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계획은 조금 달랐다. ​ 요한의 팀이 유세린을 공략하고, 탈락 직전까지 시간을 끌어주는 것. 애초에 공략 성공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건 무리였고. ​ 탈락하는 정확히 그 순간. ​ 그 시점에 유세린을 등 뒤를 노려 일격을 꽂는 것. ​ 그게 내 첫 구상이었다. ​ 앞에서 어그로를 끌어주고, 뒤에서 나는 그녀의 유일한 약점인 완전한 사각을 노릴 수 있다. 팀이 없는 나로서는 다소 비겁하긴 했으나, 효율로 따지면 이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없었다. ​ 그러나. ​ “엥…? 아니, 무슨….” ​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망가졌다. ​ 추풍낙엽.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 ​ 팔을 한 번 휘두르면 둘이 튕겨 나가고, 반대쪽 팔을 휘두르면 또 둘이 사라진다. ​ 공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움직임들. ​ 그나마 있는 전략이라고는, 유세린이 처음의 섬광탄을 피하는 순간 전부 없어져 버렸다. ​ 그 중 공격을 받아낸 건 요한이지만… 그 또한 금방 갈 것은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 결국 나는 예정보다 빠른 타이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한 방. 한 방에 끝내야 한다. ​ 비록 그녀의 체력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출력으로. ​ 마력을 끌어모으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 - 콰아아아앙!! ​ 그녀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순간적으로 등 위로 감겨드는 사슬을 뚫고, 팔랑크스가 폭발했다. ​ 유세린은 날아가 그대로 건물 벽에 꽂혔다. ​ 잔해가 흩날리고, 먼지가 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눈앞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 “야 인마… 너 왜 이렇게 약하냐….” ​ 조롱은 절대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 그리고 곧바로 모든 신경을, 건물 잔해에 집중했다. ​ 끝났을까? ​ …내 생각엔, 아니다. ​ 온 힘을 다해 때리긴 했으나, 아마 그걸로는 안 쓰러지지 않을까. ​ 그때였다. 잔해 더미가, 울컥거리며 위로 들썩였다. ​ “아이고.” ​ 그래.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무너진 건물의 틈 사이. 먼지가 섞인 자욱한 연기 사이로 검은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 - 스르르륵. ​ 사슬. ​ 무너진 벽 틈 사이에서 튀어나온 그것이, 잔해를 하나씩 치웠다. ​ “으아… 너무 아픈데….” ​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 중심에서 유세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움츠리며 허리를 펴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 콧등엔 흙먼지가 묻어 있고, 옷 중간중간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 “… 너무한 거 아니에요?” ​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쪽을 바라봤다. ​ 목소리의 톤은 가볍지만, 표정은 전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 분명 공격은 통했다. 그녀조차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 “아쉽네요.” ​ “푸핫!” ​ 유세린은 쿡하고 숨을 내뱉으며 사슬을 쥔 손을 아래로 떨궜다. ​ “좀 늦게 왔네요? 친구분들은 벌써 다녀가셨거든요.” ​ “그러게 말입니다. 가긴 했겠죠, 좋은 데로.” ​ 사슬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나 또한 거리를 좁히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 - 띠링. ​ 워치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보스 공략이 시작되었다는 알림. ​ “여긴 왜 오신 겁니까?” ​ 나는 묵혀둔 질문 하나를 꺼냈다. ​ “아, 그거요?” ​ 그녀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다. ​ “그때, 파티 옥상에서 세 번째 질문. 기억해요?” ​ “질문이요….” ​ 순간 떠올랐다. 그날, 그녀가 한 세 가지 질문. ​ 분명 다 답해줬던 걸로 기억하는…. ​ 아. ​ “강아린 부대표랑은 무슨 관계에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 대답 못 들은 것 같아서요.” ​ 그 말이 끝나자마자. ​ 유세린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 “ㅡㅡㅡ!” ​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 이미, 사슬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 - 퍼엉! ​ 잔디와 흙이 뒤섞인 파편이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 내가 있던 자리, 딱 한 뼘 옆 땅바닥에 검은 사슬이 비틀리며 박혀 있었다. ​ 장거리 교전은 안 된다. 거리 유지만으로도 지속적으로 손해를 본다. 반드시 접근해야만 했다. ​ 그 순간, 허공을 부유하듯 회전하는 그림자 하나. 그 중심에서 유세린이 눈을 휘며 피식 웃었다. ​ “나도 기습 한 번 했어요.” ​ 나는 숨을 골랐다가, 힘껏 도약했다. ​ “잘… 하셨네요!” ​ 나는 대답하면서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올랐다. 그 즉시 여러 개의 사슬이 내 궤도로 향해 날아들었다. ​ 옆, 뒤, 앞 사선으로 무수히 엮이며. ​ 비록 리미트가 걸려 있어 사슬의 개수 수는 제한적이었지만, 그 압박감만큼은 상당했다. ​ ‘이걸 어떻게….’ ​ 공격팀에서 공략할 생각을 했지. 먼저 간 내 친구들의 무모한 용기의 박수를 보낸다. ​ 후방으로 날아오는 사슬을 창을 풍차처럼 돌려 탄망을 형성해 튕겨냈다. ​ - 탕 탕! ​ 정면에서 날아드는 사슬은 몸을 비틀어 회피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선으로 쇄도했다. ​ 불과 세 걸음 정도의 거리에 접근한 순간. ​ “흐으….” ​ 숨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졌기에 비로소 들리는 소리. 유세린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연속된 교전의 피로는 확실히 쌓인 모양이었다. ​ 그러나 지친 건 나도 마찬가지. 아까 펀치머신부터 방금의 일격까지 벌써 하루에 팔랑크스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 이 싸움은 단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 - 쐐액! ​ 사슬이 다시 휘둘러졌다. 