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 예상했던 이야기 쪽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 “어떠세요?” ​ 눈앞의 귀족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자신이 거절당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자신감이 배어 있다. ​ 그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은 없었어도, 적어도 꺾을 생각은 없었다. ​ 순간, 옆에 있던 강아린의 시선이 정해인을 찔렀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미묘하게 붉어진 귀끝이 그 감정을 대변했다. ​ 정해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 “영광이긴 하지만… 저는 아직,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 하시온의 얼굴에 짧은 당황이 스쳤지만, 곧 미소로 덮였다. ​ “그래도 괜찮아요! 언젠가 마음이 바뀌실 수도 있잖아요!” ​ 이 분위기를 이대로 두면 이상하게 흘러갈 것 같았다. 정해인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 “일단, 먼 길 오셨으니… 식사라도 하고 계시겠습니까?” ​ 영애의 눈이 반짝였다. ​ “정말요?” ​ “그럼요.” ​ 그때, 영애는 고개를 돌려 기사를 바라봤다. 강아린도 잠깐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저 멀리, 저택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해인과 일행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정해인은 적어도, 영애의 제안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 ​ 그러나 그 시각 저택 내부. ​ 내부 거실에는 이미 차 한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 그러나 영애와 그 기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는 뜻. 유하나는 창문 너머로 농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입가엔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 액자를 깔끔히 닦던 천여울이 그녀에게 물었다. ​ “매일 오시는 이유가 뭘까요?” ​ 천여울의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유하나는 짧게 웃었다. ​ “아시잖아요?” ​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은근한 긴장과 여유로 가득했다. ​ 게임 바깥이면 몰라도 사실, 이 세계의 천여울은 집까지 찾아온 손님을 함부로 내쫓을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마을을 발전시키고자 직접 움직이는 영주였다. ​ 남편에게도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뜻. ​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겠다… 이런 거 아닐까요?” ​ 영주인 유하나가 계속 찾아오는 다름 아닌 이유. ​ 일종의 허락을 위해서였다. ​ 일부다처가 당연시되는 이 세계. 매력적인 남성에게 여러 여성이 달라붙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을 누구와 나누든 법적으로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 막말로, 만약 허락을 구하지 않고 남자를 구슬려 거사를 치른 뒤에 임신한 채로 들이닥친다고 해도, 천여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오히려, 이렇게 예를 갖춰 방문하는 것 자체가 드물 정도였다. ​ 굳이, 굳이, 따지자면 양심 있는 행동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천여울이 뭐라 대답하기 전… 누군가 들이닥쳤다. ​ “실례합니다~” ​ 문이 활짝 열리며, 앳된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천여울과 유하나는 동시에 등을 돌렸다. ​ 하시온은 잠깐 집안을 훑더니, 두 여성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고, 마치 무도회장에 입장한 듯한 태도로. ​ “안녕하세요? 혹시 두 분 중에… 어느 분이 정해인 씨의 부인이신가요?” ​ 상냥한 톤으로 묻는다. ​ 오는 길에 들었다. ​ 아내가 있다고 했다. 솔직히 상관없었다. ​ 실망한 쪽은 오히려 강아린. ​ ‘둘 다 예쁘긴 하네?’ ​ 시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둘 중 누구든, 혹은 둘 다 아내던, 상관없었다. ​ 사교계의 장미. 하시온. ​ 공작가의 영애로 타고난 수완과 욕망은 어떤 일을 벌여도 성공했고 원하는 건 반드시 갖는 스타일이었다. 이번 블루베리도 마찬가지. 그녀는 특유의 추진력과 화법으로 단숨에 아버지, 공작을 설득해냈다. ​ 자신감이 있었다. 이 집에 아내가 몇이든, 그에게 관심을 둔 사람이 몇이든. ​ 자신이 진짜 승자가 될 거란 믿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정해인이란 자에게 꽂혔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꼭 가져야만 했다. ​ “…….” ​ 그렇게 불편한 식사가 시작됐다. ​ 식탁 위에는 차려진 음식이 가득했다. ​ 그러나 분위기는 전혀 푸근하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속내를 감추며,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하시온이 포크를 먼저 들었다. 품위 있게 음식에 손을 대며, 천여울과 유하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미 천여울이 아내이고, 유하나가 영주인 것까지 들었다. ​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이곳, 참 마음에 들어요. 영지로 직접 오시지 않더라도… 블루베리처럼 뛰어난 작물을 보기 위해, 본가에서 직접 이곳에 본부를 설치하는 것도 고려 중이에요.” ​ 하시온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저런 조율도 필요하고, 앞으로 현지 사정도 익혀야 하니… 잠시 이 집에, 방 두 개만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 보상은… 충분히 할게요.” ​ 정해인이 무의식적으로 컵을 들었다 놓으며,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 천여울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컵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잔잔하게 웃는다. ​ “저희 집은 언제든 열려 있어요. 