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어려웠다. ​ 불길이 사방을 덮치며, 용암이 흐르는 바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하게 출렁거린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열기,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고통. 막아주는 것은 열기에 대한 피해일뿐 감각만큼은 느껴진다. ​ “후우우….” ​ - 쾅! ​ 발밑이 진동했다. 그리고, 지지하던 바닥이 빠르게 무너졌다. ​ 이 땅, 이 지역에 존재하는 모든 의지가 날 불사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히 인지했다. ​ 불가람의 세계는 내 정신세계, 내면에 숨겨진 모든 혼란과 공허, 불안을 거울처럼 비춘다. 감추려 하던 스스로의 결핍과 상처가 그대로 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 정신이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하다면 공략하기 어려우며, 그것들을 이겨내야만 불가람의 앞으로 도달할 수 있다. ​ 그러나 내 정신세계가 어떤지는 나는 알 수가 없었다. ​ “나… 혹시 정신이 개판인가?” ​ 나의 비틀린 심상 위를 걷는 기분. 생각보다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 한 블록 한 블록마다 거대한 용암 거인이 앞길을 막고 있다. 원작 게임 속에서도, 이따위로 난이도가 높았던 적은 없었다. ​ - 쿠우우웅. ​ 용암 거인을 연속적으로 처리하기를 몇분, 이건 아니다 싶었다. ​ ‘이걸 혼자서….’ ​ 도저히 홀로는 돌파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몸을 감쌌다. ​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 이러려고 장비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그 즉시 나침반을 꺼내 들어, 뚜껑을 열었다. ​ [구원의 나침반]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올바른 길을 가리킨다.] ​ 나침반의 바늘 끝에서 솟아오른 빛이, 앞을 가리켰다. 붉은 용암과 화염 사이로 가느다란 활로가 열린다. ​ - 지이이잉. ​ 나는 온몸에 힘을 실었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빛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 - 쾅! ​ 용암 거인이 내 근처에 주먹을 내리친다. 그대로 납작해지는 줄 알았으나,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 불길이 뺨에 스치고, 발아래에서는 용암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나침반의 빛은 신기하리만치 그 모든 위험을 비켜 안전한 길만 이어줬다. ​ 길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 “…….” ​ 진지하게 공방이 끝나면 정신과를 예약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침반의 빛은 거인을 비껴 아주 좁고 위태로운, 그러나 확실하게 안전한 길만을 이어 보여줬다. ​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걷다 보니 시간 감각이 희미해졌다. ​ 얼마나 지났는지. 몇십 시간, 아니 며칠이었는지도 모를 때. 시간이 흐르는 감각마저 모호해졌을 때쯤. ​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 시야가 탁하고 트였다. 정제되지 않은 불길은 더 이상 없다. ​ 순수하고 완벽한 불길만이 뜨겁게 타오른다. 철제 바닥, 거대한 용광로처럼 신적인 위엄이 느껴진다. ​ 어둡고 깊은 대장간의 입구가 그곳에 있었다. ​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 천천히 불꽃 사이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메고, 불길과 쇳물 자국이 여기저기 배인 튼튼한 갑주. 빛나는 주황색 머리칼이 이마를 덮는다. ​ 눈동자는 녹지 않는 금속처럼 뜨겁게 나를 꿰뚫었다. ​ 신의 영역에 도달한 대장장이, 불가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정도….’ ​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압도적 위엄이 느껴진다. ​ 사도? 그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만 생각보다는 훨씬 앳된 얼굴이었다. ​ 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 “저….” ​ 한껏 긴장을 삼키며 입을 뗐을 때…. ​ “바보 같은 놈.” ​ 거친 비난이 나를 향했다. ​ “?” ​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불가람은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내 손에서 창을 가차 없이 뺏어 들었다. "이건 왜 가져온 거야?"​ 염동력을 전개한 불가람이 카타스트로피를 공중에 띄웠다. 유심히 무구를 바라보더니, 픽하고 웃는다. ​ “한낱 미물의 이빨 따위가, 내 신성한 터를 밟을 자격이 있나?” ​ - 쾅! ​ 그리고 창을 던져 바닥에 꽂아버렸다. 