나는 허리를 낮추며 그 밑을 지나갔다. ​ - 챙! ​ 옆구리를 노리는 사슬을 보지도 않고 창으로 튕겨낸다. 보는 시간마저 아껴야 하는 상황이다. ​ “직관까지….” ​ 유세린은 놀라워했다. 서로 몇 번의 합이 더 오간다. ​ 그때, 유세린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통증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 그 한 박자. 그거면 충분했다. ​ 팔랑크스는 더는 무리다. ​ 다만, 내가 연구한 기술이 있다. 알데바란의 두 번째 권능 『귀참(鬼斬)』. ​ 비록 지금 손에 들려있는 무기는 카타스트로피가 아닌 시험용 창이지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 나는 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찌르지 않는다. ​ 휘두른다. ​ 그 순간 유세린이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 이러면, 창은 닿지 않는다. 유세린은 내 공격이 닿지 않을 거리까지 완벽히 회피했다. '걸렸다.'​ 고통을 느끼는 척, 틈이 생긴 척, 내 공격을 유도한 것이다. 내가 들어올 것이라 믿고, 유도한 심리전. ​ 완벽히 덫에 걸려드는 순간이었다. ​ 그녀의 눈동자가 요요히 빛난다. ​사슬을 비틀며 완벽한 카운터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질릴 정도로….’ ​ 강하다. 그녀는 내가 마땅한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미 분석까지 끝난 듯 했다. ​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 ​ 귀참은 근접 공격이 아니다.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기에,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손목을 따라 올라오는 무게감. ​ 그때의 기억을 덧씌운다. 재현은 못 해도, 흉내는 낼 수 있다. ​ - 휘이익!! ​ 창이 허공을 가르며 무언가가 찢긴다. 창의 끝에서부터 발산하는 창강(槍罡)이. ​ 한 걸음 앞, 초 근접거리에서. ​ 폭발하듯 터진다. ​ - 키이이이잉! ​ 유세린은 방어하지 못했다. 공격이 닿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역공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 방어는 늦었고, 몸은 역동작에 걸렸다. ​ 그 틈. 그 틈을 비집고 창강이 그녀의 복부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 - 으적! ​ 폭발음이 고막을 찢었다. 유세린의 몸이 허공을 그리며 튕겨 나갔다. ​ 그리고 그대로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 땅바닥에 등부터 꽂혔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땅이 움푹 꺼졌다. ​ 나는 재빠르게 창을 거꾸로 쥔 채 곧장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아직 끝났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 그러나. ​ 그녀는 아무 움직임 없이, 땅에 누워있었다. ​ “…….” ​ 나는 천천히 착지했다. ​ 고개를 돌렸다. ​ - 쩌저적…. ​ 손에 들었던 창이 조금씩 깨져갔다. 시험용 창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마나를 때려 넣은 탓이었다. ​ 창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 유세린은 숨을 그대로 몰아쉬었다. 딱 그 자세로. ​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이어졌다. ​ 잠시 후, 피식 웃는다. ​ “… 하아.” ​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 그녀가 약간 비뚤어진 시선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 “해인씨 양파에요?” ​ “그게 무슨….” ​ “까면 깔수록 뭐가 계속 나오네… 직관에… 방금 그건 또 뭐람… 아 아파.” ​ 찢어진 옷 사이로 선명한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 “패배, 인정하십니까.” ​ 나는 박살 난 창의 잔해를 들고 그녀에게 겨눴다. ​ “…… 진짜, 너무해.” ​ 그녀는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을 뻗어 내게로 넘겼다. 번쩍거리는 워치의 화면이 보인다. ​ 화면 위에는 검은 방울 아이콘이 반짝이고 있었다. ​ 나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화면을 누르기 직전…. ​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 나는 아주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 그토록 원하는 답을 해줄 차례였다. ​ “아, 맞다. 강아린이요?” ​ 그녀의 표정이 살짝 경직됐다. ​ “미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 “…… 에?” ​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대로 아무 대답 없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렀다. ​ - 띡! ​ 워치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 [검은 방울 공략 성공!] ​ [보상 지급 완료] [단독 처치!] [획득 포인트 +2000] ​ [2040 pt] ​ 그리고 곧이어 시험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울렸다. ​ [시험 종료!] ​ [현재 인원] [청팀 77명] VS [백팀 42명] ​ [점수 현황] [4790점] vs [5110점] ​ [백팀 승리!] ​ 5000점을 달성했기 때문에, 자동으로 시험이 종료됐다. ​ “와… 씨.” ​ 청팀은 정말 미친 듯이 백팀을 잡아들였다. 검은 방울이 아니었거나 조금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질 뻔했다. ​ [MVP 정해인] ​ [2640 pt 획득!] [검은 방울 보스 단독 공략 성공!] [은색 방울 보스 단독 공략 성공!] ​ 나를 칭찬하는 기록이 줄줄이 올라오지만, 나는 손목을 돌려 워치를 그대로 꺼버렸다. ​ “…… 죽겠다.” ​ 그리고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 “… 여기 와서 누울래요? 좀 푹신하네.” ​ 유세린의 조용한 목소리. 살짝 비꼬는 어조였지만, 진심은 느껴졌다. ​ “…….” ​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 옆으로 몸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방금까지 죽일 듯이 치고 박고 싸웠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몸 내부의 마력 회로가 비명을 지른다. '··· 끝.'​ 길었던 기말시험의 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