 가르지 못할 것은 없겠지.”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미쳤다. 오러 블레이드 뿐만이 아니다. 금색으로 음각된 비늘까지, 창과 내 신체가 일체화 된 것이 느껴진다. 인위적으로 신창합일(神槍合一)의 묘리까지 탑재한 듯 보인다. 상상 이상의 것을 만들어 줬다. 이 정도일 줄은…. 불가람은 마지막으로 혀를 차며 덧붙였다. ​ “내 손에서 만들어진 놈들 중에서는 가장 성격이 더럽다.”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스트로피를 다시 한번 손에 들었다. 창이 내 손과 연동되며, 알데바란의 사념이 속삭여왔다. ​ 『오랜만이군. 이거… 못 본 사이에 몰라보게 바뀌었어.』 ​ 알데바란이 껄껄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살짝 손에 힘을 주었다. ​ 카타스트로피가 맥박 하듯 반응하며 내 팔과 호흡을 맞춰온다. ​ 이건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살아 있다. 그리고 나를 원한다. ​ 그 순간, 공방 안에 깔려있던 마력이 스르르 걷히기 시작했다. ​ - 턱. ​ 불가람이 자신의 대장간 망치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가 땀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 “그래서.” ​ 쉰 목소리. 그러나 그 끝엔 의지가 깃들어 있다. ​ “바로 다음, 네 창이 향할 곳은 어디냐.” ​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다음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 고개를 들어, 곧게 응시한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 “아직입니다.” ​ 바로 무언가를 하기에는 이르다. 다른 동료들의 힘도 끌어올려야 한다. 홀로 무언가를 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 ​ 우선, 가장 먼저라면 천여울. ​ “저 혼자서는 힘들 테니까요.” ​ 불가람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들렸다. ​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공방의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 짙은 열기와 금속의 향. 그리고 천둥처럼 울리는, 마지막 망치질 소리. ​ - 쾅! ​ 그것이 끝이었다. ​ 불가람의 공방은 다시금 고요 속으로 잠겼다. ​ ​ ​ ​ ​ *** ​ ​ ​ ​ 늘 그렇듯, 정해인의 체취가 스며든 침구 속에서 게으르게 뒹굴던 시온. 오늘은 뱅퀴셔의 숙소였기 때문에, 눈치 볼 것도 없었다. ​ 손끝으로 베개 끝자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반쯤 감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때. ​ 눈앞에, 시스템의 알림이 떠올랐다. ​ [불가람(不伽藍)의 공방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들을 맞이한다.] [계승의 불씨. 연대의 증표를 가진 자들에게 찬사를.] ​ “앗!” ​ 정해인이 공방에 들어간 지, 고작 하루.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련이 끝난 듯했다. ​ 게다가 문구로 보아하니, 완벽한 성공. ​ 시온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빠르게 리모컨으로 손을 뻗어 TV를 틀었다. ​ “나온다.” ​ 화면에는, 정해인이 협회 로비를 걷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수많은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사이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그. ​ “히히…?” ​ 그러나, 그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그를 따르는 윤채하가 눈에 보였다. ​ 그림자조차도 밟지 않겠다는 듯이, 적절히 거리를 벌리며 함께 걷는다. ​ 마치… 아내가 남편을 보필하듯. ​ “… 잠깐만.” ​ 그 순간, 시온의 미간이 살짝 떨렸다. 뜨거운 분노와 패배감이 심장을 두들겼다. ​ 그러나 곧, 이상함을 느꼈다. ​ “뭐지…?” ​ 뭔가가 다르다. 단순히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느껴지는 질투가 아니다. ​ 그냥 윤채하가 아니다. 뭔가… 뭔가가 다른…. ​ 시온은 손끝으로 TV 화면을 짚었다. ​ 그제서야, 깨달았다. ​ “··· 마탑주.” ​ 속삭이듯, 시온이 중얼거렸다. ​ 윤채하다. 분명 기억도 정신도 윤채하지만. ​ 윤채하의 인식 너머, 마탑주였던 그녀 자신의 사념이 깃들어 있다. 불순한 의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 그저 조용히, 흔적을 남겨 티를 내는 듯한 느낌. ​ 마치… 누군가가 알아채길 바라는 것처럼. 시온은 높은 확률로, 그 누군가 중 하나가 자신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 - 우우웅. - 우우웅. ​ 그때, 워치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시온은 손목을 확인했다. ​ 단톡방이었다. ​ “…….” ​ 아무래도 변화를 눈치챈 것은, 시온뿐만은 아닌 듯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