딱 봐도 절대 뽑힐 것 같지가 않다. ​ 그는 이번엔 내 손에 들린 나침반까지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들었다. ​ “그리고 누가, 이런 거에 의지하라 했지? 그러려고 만들어둔 길이 아닌 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 차가운 미소와 함께 나침반을 바닥에 던졌다. ​ - 쨍그랑! ​ 쇠붙이가 깨지는 소리가 공방 전체에 쨍하게 울렸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나침반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략 루트 중 하나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내게는 자격이 있었다. 편린마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 조심스럽게 한 발 걸어 나갔다. ​ “제게는 자격이 있습니다. 존재는 미미하오나 품고 있는 힘이….” ​ “누구 맘대로.” ​ 불가람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 “자격을 논하나.” ​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 *** ​ ​ ​ ​ ​ ​ ​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이걸 과연 ‘기억’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잘, 모르겠군. ​ “불가람! 내가 왔다.” ​ 그날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 철없이 고함을 치며 공방 문턱을 넘은 녀석이 있었다. 별 등신 같은 천둥벌거숭이. 그게 불가람의 평가였다. ​ 과정이란 과정은 모두 생략하고, 오로지 자신이 쥔 도구 하나에 의존한 채 이곳에 발을 들였다. ​ “내게는, 편린이 있고. 시련을 완벽히 공략했지. 어서 내게 무구를 넘겨라.” ​ 성시우라는 놈이었다. ​ “허.” ​ 불가람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린 후, 밖으로 쫓아냈다. ​ 저런 놈이 편린을 가졌다니, 이 세상은…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였다. ​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누군가가 돌아왔다. 불가람조차 예상치 못한 낯선 심상 세계가 열렸다. ​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심상 세계, 이런 개 지옥은 난생처음. 무거운 어둠, 지옥의 구렁텅이 같은 내면, 한낱 인간이 이런 고통을 품고 있다는 게, 가능한가? ​ 그 속에서, 인간이 온전할 수 있을까. ​ 대장간 한구석에 앉아 불가람은 조용히 그 입장자를 지켜봤다. 검은색 장포를 두른 채 눈빛은 죽어있지만, 느껴지는 내력은 천외천(天嵬天). ​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 정해인. 그 이름을 가진 사내는, 신체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 돌파한다. 무섭게 돌파했다. 상처가 나도, 피가 터져도, 그저 앞으로만 전진한다. ​ 불가람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죽었어야 했다. ​ 수십 번, 수백 번은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 그런데, 죽지 않는다. ​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최소한의 공포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초월한 듯한 텅 빈 눈빛. ​ 이곳은 불가람의 성지, 그가 지배하는 공간이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놈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 “사망회귀(死亡回歸)라.” ​ 우수한 능력이다만, 이미 사내는 극한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이것 이상으로 발전할 길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은, 없어 보였다. ​ 그런데도 결국, 정해인은 불가람 앞에 도달했다. ​ 약간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이고,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도 보인다. ​ “이유가 뭡니까?” ​ 정해인이 낮게 물었다. ​ “편린이면 자격이 증명된 것이 아닙니까.” ​ 간만에 재밌는 상대다. 대화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그놈은 안 돼. 왜, 너도 알고 있잖아?” ​ 불가람의 한마디에 정해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뜻을 바꾸실 생각은 없습니까?” ​ “없지.” ​ “….” ​ 내력을 끌어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 문답 무용, 신에게, 힘으로 뜻을 관철하려는 인간. 그러니까, 놈은 신에게 도전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하고 있었다. ​ 불가람은 웃었다. 