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보다 하늘이 가까운 의문의 고층 빌딩 최고층. ​ 고급스러운 방 안, 원탁에는 네 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이 그녀들의 개성을 강조하며 방 안을 압도했다. 하나같이 경국지색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얼굴들. “그래서.” ​ 하늘빛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성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됐다는 거야?” ​ 그녀는 다리를 우아하게 꼬며 팔짱을 낀 채 다른 여성들을 훑어봤다. ​ 그 말에 반응한 건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땋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손목을 슬쩍 들어 올려, 차고 있는 흑요석 팔찌를 바라봤다. ​ 팔찌에서 깜빡이던 불빛이 이내 꺼지자, 하시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지금 막 끝난 것 같네. 완벽해.” ​ “다행이네. 이걸로 전투 스타일은 바뀌겠어.” ​ 하늘빛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는 그를 완벽히 존중했지만, 더 나은 방법이 생긴다면 그쪽으로 미련 없이 갈 것을 믿고 있었다. ​ “당연하지, 누가 조율했는데.” ​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은은한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여성이 입을 열었다. ​ 그녀의 손끝은 아까부터 책상 위에 올려진 십자가를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품이라기엔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 마치 ‘이것 좀 보라’는 듯, 그녀는 십자가를 마구 어루만졌다. ​ “자랑하니?” ​ 하늘빛 머리칼의 여성이 미소를 띠며 묻자, 단발머리의 여성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하지?” ​ 단발머리의 여성은 가볍게 웃으며 책상 위 십자가를 손끝으로 더 밀어 보였다.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 “해인이 교단에다가 내 이름으로 공식 증서를 발급했더라. ‘소유주’라고 딱 명시해 놨지 뭐야.” ​ 그녀는 십자가를 들어 올려 은은히 빛나는 표면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 “덕분에 교단 늙다리들,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지.” ​ 그러면서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윤곽을 쓸어내렸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 “진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 말끝이 흐르며 그녀의 표정에 황홀함이 물들었다. ​ “좀 닥쳐 볼래?” ​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검은색 머리를 뒤로 묶고 진홍빛 눈동자를 빛내는 여성이 냉랭하게 말했다. ​ “제발 생산적인 얘기 좀 하자. 성수 공급 체결 아직 멀었어?” ​ 그 말에 단발머리의 여성이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 “아직 그쪽은 늙다리들 구역이라 좀 어렵네? ​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십자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근데, 그것도 곧이긴 해.” ​ “좋아.” ​ 검은 머리의 여성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그이, 정말로 강유성 죽어서 주가 떨어지니까 바로 매수하네.” ​ 유하나가 조용히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순수한 놀라움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 “정해인이잖아.” ​ 강아린이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그를 향한 순수한 신뢰가 묻어 있었다. ​ “강유성 그 새끼 죽인 다음에 몽땅 마인한테 덮어씌우고.” ​ 그녀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주가 올려서 해인이 수고도 줄이고, 돈도 벌어. 얼마나 좋아?” ​ 그녀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다른 여성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적잖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그러니까.” ​ 강아린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 “기억나는 거 있으면 전부 말해.” ​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우리가 아무리 해도, 진 빚 다 못 갚는 거 알잖아?” ​ 짧은 말이었지만,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그녀의 말은 여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 ​ ​ ​ “와, 또?” ​ [‘영광’ 아르카디아와 성수 독점 공급 체결.] ​ 요즘따라 두 단체간의 교류가 활발하다. 강유성이 빨리 죽은 게 신의 한 수였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만들어진 스노우 볼의 일환인 것 같았다. ​ 덕분에 오늘 내 계좌에도 거대한 눈덩이가 굴러가고 있다. 숫자들이 급격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좋은데.” ​ 최근 들어 좋은 일이 연속이다. ​ 오늘은 금요일이다. 하루만 넘기면, 주말이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볍다. ​ 물론 주말에 쉬는 것은 아니지만… 몸도 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마음조차 학생 때로 돌아간 듯했다. ​ ‘동백검도 받아야 하고… 교단에 금액 협상도 해야 하고….’ ​ 이것 외에도 여러모로 할 것이 많다. 리스트업해둔 기연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주에 하나씩 캐러 가도 모자랄 판. ​ 게다가 슬슬 성시우에게도 적절한 무공을 넘겨야 하는데…. ​ 이 새끼가 마음을 정했는지를 모르겠다. 저번에 팀원도 거절하고, 아주 꼴통 짓만 골라 하는 중. ​ 만약 검을 계속 쓴다고 하면…. ​ ‘더 패야 하나.’ ​ 어쨌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 나는 오늘 수업이 있는 천무관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이름은 천무관이긴 한데, 놀랍게도 이론 수업을 진행하는 강의실이다. ​ 게다가 오늘은 현직 영웅을 특별 초청해 강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꽤 기대되긴 한다, 아직 다른 일류 영웅을 눈으로 본 적은 없는지라. ​ 시간은 오전 아홉시 정각. ​ 정각에 등교하는 것이야말로 학생의 기본 아니겠는가? ​ -끼익 ​ 나는 천무관의 뒷문을 열었다. ​ -쾅! ​ 그리고 뒷문을 다시 닫았다. ​ “씨발?” ​ 저 양반이 대체 왜 여기에? ​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싶었다. 나는 다시 문을 살짝 열어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 문을 닫으며 큰 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단상의 영웅에게로 쏠려 있었다. ​ 올백 머리에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남자. 특별 초청 영웅은, 나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 많이.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 그리고는 잇몸을 보이며 씩 웃었다. ​ 그는 일전에 성시우의 분석을 요청했던 바로 그 사람, ​ 박광철이었다. ​ ​ *** ​ ​ 이론을 담당하는 교수가 단상 옆에 서 있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 “오늘 바쁜 시간 내주셨는데, 환영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 -짝짝짝짝! ​ 강의실이 터질 듯한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 “안녕하세요? 박광철입니다.” ​ 박광철이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 그의 한마디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환호가 쏟아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단순히 영웅이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으니까. ​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제 소속은… 다들 아시죠? 뱅퀴셔입니다.” ​ 그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번 터져 나오는 박수와 환호.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자리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온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 [정해인]: 시온, 박광철씨 왔어. ​ 그리고 단 5초도 지나지 않아 답변이 도착했다. ​ [시온]: 응? 어디에? [정해인]: 내 앞에. [시온]: ?? 광철 삼촌이 여길 왜? ​ 씨발 내 말이. ​ [정해인]: 나도 모르지, 무슨 특별 초청 강의라는데…. [시온]: 아 할아버지한테 들은 거 같은데? 누가 갈래~ 말래~ 막 그랬던 것 같아. ​ 그래서 온 게 저 사람인가. ​ [정해인]: 나 들어오고부터 계속 나만 쳐다보거든? 어떡해? [시온]: 우와… 싫다. 힘내…. ​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에 집중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착실히 수업을 진행했다. 심지어 최근에 정립된 새로운 이론까지도 언급하며 강의를 이어갔다. 객관적으로 그의 강의는 흥미로웠다. 나조차도 수업에 빠져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 “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10분만 쉴까요?” ​ 박광철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 보통 강사가 쉬는 시간을 선언하면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 그때, 한 여학생이 수줍게 손을 들었다. ​ “강사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 “네, 그럼요.” ​ 박광철은 호쾌하게 답했다. ​ “수업 관련된 내용은 아니에요….” ​ “에이, 괜찮죠.” ​ “그럼 혹시… 뱅퀴셔에 입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분명 그녀가 질문했지만, 사실 일종의 총대를 맨 셈이었다. 그 질문은 분명 모든 학생의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 게다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성시우마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영감이 이끄는 팀, 뱅퀴셔는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명성에 걸맞게 팀원을 잘 안 뽑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뱅퀴셔에 입단했다는 것은, 최고의 영웅임을 증명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기도 했다. ​ 그러나 아쉽게도 게임을 진행하면서는 그들과 엮일 일이 거의 없다. ​ ‘원작에서는 초반에 전멸했었지.’ ​ 뱅퀴셔는 원작 초반, 마인들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다. 그들은 단순히 스토리의 비극적인 시작을 알리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 -최고의 영웅 팀이 몰살 당했다. 이 짧은 텍스트 한 줄로 그들의 죽음이 묘사됐고.​ 그들은 압도적인 적의 강함과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존재했다. ​ 그런데. ​ ‘지금은 다르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그 사건이 벌어지진 않았다. ​ 그리고, 이번엔 그걸 막을 수 있다. 내게는 충분한 정보와 계획이 있으니까. ​ 그들의 죽음을 막아낸다면, 분명 훗날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 언제부턴가 그들은 더 이상 내가 짠 스토리 속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고작 텍스트 한 줄로 표현되었던 뱅퀴셔는, 이제는 내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 시온을 위해서라도. 아니지. 그냥 나를 위해서. ​ 그들을 죽게 하지는 않을 터였다. ​ 반드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