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 중앙 단상 위로 사회자가 올라오자, 각 방의 불빛이 한꺼번에 작아졌다. ​ 한쪽 쇼파 중앙에는 푸른 빛의 태블릿이 곧바로 켜졌다.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기계 장치였다. ​ - 스윽, 스윽. ​ 방이 어두워지자 강아린은 쇼파 끝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며 살짝씩 내 쪽으로 바짝 붙어오기 시작했다. ​ 나는 태블릿 화면만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 “더 와. 거기서는 잘 안 보이잖아.” ​ 그녀는 시치미를 떼듯, 조금 더 내 쪽으로 몸을 붙였지만…. 아예 어깨를 확 잡아끌어다가 바로 옆에 앉혔다. 어차피 내 쪽으로 와야 태블릿을 조작할 수 있었으니까. 단상도 기둥에 가려 잘 안 보이기도 하고. ​ 강아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태블릿을 괜히 조작하는 척 리모컨을 집었다. 버튼을 하나씩 누르며 화면을 돌린다. ​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 강아린은 내 쪽을 슬쩍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오늘 노리는 게 뭐야?” ​ “방열복.” ​ 강아린이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더니, 작게 웃으며 말했다. ​ “어디 불이라도 끄러 가게?” ​ 장난기가 잔뜩 담긴 말투. ​ “…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아린은 한동안 내 얼굴을 지켜보다가, 곧바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 “사줄게.” ​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아린이 함께 오긴 했으나, 그녀에게 기댈 부분은 입장까지다. 솔직히 입장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경제적인 부분까지 그녀에게 기댈 생각은 없었다. ​ “흐응… 그래?” ​ 강아린은 잠깐 입꼬리를 올리더니, 다시 시선을 사회자 쪽으로 돌렸다. ​ “혹시라도 마음 바꾸면 바로 말해.” ​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든든해지는 말이었다. ​ 사회자가 단상 중앙에 서서 손짓하자 방마다 조명이 순식간에 꺼졌다. 강아린의 기분 좋은 온기만이 내 옆에 느껴졌다. ​ - 탁. ​ 단상 위에 놓인 작은 스포트라이트가 경매품 하나를 밝혔다. ​ [용골 각반] ​ 품격 있는 진열대 위에, 번뜩이는 각반 한 쌍이 올려졌다. 사회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간다. ​ “첫 번째 품목입니다. 고룡의 뼈를 소재로 하고, 고위 마법이 새겨진 각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인이 제작했습니다.” ​ 시작부터 꽤 괜찮다. 옥션이랑은 그 질부터가 달랐다. ​ 설명이 이어지고, 입찰이 시작됐다. ​ - 띡. - 띡. ​ 입찰에 참여한 방에는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 “11억 2천만, 11억 4천만, 11억 6천만….” ​ 그리고 낙찰이 결정되는 순간, 그 방의 조명이 한 번 더 번쩍, 밝아졌다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 뒤이어 다음 품목들이 차례차례 올랐다. ​ [청은의 망토] [세인트 마르코의 브로치] 각 품목이 등장할 때마다 어떤 방은 불이 잠깐 들어왔다가 금세 꺼지기도 했다. ​ 경매가 본격적으로 무르익을수록, 홀의 공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 그러다. ​ [야차(夜叉)의 연옥(燃獄)] 드디어 왔다. 내가 기다리던 물품. ​ 나는 일체지각을 사용해 정보를 확인했다. ​ [지옥불에 잠겨 천 번을 태워도 사라지지 않았던 연화의 도복.] [기본 효과] [초월급 화염 내성] [마나 증폭, 순환] ​ [특수 효과] ​ [절명의 재생] [저주성 마력 동화 및 흡수 가능, 마나로 전환] ​ 야차가 지옥불에 불타오르며 남긴 유산. ​ 화염에 내성이 있음과 동시에, 신체를 녹이는 저주성 화염을 순간적으로 흡수해 마나로 치환까지 해준다. 반드시, 반드시 있어야 한다. ​ 나는 빠르게 입찰 버튼을 누르려 했다. ​ 그러나 순간, 내 손등이 따뜻한 감각에 덮였다. 강아린이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 작은 속삭임을 귓가에 흘렀다. ​ “조금만, 천천히.” ​ 본능적으로 급하게 달려들려 했던 자신을 자각했다. 아무래도 경매 경험이 없다 보니, 서툰 티가 났던 모양이다. ​ - 15억… 15억 1천만원…. ​ 사회자가 천천히 금액을 읊는다. ​ 야차라는 네임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화력은 저조했다. 그야 탐지형 권능을 보유한 게 아닌 이상 완벽한 성능을 파악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 그 덕분에, 낙찰 경쟁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강아린이 다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 “응. 지금부터 살짝씩… 한 번씩… 부드럽게 찔러줘.” ​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조금씩 금액을 올려 입찰했다. 조금 느긋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 “응… 지금 느낌 괜찮아.” ​ - 18억… 19억… 20억…. ​ 점점 입찰 빈도가 줄기 시작했다. ​ “지금, 여기서 세게.”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과감하게 버튼을 눌렀다. ​ - 25억… 25억… 25억… 10초 후 마감됩니다! ​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다른 방들은 조용했다. ​ 이렇게 쉽게, 정말로? ​ - 띡. ​ [낙찰 완료.] ​ 태블릿이 위에 글씨가 떠 올랐다. 그리고 방 안의 불이 꺼졌다. ​ 강아린은 내게 속삭였다. ​ “처음인데 좋았어.” ​ 나는 강아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 “고마워. 덕분이네.” ​ 그녀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 대충, 감을 잡은 느낌이다. 경매 특유의 리듬이 조금씩 몸에 익어가는 듯했다. ​ 경매는 계속 이어졌다. ​ 방열에 대한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스트를 더 살폈다.