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부로 강아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자 한다. ​ 아무튼, 강아린은 나의 빛이자 지주였다. 정신적인 부분이든, 금전적인 부분이든. ​ 150억이라는 거금을 이렇게 흔쾌히 내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로서도 쉽지 않은 지출이었을 것…. ​ ‘…….’ ​ 아니다, 많이 쉬운 지출이었을 수도 있겠다. ​ 그래도. ​ “꼭 갚을게.” ​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었다. ​ 그냥 날로 먹을 생각은 없었다.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갚고도 남을 금액이었으니까. 그러나 강아린은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아린이 내 팔을 살짝 꼬집었다. ​ “아니.” ​ 어느새 내 셔츠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 “내가 원해서 한 거야. 그냥… 선물이라 생각해.” ​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강아린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 “그리고… 있잖아. 아까 말한 거.” ​ 살짝 머뭇거리더니. ​ “네가 필요할 때 찾는 사람….” ​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진다. ​ “그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어.” ​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지만, 그 마음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건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이미 강아린이었다. 챙겨준다는 이미지보다는, 알아서 잘하고 역으로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 오히려, ‘더 이상 기대면 안 된다.’ 라는 생각으로 벗어나려고 했었다. ​ 나도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이러다 버릇 나빠지는 거 아닌가.” ​ 강아린이 내 말에 슬쩍 웃으며, 아예 몸을 조금 더 바짝 붙였다. ​ “괜찮아. 허락할게.” ​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 살짝 기대오는 무게와 팔에 닿는 온기가 전해졌다.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 절대 강아린이 몸을 딱 붙여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 ​ ​ ​ ​ ​ ​ ​ *** ​ ​ ​ ​ ​ ​ ​ ​ 하태성은 무거운 분위기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짧게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 “오늘이냐.” ​ “예.” ​ 나는 영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하태성은 내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가더니, 이내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렀다. ​ 탁, 담배 끝이 튀며 희미한 연기가 흩어진다. ​ “낯이 괜찮은 걸 보니, 떨리지는 않나 보군.” ​ 오늘따라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늘 무심한 척해도, 오늘만큼은 안색에서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답했다. ​ “아니요, 긴장은 좀 됩니다.” ​ 적어도 ‘진짜 문 앞’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미지의 세계다. 나로서도 긴장은 될 수밖에 없었다. ​ 물론, 그를 위해서 여러 가지 대비를 해둔 셈이지만. ​ “…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무도 못한….” ​ “성공할 겁니다.” ​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하태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하게 내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렸다. 그 손길에 씁쓸한 담배향이 가볍게 실려 왔다. ​ “다치지 말아라. 손녀 시집가는 건 봐야지.” ​ “시집은 무슨….” ​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지만, 그 속엔 분명한 걱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주의하죠.” ​ 하태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 ​ “…….” ​ 짧고, 묵직한 한마디. 그 말이 유난히 깊게 남았다. ​ 그게 끝이었다. ​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뱅퀴셔의 멤버들이 서 있었다. ​ 최근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고 한다. 푹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맞이하려고 나온 모양이었다. ​ 멤버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 다른 때 같으면 가볍게 인사하고 흩어졌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 “고생 많으셨어요. 다녀올게요.” ​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기다리고 있는다.” ​ 박광철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내 어깨를 한 번 쳤다. ​ 그 말과 함께, 다른 멤버들도 내 어깨를 하나둘씩 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응원이었다. ​ 배려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난, 살짝 웃으며 한 명 한 명 고개를 끄덕였다. ​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시온이었다. 조용히 다가온 시온은 말없이 나를 꼭 안았다. ​ 가벼운 체구지만, 팔에 감기는 무게는 확실했다. ​ 귓가에 닿을 듯한 낮은 목소리. ​ “다치면… 안 돼.” ​ 나도 모르게 시온의 등을 토닥였다. ​ “금방 다녀올게.” ​ 짧은 포옹 뒤, 시온은 미련이 남은 듯 나를 한 번 더 바라봤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 모두의 시선을 등에 지고. ​ 이제는, 불을 넘을 차례였다. ​ ​ ​ *** ​ ​ ​ 협회 로비는 평소보다 적막했다. 오늘은 내 출입을 위해 별도로 동선까지 비워둔 듯했다. ​ “정해인 영웅님! 마지막 점검 준비 부탁드려요!” ​ 나는 협회가 마련해준 대기실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장비를 하나씩 꺼내어 점검했다. ​ [야차(夜叉)의 연옥(燃獄)] ​ 야차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도복은 눈부시게 새하얗다. 팔을 걷어 소매에 손을 끼워 넣자, 도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게 내 몸에 맞춰 수축했다. 옷깃을 고쳐잡으니, 피부와 옷 사이에서 기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그 위에 검은색 장포를 덧댔다. ​ 다음은 내 무기. 