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오랜만에 뱅퀴셔의 기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며칠간 묵을 생각이었다. 불가람의 건으로 협회에 왔다 갔다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방학 때 가온의 기숙사 포탈은 학기처럼 모든 시간에 열지 않았으니, 이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 - 끼익. ​ 방문을 열었다. 익숙한 문이 천천히 열린다. ​ 문틈 사이로, 오래된 기억이 스며든다. 여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써온 방이다. 시온과 함께 이불을 깔고 뒹굴며 놀던 곳. ​ 서로 열심히 공부하던 방. ​ 시온과 내가 자라온 방이었다. ​ “청소를 좀 해야겠네….” ​ 학기가 시작되고 전혀 들르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을 터였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그런데…. ​ “……?” ​ 방 안은 기묘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먼지 한 톨 없고. ​ 침대 시트는 빳빳하게 각이 잡혀 있다. 침대 위 머리맡에 놓인 베개는 2개. ​ 마치, 누군가가 어제까지 살던 자리처럼 정리되어 있다. ​ “제 방에는 무슨 일이세요?” ​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네 방?” ​ 웃으며 답했다. ​ 시온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작은 숨소리, 그리고 익숙한 샴푸 향. 체구는 크지 않지만, 방 안에 들어오는 순간 묘하게 공간의 온도가 달라진다. 나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 “이거 네가 한 거야?” ​ “당연하지. 누가 하겠어?” ​ 맞는 말이다. 시온 말고 뱅퀴셔 내부에서 청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 나는 짐을 내려놓으며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 “베개가 둘이네?” ​ “응, 옛날 생각나고 좋지 않아?” ​ 시온은 침대 머리맡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서 웃었다. ​ “그렇긴 하네… 근데 왜 네 방이야.” ​ 되물었다. 여긴 내방이다. 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 “어. 이번 방학 동안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 나는.” ​ 시온은 이번 방학 동안 여기서 보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러면 조금 곤란한데…. ​어쩔 수 없다. 다른 방을 쓸 수밖에. ​ “그럼 내가 다른 방 쓸게.” ​ 시온이 잠깐 날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 “없어.” ​ “어?” ​ “없다고. 어제 언니 오빠들 마지막 공략 끝나고 전부 복귀해서, 남는 방이 하나도 없어.” ​ 시온이 침대 끝을 툭툭 두드리며 쳐다본다. 나도 잠깐 할 말을 잃었다. ​ “진짜?” ​ “진짜.” ​ 시온이 조용히 웃었다. ​ “예전처럼 같이 잘까?” ​ “언제적 얘기를….” ​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그때도 방만 같았지, 침대는 달랐다. ​ 지금 와서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고. ​ 나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 “그냥 바닥에서 잘게.” ​ 시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것도 괜찮네.” ​ 어차피 잠깐이니까. ​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 ​ ​ ​ ​ ​ ​ *** ​ ​ ​ ​ ​ ​ ​ ​ 기지에 짐을 풀고 나는 곧바로 협회에 향했다. 협회 건물은 늘 그렇듯 높게 서 있다. ​ 영감이나 다른 인원은 같이 오지 않았다. 다들 피곤해 보였기도 했고, 누굴 데려올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 토요일 오전. 평일에 비하면 한산한 분위기였다. ​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랐다. ​ - 띵. ​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복도 끝 협회 직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정해인 영웅님이시죠?” ​ “네.” ​ 그대로 간단한 신분 확인과 출입증을 받았다. ​ “협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나는 협회 직원의 안내를 따라 복도 끝 응접실로 향했다. 익숙한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랜만이네. 정해인군.” ​ “네, 안녕하세요.” ​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협회장과는 저번 파티에서 안면을 텄다. 강아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 원래는 학기 중에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일정을 조정했다. 방학 이후로 미뤄달라고. ​ “오늘은 불가람님의 공방 입장에 앞서…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해서 불렀네.”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형식적인 절차이다 보니 너무 섭섭하게는 생각하지는 말길 바라네. 우리는 무조건 해인 군의 편의를 맞춰서 진행하려고 하니…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줬으면 하는군.” ​ “아닙니다.” ​ 협회장은 내 앞에 서류 몇 장을 조용히 펼쳐 보였다. ​ 파일에 담긴 내용은 단순했다. 불가람의 공방은 입장 즉시 모든 영웅의 시스템에 알림이 전송된다. ​ [불길이 피를 삼키고, 쇳물이 심장을 두드리는 곳. 불가람(不伽藍)의 공방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을 시험한다.] 그리고 협회는 그 대상을 공개한다. 그 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 “결과와 상관없이, 협회는 앞으로 해인 군을 공식적으로 밀어줄 생각이네. 단순한 유망주가 아니라, 협회가 책임지고 내세울 인재로 말이야.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임하면 좋겠네.” ​ 나로서 거절할 이유는 없는 제안이었다. 협회가 밀어준다는 뜻은 모든 일에서 내 편의를 봐준다는 뜻이랑 다름이 없었으니까. ​ “감사합니다.” ​ 나는 조용히 답했다. 협회장은 다음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 그리고 다음은 앞선 공방의 공략에 관한 건이었다. ​ “지금껏 공방에 도전했던 영웅들의 기록일세.” ​ 그는 내게 빳빳하게 펼쳐진 서류를 보여줬다. 나는 그 기록을 천천히 살폈다. ​ 소감은··· 처참했다. 성공한 것은 지금껏 딱 한 번뿐. 그리고 그 한 번마저, 성공했다 보기에는 어려웠다. 