그 기개에,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 “하하하하하!” ​ 정해인은 불가람이 웃는 모습에 살짝 창을 내렸다. ​ “그런데, 너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지.” ​ 불가람은 정해인에게 공방의 문을 열었다. ​ 완벽한 인정이었다. ​ 비록, 그 끝이 파멸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 불가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해인은 결코, 그가 바라는 궁극의 목표에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쯤은. ​ 이기적이지는 않지만, 극도로 독선적이며. 남을 위하지만 결국 남을 위해 홀로 모든 짐을 들어버린다. ​ 연대의 의지도, 타인과의 관계도 언제든 무너질 썩어가는 고목 같았다. ​ 그게 불가람의 평가였다. ​ 그리고, 그 예측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 “안됐군.” ​ 대장간 한복판에서, 세상이 끝났음을 느꼈다. 차가운 아쉬움, 그러나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 그런데, 세상이 뒤집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 시간과 공간, 모든 질서가 한순간에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 불가람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변화였다. ​ 불가람의 공방의 커다란 별이 떠올랐다. 그 별은 천천히 나아가다,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 불가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 뭔가가, 달라졌다. ​ 그리고, 지금. 다시금 공방에 정해인이 방문했다. ​ 이번에는 훨씬 어렸다. 불가람은 본능적으로 미소가 번졌다. ​ 이전과는 다르다. 정해인은 생기를 잃지 않았고, 인간으로서의 가치, 희로애락, 불안, 망설임, 그리고 희망까지 모두 손에 쥔 채 이곳에 들어섰다. 불가람의 눈에는 정해인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보호장치’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 전보다는 연약하지만, 강인하게 타인과의 연대를 유지한 채 이 시험에 임했다. ​ 물론, 심상 세계가 완전히 맑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폐허도 아니다. ​ 이곳은 시험의 공간, 누구든 원하는 바, 돌파한 바가 있다면 스스로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 ​ 정해인의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타인과의 연대. ​ 타인을 부르는 것쯤은, 결코 금기일 수 없다. ​ “허.” ​ 그러나, 정해인은 조용히 나침반을 꺼냈다. 놈은 아직, 혼자서 이겨내려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 그러나 불가람의 눈동자에는 희망이 서려 있었다. ​ 이제 남은 것은, 연대의 의지와 가치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 그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다. ​ 불가람은 단호히 선언했다. ​ “누구 맘대로 자격을 논하나.” ​ 정해인은 당황하며, 서툰 변명을 하려다 멈칫했다. ​ “그….” ​ 절대 혼자서는 돌파할 수 없게 설계된 심상 세계. 놈에게는 분명 최근에 아끼고 키워온 ‘아이’가 있을 터였다. ​ “네가 편린을 품었다 해서,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 불가람의 목소리가 용광로를 가르는 쇠망치처럼 울려 퍼진다. ​ “세대의 불씨는, 네 혼자 지고 가는 것이 아니지.” ​ “이곳은 단신의 강함을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연대와 계승, 희망의 불길을 지키는 자만이 내 공방에 발을 들일 자격을 가진다.” ​ 정해인은 말없이,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불가람을 바라봤다. ​ 불가람은 길을 바꾸기로 했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수도승에게 진정한 길을 제시하려 했다. 새로운 길이 열리며, 정해인이 선택한 그 대상. ​ “네가 키우는 아이, 그 아이를 데려와라.” ​ 정해인은 일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불가람도 잠시 멈칫했다. ​ “불가람님, 그렇지만 전… 아이가 없습니다.” ​ “… 쯧.” ​ 신성한 힘이 공간을 뒤덮었다. ​ 불가람은, 정해인을 추방했다. *** "쿨···." 작은 숨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 불가람 이 미친 양반. 내보낼거면, 곱게 내보낼 것이지. 내가 눈을 뜬 곳은, 다름 아닌 윤채하의 방이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세상 편한 얼굴로 꿀잠을 자고 있었다. ​ ​ ​ ​ ​ ​ 그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하야~ 슬슬 일어나야지~" 나는 두통이 몰려와, 이마를 살짝 눌렀다. '아.' 아무래도, 문제가 조금 생긴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