알데바란의 송곳니, 카타스트로피. 한 손으로 손잡이를 툭툭 두드려 감각을 익혔다. 등에 단단히 동여맸다. ​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챙긴 아티팩트. ​ [구원의 나침반]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올바른 길을 가리킨다.] ​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 장치가, 손끝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경로를 잃으면, 이 녀석이 마지막 희망이 될 것이다. ​ [마그마 부스터] [주변 열을 흡수해 방어막으로 치환합니다.] 뭐 이런 것도 있긴 한데,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도복이 견디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니까. ​ “끝났습니다.” ​ 나는 협회의 직원에게 말했다. 한 번씩 손으로 눌러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 나는 모든 점검을 마치고, 곧장 협회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 아마 내부에서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에 비해 극도로 빠르게 흐르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치르고 나온다고 해도, 시간은 얼마 흐른 상태가 아니다. ​ 내 등 뒤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입구는 투박한 돌로 된, 소박한 문이었다. 오래된 성의 비밀통로처럼, 중앙에 조그맣게 열쇠 구멍만 뚫려 있었다. ​ “여기 있네.” ​ 나는 협회장에게 열쇠가 담긴 큐브를 받아들였다. ​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길 바라겠네.” ​ 협회장의 짧은 응원이 뒤따랐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손에 큐브를 쥐었다. ​ 그리고 즉시. ​ - 쨍그랑! ​ 마나를 주입해 큐브를 깨트렸다. ​ 유리가 깨지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안에 있던 열쇠가 바닥을 타고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손에 쥔 순간부터 열쇠에서는 미약한 열기가 전해진다. ​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열쇠를 구멍에 천천히 끼웠다. 차가운 금속성의 마찰음이 손끝에 감긴다. 열쇠가 구멍에 들어가자마자, 벽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 - 찰칵. ​ 잠금이 풀리며, 벽면 전체가 서서히 갈라졌다. ​ “큭….” ​ 곧이어, 틈 사이로 미친 듯한 열기와 함께 진홍색의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문 너머의 불길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는 것 같았다. ​ 이마에 땀이 맺힌다. 한 걸음 내딛는 것으로도, 화산에 뛰어드는 느낌이다. ​ 화염과 열기가,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찢어버릴 듯 밀려온다. 한 번 숨을 고르고, 눈을 가늘게 떴다. ​ 도복을 한 번 더 여미고, 등 뒤의 카타스트로피를 다잡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흐른다. ​ ‘견뎌.’ ​ 나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불가람의 공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 ​ ​ ​ ​ *** ​ ​ ​ ​ ​ ​ ​ 그 시각, 아르카디아 교단. ​ 거대한 성당의 돔 아래, 끝없이 펼쳐진 회의장의 긴 원탁. 의견은 갈라지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 늘 그렇듯 성녀파와 용사파는 서로의 신념을 내세우며 설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여울에게 이런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지루하고 현학적인 시간일 뿐이다. ​ 긴장감은 없었다. 창밖에는 아침빛이 들어오고, 여울은 조용히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한쪽 귀로는 목소리를 흘려듣고, 다른 쪽 시선은 몰래 워치 화면을 쳐다보며 시간을 죽였다. ​ ‘언제 연락해 주려나.’ ​ 슬슬 바티칸으로 갈 때가 됐는데. ​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시야 한가운데로 커다란 시스템 알림창이 떠올랐다. ​ [불길이 피를 삼키고, 쇳물이 심장을 두드리는 곳. 불가람(不伽藍)의 공방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을 시험한다.] 화려한 붉은 글씨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 ‘오늘이구나.’ ​ 천여울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해인은 공방에 입장했다. ​ 그는 분명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나올 것이다. ​ “이… 이게 무슨.” ​ “정말인가?” ​ 그러나 교단 내부는 떠들썩해졌다. 성녀 측의 분위기는 평온했지만, 용사 측, 특히 주교인 성영일이 벌떡 일어났다. ​ 그야, 다음 불가람에 도전하는 자는 요한. 이미 내부적으로 그렇게 예상했었으니까. ​ 용사측은 그대로 뒤집어졌다. ​ “이게, 이게 무슨 소리요!” ​ 급히 워치를 들어 부협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뭐…? TV…?” ​ 리모컨을 집어 TV를 켜는 순간, 교단 내의 모든 시선이 스크린에 집중된다. ​ 화면에는 긴급 편성된 협회의 공식 브리핑이 흘러나온다. 협회장이, 묵직한 표정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한다. ​ - 일전 사도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을 불가람의 공방에 새로운 도전자로 임명했으며,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 용사파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 “제기랄!” ​ 성영일은 그대로 워치를 바닥에 던졌다. 방송의 의미는 단순했다. ​ “대체 누구야!” ​ 협회가 공식적으로 다음 세대를 이끌 주역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뜻. 요한의 얼굴 또한 점차 일그러졌다. ​ 곧이어, 협회장의 음성이 다시 스피커를 타고 퍼졌다. ​ - 그 대상은, 일전에 묵귀(黙鬼)로 불리웠으나…. ​ 화면이 전환된다. 백색 도복과 검은색 장포를 입은 소년의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 어두운 귀신이라는 이명을 떨치고, 이제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릴 영웅, 정해인입니다. ​ 순간, 교단 내부는 정적에 휩싸였다. ​ 그 사이, 오직 한 명. ​ 오직 천여울만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행복하게 속삭였다. ​ “잘생겼다아~” ​ 입가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생글한 미소가 번졌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