불가람이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준 느낌. ​ - 뜨겁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1953.4.19) ​ - 뜨거운 것을 견뎠으나… 길을 잃고 도달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1978.11.19) ​ -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나는 자격이 없었다. (2009.9.25) ​ 마지막은 20년 전, 전대 용사가 남긴 글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한 번도 공방에 들어가 본 이가 없었다. ​ 성공한 이도, 마찬가지다. ​ 협회장은 서류를 천천히 덮으며, 짧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 “두려워할 필요는 없네. 어떤 결과든, 이번 도전이 해인 군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테니. 여기 적혀있는 모든 영웅들은 경험을 통해 한단계 강해졌으니까.” ​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공방 입장은 다음 주 금요일이다. ​ ‘실패할 생각?’ ​ 추호도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한다. ​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나는 자격이 없었다.’ ​ 전대 용사가 남긴 마지막 글을 읽었다. ​ ‘자격.’ ​ 나에게는 있었다. ​ ​ ​ ​ ​ ​ *** ​ ​ ​ ​ ​ ​ 협회에서 보여준 공방의 기록에는 한 가지가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 ‘뜨겁다.’ ​ 우선 공방의 내부는 뜨겁다. 지옥불, 용암, 아니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작열감이 내부를 채우고 있다 했다. ​ 단순히 고온이라 보기에는 어렵겠지만… 방열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야 한다. ​ [RIN]: 그때 그 옷 꼭 입고 와! 마침 감사하게도 강아린이 부탁했던 건을 처리하여 내게 메세지를 보냈다. 오늘 밤, 경매가 시작된다고 한다. ​ 강아린이 지정한 옷은 일전 파티를 위해 맞췄던 양복이었다. 나는 옷을 차려입었다. ​ “… 뭘 그렇게 봐.” “….” ​ 준비를 마치고 돌아보니,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시온이 의자에 거꾸로 걸터앉아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변하지 않는 버릇이다. ​ “다녀올게.” ​ 가볍게 인사한 뒤, 기지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이미 정차해 있던 고급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 번쩍이는 블랙 세단. 뒤쪽 문이 가까이 다가가자 자동으로 열렸다. ​ “왔어?” ​ 차 안에는 강아린이 먼저 타고 있었다. 익숙한 미소와 함께 나를 맞이한다. ​ 차는 곧장 출발했다. 경매장이 위치한 곳은 서울 한복판, 하지만 평범한 장소는 아니다. ​ 평범해 보이는 오피스 건물의 지하 . 영웅 옥션의 경매장, 아카이브가 열리는 곳이다. ​ 철저하게 회원제로 이용되는 비밀 경매장. ​ 밖에서는 누가 들어가고 나가는지조차 쉽게 알 수 없는 구조다. 창문도 없는 어둑한 통로를 따라, 나와 강아린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 엘리베이터에는 여러 층이 있었다. ​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각각 동색, 은색, 금색, 검은색의 층이었다. ​ 강아린은 검은색 카드를 꺼내더니, 그대로 단말기에 갖다 댔다. ​ - 띡. ​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지하 4층, 검은색 구역까지 내려갔다. ​ 문이 열리자, 차분한 조명이 깔린 복도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무런 소음도 없다. 눈앞에는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은 직원이 서 있다. 그는 동물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있었다. ​ “아카이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블랙 티켓이 확인되었습니다.” ​ 직원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 “준비해둔 룸으로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우리를 데리고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직원은 은색 쟁반을 건넸다. 그 위에는 두 개의 가면이 놓여 있었다. 한쪽은 흰 여우 가면, 다른 한쪽은 검은 늑대 가면이다. ​ “경매장 내에서는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반드시 가면을 착용해 주셔야 합니다. 오늘 룸은 2번, 알렉산더입니다. 이용에 불편함 없으시길 바랍니다.” ​ 나는 검은 늑대 가면을, 강아린은 아무 망설임 없이 여우 가면을 집어 들었다. ​ “귀엽네.” ​ 강아린이 가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직원은 우리를 안내하며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즐거운 경매가 되시길 바랍니다.” ​ 우린 방으로 들어서 앉았다. ​ 방 안은 미묘하게 어두웠다.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투명하지 않은 검은색 유리 덕에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밀폐감과 동시에 묘한 기운이 방 안을 감쌌다. ​ 이런 곳은 역시 익숙지가 않았다. ​ 나는 가면을 손에 들고 주저했다. ​ “이거 굳이 써야돼?” ​ 강아린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여우 가면을 손에 쥔 채, 통유리 앞으로 걸어갔다. ​ “써야 될 걸?” ​ 강아린이 가면을 들어 올리자, 그 순간 방 전체를 감싸던 검은 유리가 서서히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 - 슈우우우욱. ​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형 구조였다.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단상이 세워져 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층마다, 수많은 창문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 맨 아래, 우리와 같은 위치의 방들이 원을 따라 늘어서 있고, 그 위로는 금빛, 그리고 그보다 한층 더 위에는 은빛, 가장 높은 곳에는 짙은 갈색빛이 도는 방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그 불빛 사이로, 모두 가면을 쓴 채 창 너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 나는 천천히, 가면을 얼굴에 걸쳤다. ​ 유리 너머에서 번지는 수십 개의 눈빛, 그 속에서 욕망과 야망이 교차한다. 죄다 가면으로 그 욕망을 감추고 있다. ​ “어때?” ​ 강아린이 웃으며 내게 물어왔다. “다들 욕심 많아 보이지?” 그래보이긴 했다. ​ 그래도. ​딱히 뺏길 생각은 없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