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한 학기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학기 때 뵙죠.” ​ 도한성 교관의 목소리가 끝나자, 학생들은 일제히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 이제 공식적으로, 학기는 끝났다. 끝났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긴 했다. ​ 나야 어차피 기숙사를 전전할 것이고. 나머지는… 뭐 알아서 집에 가든 할 것이고. ​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 선 윤채하와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방학 때 어디 있을 거야? 가온? 마탑? 아니면 집?” ​ 윤채하는 원래였다면 마탑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여러 마법을 익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탑을 진로로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를 가능성이 높다. ​ 윤채하는 내 질문에 한참 시선을 맞추다가, 슬쩍 고개를 갸웃한다. ​ “너는?” ​ 예상치 못한 역질문.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 “나는 기숙사.” ​ 윤채하는 즉시 입을 뗐다. ​ “어, 나도.” ​ 음, 뭐지. 뭔가 느낌이…. ​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말을 바꿨다. ​ “아, 사실 뱅퀴셔로 돌아갈 수도 있어. 방이 생길 수도 있어서.”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채하가 순간 움찔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고, 그녀가 다시 말한다. ​ “아… 나도 사실 집에서 지낼 수도…?” ​ 말끝이 묘하게 늘어진다. ​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꼬는 모습.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이내 시선을 피한다. ​ 윤채하의 집은 뱅퀴셔 본부와 가까웠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집안은 부자였으니까. ​ “…….” ​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 이걸로 확실해졌다. 윤채하는 나를 따라오려고 한다. 아무래도, 흥미를 주는 대상으로 날 완전히 점찍은 모양이었다. ​ 얘가 원래 이렇게 대책 없는 애가 아닌데. ​ 윤채하는 내가 빤히 쳐다보자, 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 “으휴.” ​ 나는 어이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 ​ *** ​ ​ ​ ​ ​ 윤채하와 천여울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둘은 먼저 떠났다. 천여울은 교단에 볼일이 있다 했고, 윤채하는 그냥 낮잠. ​ 나는 굳이 기숙사로 복귀하지 않고, 카페 한구석에서 노트북을 두드렸다. 며칠 전에 카페에서 했는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집중도 잘 되고. ​ 칙칙한 기숙사보다는 여기가 낫겠다 싶었다. ​ - 타닥타닥. ​ “음….” ​ 커피 한 모금과 함께, 나는 다시 마우스 클릭에 열중했다.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르다. ​ - 타다닥타다닥. ​ 나는 간만에 영웅 옥션을 둘러보고 있었다. ​ 첫 번째 이유, 일단 돈이 너무 많아졌다. ​ 나는 잠깐 워치 화면을 켜, 내 잔고를 확인했다. ​ “… 와우.” ​ 그대로 꺼버렸다. 영광에서 지급되는 배당금, 협회에서 지급한 보상금. 가온에서 지급한 여러 부상들까지.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니 그냥 부자가 되어있었다. ​ 그 돈을 어쩌면 좋을지, 오늘은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불가람의 공방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있기도 했고. ​ 그런데 문제는. ​ [엑스칼리버 (replica)] [디오니소스의 잔 (replica)] ​ 검색 결과가 대부분 이렇다. ​ 눈길이 가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레플리카. 그러니까 복제품 딱지가 붙어 있었다. 물론 이것도 시세로 보면 상당히 비싸고 상급의 장비지만, 내 성에 차지는 않았다. ​ [제형 검] [천둥 도끼] ​ 조금 더 스크롤을 내려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장인이 만든 물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절한 공장제 장비들. 그냥 전체적으로… 좀 아쉬운 느낌. ​ 옛날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분명 서핑을 하다 보면 하나는 나왔다. 하나 정도는. 구경만 해도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즘 따라 좋은 물건이 나오면 닥치는 대로 사라지고 있다. ​ 예를 들어 이런 것. ​ [정의 반지] [판매 완료] ​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모로 남자에게 좋은 반지다. 말하기 민망한 효능도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마나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는 반지. 그런데 10분 만에 팔렸다. ​ 이렇게 팔린 물품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 “고룡의 밧줄… 무왕의 허리띠… 시무룩한 개구리 석상…?” ​ 마지막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좀 좋아 보이는 물품들은 즉시 팔린다. ​ 그렇게 팔린 목록들을 보다 보니 번쩍 드는 생각. ​ 잠깐만… 설마 콜렉터? ​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희귀한 진품만 닥치는 대로 쓸어 담는, 옥션의 악명 높은 콜렉터. 이놈이 다 쓸어갔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이 시점의 콜렉터에게는 자금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 대체 누구지 그럼. ​ “어휴.” ​ 결론적으로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많지만, 정작 돈을 써서 얻을 만한 물건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그때였다. ​ “무슨 고민 있어?” ​ 눈앞으로 커피잔이 살짝 미끄러지듯 떠밀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봤다. ​ 사실 오늘 카페는 혼자가 아니었다. ​ 밥을 먹고 카페에 왔는데 그대로 마주쳤다. 급한 업무가 있어서 카페에서 정리하려고 왔다 한다. ​ ‘얘도 참 바쁘네.’ ​ 그래서 어쩌다 보니 강아린도 함께다. ​ 뭔가 평소보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회사 일이 잘 처리되기를 바란다. ​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 ​ 나는 모니터 화면을 슬쩍 돌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 근데 잠깐만. ​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 거지? 내 앞에 앉아있는 강아린은 대한민국 최고 재벌이자 길드의 차세대 총수(예정)다. ​ 영웅 옥션에서 거래할 수 없는 물품들은 일명, 경매장에서 거래되고는 한다. 경매장의 참가하는 티켓 자체는 옥션에서 팔지만,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다. ​ 보통 길드의 유력가들이나 인맥이 있는 사람만 갈 수 있어서 나는 아직 갈 수가 없었다. ​ 영감은 워낙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 스타일이니 전혀 갈 일이 없었고. ​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굉장한 관심이 있다. 장비딸이니 뭐니,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니까. ​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린아.” ​ “응.” ​ 무심하게 대답한다. 확실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 나는 망설이다가, 노트북을 돌려 옥션 사이트 하단의 검은 배너를 가리켰다. ​ [아카이브 (ARCHIVE)] ​ 옥션이 직접 관리하는 최상위 등급의 경매장. ​ “나, 여기… 한 번 데려가 줄 수 있어?” ​ 나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때, 강아린의 눈이 번쩍 빛났다. ​ “어 당연…!” ​ 활짝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갑자기 표정이 다시 싹 굳어버린다. ​ “… 음, 근데 조금 힘들 수도?” ​ 아, 역시 조금 어렵나. ​ 아무래도 아직 학생인 나를 데려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 강아린에게 민폐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아, 그럼 괜찮아. 말해줘서 고마워.”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순간, 강아린이 식겁한 듯 자리에서 들썩였다. ​ “아니, 아니?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잖아. 될 수도 있어.” ​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괜히 민폐 끼치는 거 같아서 좀 그러네, 괜찮아.” ​ 그러자 강아린이 평소답지 않게 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 “무조건 갈 수 있어 무조건. 으으응ㅡ 그냥 해 본 말이었어어.” ​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길게 늘인다. 얼굴도 귀 끝까지 빨개져 있다. ​ 정말 괜찮은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작게 한마디 덧붙였다. ​ “…정말 괜찮으면, 부탁 좀 할게.” ​ 그러자 강아린이 눈을 흘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응 맡겨둬.” ​ 짧게 대답하고는, 괜히 컵을 들어 입술을 적신다. 그러면서도 슬쩍 내 쪽을 힐끗 바라보는 눈동자. ​ 그때, 강아린이 작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 “그럼… 조만간 연락할게, 준비해 둬.” ​ “어.” ​ 나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 ​ ​ ​ 정해인이 나갔다. 볼일을 다 봤는지 기숙사로 향했다. ​ “튕기다가 큰일 날 뻔했네.” ​ 강아린은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아쉬운 마음에 괜히 한 번 해본건데··· 앞으로 이런 위험한 밀당은 절대 없다. 그녀의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 방학 동안 재수 없게도 펜타곤에서 편린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러면 완전 나가리였다. 정해인은 절대 무리하지 않을 테니까. ​ 맘 같아서는 펜타곤을 작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 “으흐흥~” ​ 보람이 있네. ​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노트북을 바라봤다. 사실, 경매장에서 닥치는 대로 물품을 사들이는 건 다름 아닌 강아린 자신이었다. ​ 일단 정해인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사들이고 있었다. 언젠가 꼭 내 손으로 쥐여주고 싶었으니까. ​ 문제는 요즘 들어 그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입찰 경쟁이 극도로 심화됐다. ​ ‘둘, 아니, 셋 정도 되는 것 같은데….’ ​ 지속해서 경매장의 동향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대책 없이 물품을 구매하려는 건지 정체라도 알고 싶었고, 결국 그녀는 옥션에 스파이 코드를 심었다. ​ [시무룩한 개구리 석상] ​ [획득처: 일본 홋카이도] ​ [판매자 설명: 개구리 석상입니다. 소유자에게 행운을 불러오는 효능이 있다는 검증을 받았습니다. 모든 분야에 해당합니다.] ​ [판매가: 100,000,000 KRW] ​ [구매 확정가: 260,000,000 KRW] ​ 판매가보다 훨씬 높게 책정된 확정가. 입찰만 수십 번, 경쟁이 치열했다. ​ 행운이 깡으로 증가한다. 이건 꽤나 귀한 물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입찰자를 추적하기 위해 이 물건을 직접 옥션에 풀었다. ​ 다만 함정이 있다면, 효능이 기간제라는 점. ​ “큭.” ​ 이번 경매에 참여한 인원은 정확히 셋. 그자들은 기간제 상품을 사기 위해 경쟁을 한 셈이다. ​ 강아린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명단을 클릭했다. ​ “이름이나 한번 보자~” ​ 대체 누구일까. ​ 궁금함에 명단을 펼쳐보던 그녀는, 다음 순간 미묘하게 입꼬리가 흔들렸다.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1000_y] ​ [OnE] ​ [시온] ​ “… 하.” ​ 그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 강아린은 잠시 노트북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장 워치를 들었다. ​ - 토독토독. ​ [RIN]: (사진) [RIN]: 2억 5천만원 잘 쓸게~ ​ 이름이 적힌 경매 명단 캡처본을 단톡방에 툭하고 보냈다. ​ “아하하!” ​ 그리고,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며 워치를 닫았다. ​ 누군지 알 것만 같은 [OnE] 님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