다만… 한 가지, 조심스레 부탁드릴 게 있어요.” ​ 하시온이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천여울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작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 “저녁 아홉 시 이후로는… 복도로 나오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저희가 아직 신혼이라… 민망한 소리가….” ​ 적막이 흐르고, 식탁 위로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다소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 “아하… 네, 그럼요. 조심할게요.” ​ 하시온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숨막혀.’ ​ 그리고, 정해인은 그 분위기 한가운데에서 포크를 쥔 채 묘하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최근 영주인 유하나부터 자꾸 여자가 늘어나는 기분이다. ​ 물론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었다. ​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영주인 유하나였다. 잔을 내려놓고 정해인 쪽으로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 - 쪽. ​ 따뜻한 입술이 정해인의 뺨에 살짝 닿았다. ​ “내일 봐요.” ​ 그녀의 출신 지방에서는 흔히 있는 인사라고 한다. 정말로 그 지방의 풍습인지 진위를 판별할 길이 없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뒤이어 하시온과 강아린도 자리를 정리했다. 영애는 눈을 반짝이며 정해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저녁에 봬요! 농부님.” ​ 여러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영주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마침 영주인 유하나가 집에 있었으니 일사천리였다. ​ 잠시 후, 손님들은 모두 유하나를 따라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집 안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 “어후….” ​ 정해인을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새 집안에 사람이 늘었다. 매일매일 손님, 쉴 틈이 없었다. ​ “자꾸 미안해. 바쁠 텐데 요즘 자꾸 사람을… 읍.” ​ 말끝이 닿기도 전에, 천여울이 정해인의 입술을 강하게 덮쳤다. ​ 처음엔 짧게, 그리고 곧장 깊게 파고들었다. ​ “헤에… 흡.” ​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맞닿는다. 혀끝이 살짝 입술을 훑으며 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손이 정해인의 목덜미를 붙잡고, 허리를 감싼다. ​ 이젠 아예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몸 전체로 감아올리듯,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했다. ​ “하아….” ​ 천여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진다. ​ 두 볼이 상기되고, 촉촉해진 입술로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깨문다. 정해인은 저항할 틈도 없이 그 열기에 빨려들었다. ​ 몇 분 동안, 오로지 키스만. 거실에는 점점 뜨거운 숨소리만이 가득해졌다. ​ 천여울은 숨이 모자란 듯 헐떡이면서, 그러다 한순간 눈을 치켜떴다. ​ “따라와요….” ​ 숨을 몰아쉬며, 정해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 - 질질. ​ 정해인은 그대로 방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 - 찰칵. ​ 문이 잠기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 곧바로. ​ - 으윽. ​ 무언가에 세게 눌린 듯, 터져 나오는 낮은 목소리. ​ - 하으… 사랑해요…. ​ 간간이 섞여 나오는 속삭임. ​ 천여울의 경고처럼, 비록 9시는 아니었지만. ​ 그 이후로도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 ​ ​ ​ ​ @ ​ ​ ​ ​ - 지지지직. ​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 ​ 윤채하는 이미 주사위를 굴리는 건 잊었다. ​ “…….” ​ 그저 천여울과 정해인이 잔뜩 키스하고. ​ 함께 들어간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물론 실제로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 으윽. ​ - 하으… 사랑해요…. ​ 그저 음성만 들려올 뿐. ​ 자꾸만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손끝과 발끝까지 퍼지는 전류 같은 감각.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더 짙게, 또렷하게 그녀를 감싼다. ​ 마치 자신이 저 장면 한가운데에 들어선 듯, 몸이 뜨거워지고, 숨이 자꾸 짧아진다. 부끄러움과 묘한 열등감이 뒤섞여 마음이 불편해졌다. ​ “…….” ​ 책상 위에는 멈춰 선 주사위 하나. ​ 그 불편한 열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윤채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말로 할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을 포함해,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든다. 그러나 손을 움직인 그 순간. ​ - 툭. "?" 윤채하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본래의 계획한 목적지는 아니었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주사위가 툭,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 [12!] ​ [당신은 결국, 그 위대한 존재의 심연에 닿고야 말았습니다.] [배드 엔딩 조건 충족 : 위대한 크툴루, 잠에서 깨어나다.] [크툴루가 마왕을 무한히 복제하며, 세상 모든 생명체를 불태웁니다.] [모든 언어가 붕괴되고, 모든 존재가 꿈틀거리는 어둠 속에 잠식됩니다.] [이 게임은 3분 후, 모든 의미와 함께 종료됩니다.] “… 어?” ​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방 안은 어두웠고, 여신은 마지막 나레이션을 조용히 읊었다. ​ 윤채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엔딩을 흐린 눈으로 바라봤다. ​ “나도… 나도….” 패배감과 허무함.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만이. 가슴속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