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고, 워낙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으니까. ​ [마그마 부스터] [주변 열을 흡수해 방어막으로 치환합니다.] 예상보다 싼 값, 5억에 낙찰. 이 정도면 진짜 방열만큼은 확실하게 대비가 됐다. ​ 이제 길을 찾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다. ​ 마땅한 게 없나 싶었으나…. 그때, 사회자가 또 하나의 유물을 들고나왔다. ​ [구원의 나침반]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올바른 길을 가리킨다.] ​ 이름도, 설명도, 지금의 나에게 딱 맞았다. 경쟁도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 이걸로 진짜 모든 준비가 끝났다. ​ 나는 쇼파에 기댄 채, 태블릿에 표시된 낙찰 목록을 천천히 훑었다. 강아린이 슬쩍 내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 “만족해?” ​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응. 이 정도면 완벽해.” ​ 내가 원하는 물건은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경매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 다음 물품. ​ 그때, 사회자가 작은 케이스를 올렸다. ​ [위그드라실의 씨앗] ​ “위그드라실…?” ​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 위그드라실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고목이다. ​ 신성함은 기본이고, 그 씨앗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지금 위그드라실은 작살이 났다는 것. ​ 악신에게 있어서 가장 견제되는 것은 신성한 기운을 가진 랜드마크.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위드그라실이었다. 따라서 과거 악신의 태동과 함께, 즉시 작살을 내놨다. ​ 그런데 그 전신이자 유산이 여기 경매장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스토리상 마인의 손에 있어야 했다. 강아린의 오빠가 마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넘겼어야 했으니까. ​ 필요하다. 격하게 필요하다. ​ 문제는 가격이다. ​ 내가 준비한 총 예산은 100억.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물품은, 그렇게 비싸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이것도 솔직히 말해 넉넉했고, 실제로 70억 가까이 남았다. ​ 그런데 저 씨앗은 다르다. ​ 경매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곳저곳 방의 조명이 한꺼번에 켜졌다. ​ 수많은 경쟁자들이 단번에 반응한 것이다. 강아린이 내 어깨 너머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 “어머… 입찰하는 사람이 좀 많네?” ​ “…….” ​ 가격은 순식간에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 - 50억, 지금부터는 단위가 5천만원입니다. ​ 큰일이다. 진짜 큰일이다. ​ 저 씨앗은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 나는 태블릿의 입찰 버튼을 바라봤다. [60억] [65억] [70억] ​ 멈춰 제발. 머릿속으로 빌었지만, 숫자는 아무런 자비도 없이 올라갔다. ​ 방마다 조명이 번쩍였다가, 순식간에 꺼진다. ​ 사회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 “80억! 85억! 90억….” ​ 내 머릿속에서도 숫자가 연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숫자는 100억을 가뿐히 돌파했다. ​ 무리였다. 나는 태블릿에서 손을 떼며, 허탈하게 웃었다. ​ 그 순간, 내 옆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몸을 바짝 붙였다. 강아린이었다. ​ “무슨 고민 있어?” 강아린이 늘 내게 해왔던 말. ​ 그러나 귓가에 닿는 숨결이 너무 가까웠다. 손끝이 살짝 내 허벅지 위를 스친다. 강아린이 내 귀에 바짝 대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 “음… 이번에도 아마,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 - 120억… 120억… 120억… 10초 후 마감됩니다! ​ 태블릿에 떠오른 금액은 120억, 가치를 생각하자면 여전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 - 톡, 토톡. ​ 강아린은 태블릿에 거침없이 150억을 입력했다. 그리고, 귀에 낮고 느릿하게 속삭였다. ​ “대신 나한테 약속 하나만 해줘.” ​ “약속…?” ​ “뭔가 안 풀리고, 힘든 게 있으면… 꼭 말하는 거야. 도와달라고. 특히, 나한테.” ​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보려 했으나, 강아린은 내 어깨에 턱을 얹고 눈을 가늘게 떴다. ​ 내가 원래 성격이 그렇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굴을 파고 들어가서 고민하는 타입이다. ​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 - 5…! 4…! ​ “그럴게….” ​ 결국 약속해버렸다. ​ - 띠딕. ​ [150억 입찰하셨습니다.] ​ - 150억… 150억… 150억… 10초 후 마감됩니다! ​ 강아린은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얹은 채, 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 “잘했어, 그런데 약속은 꼭 지켜야 해.” ​ [낙찰 완료] 경매가 끝나는 순간, 방 안의 불이 스르륵 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강아린을 바라봤다. ​ “안 지키면….” 희미한 빛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반사된다. ​ “상상에 맡길게.” ​ 목소리에는 섬뜩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 이걸로, 경매는 끝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