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탈락자의 공간은 조용했다. 대화는 없었다. ​ 아무도 먼저 말하려 하지 않았고,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 그 정적을 깨는 작은 탄식. ​ “… 아?” ​ 화면 너머, 정해인이 히든 포인트에서 나오는 장면이 비쳐졌다. ​ 문이 열리고, 그가 문턱을 넘었다. 그 순간,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공간. ​ 그러나 탈락자 중 누구도 시험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다시 말해, 정해인은 부활을 포기했다. ​ 유하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앉아 있었다. ​ 부활에 대기하고 있었던 그녀 나름의 자세였다. ​ 그러나 그 자세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다. ​ “계속 그렇게 앉아있으면 되겠다.” ​ 옆에 앉은 하시온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비웃는 듯한 어조였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그녀 또한 선택받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 “아….” ​ 기말고사 후의 여행.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 ​ ​ ​ ​ *** ​ ​ ​ ​ ​ [공수 교대 시작.] ​ [현재 인원] [청팀 77명] VS [백팀 101명] ​ [점수 현황] [4200점] vs [3010점] ​ [5분 후 공수가 교대됩니다.] ​ [마지막 교대입니다.] ​ 워치 좌측엔 탈락자 현황이 떠 있었다. ​ [랭킹 1위 강아린] ​ [랭킹 5위 유하나] ​ [랭킹 4위 천여울] ​ [랭킹 19위 하시온] ​ [랭킹 없음 윤채하] ​ “이야….” ​ 나는 워치를 내려다보며 짧게 감탄했다. 아주 개판이었다. ​ 이번 교대가 끝나면, 모든 시험이 종료된다. ​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마지막 전투, 최종 수비. 정상적이라면, 이 타이밍에 수비 쪽이 점수에서 앞서야 했다. ​ 상대의 공격을 막기만 하면 이기는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점수가 밀렸다. ​ 청팀 4200점. 백팀 3010점. ​ 1000점이 넘게 차이가 난다. ​ 그도 그럴 만하다. ​ 예상치 못하게 상위권 인물들이 대거 탈락했다. ​ 강아린과 하시온 또한 보스에게 도전하다가 탈락했으니. ​ 청팀도 백팀도 많은 전력을 잃었지만, 차이는 남은 인원의 '질'이었다. ​ 백팀에 남은 핵심은 단 한 명. 랭킹 2위, 요한. ​ 그에 비해 청팀은 랭킹 3위 신현우, 그리고 주서준이 건재했다. ​ 그 둘이 이끄는 청팀은, 수비하는 와중에도 성실하게 점수를 벌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금색 방울의 보스 공략까지 성공하며 대량 점수를 확보한 것이다. ​ 그 결과, 백팀은 지금부터 공격을 막아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점수가 뒤처져 있다. ​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뻔했다. ​ ‘보스 공략.’ ​ 유일하게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수비라는 건 원래 인원의 탈락을 전제로 둔 턴이다. 어차피 분명 여럿은 탈락당한다. ​ 보스를 잡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은색 방울로는 부족하다. 금색 보스를 공략한다고 해도 점수 역전을 장담할 수 없다. ​ 사실상의 목표는 하나가 됐다. ​ 검은색 방울인 유세린. ​ “아… 피곤하네.” ​ 절대 공략하고 싶지 않던 대상이었다. 게다가 마음이 맞는 팀원도 없다. ​ “나중에 혼 좀 나자.” ​ 내 말도 안 듣고 유세린에게 도전한 천X울 양과 윤X하 양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 나는 워치를 꺼내 지도를 펼쳤다. ​ 공동을 중심으로 유세린은 시계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 아무리 봐도… 정면은 무리다. 유세린의 특성상 상하좌우 구분 없이 모든 방어가 가능하다. ​ 카테나치오의 완벽한 상극이었다. ​ 단, 완벽한 사각인 등 뒤를 제외하면. ​ “팀이 있었으면….” ​ 팀원이 앞에서 그녀의 관심을 끌고, 내가 뒤에서 공격하는 방식을 채택했겠지만. 이미 늦었다. 팀은 없다. ​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지도 위의 진입 경로들을 차례로 훑었다. ​ “··· 어?” ​ 잠깐만. ​ 굳이 팀원이 아니어도 상관 없는 거 아닌가? ​ 전투를 먼저 열고, 시선을 끌고, 혼란을 유도할 수 있다면. ​ 그 역할을 누군가가 해준다면. ​ 분명 있다. ​ 아니, 있을 것이다. ​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또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 그리고 지금, 불리한 팀의 점수를 뒤집기 위해서라면 뒤도 안 보고 갖다 박을 사람이. ​ 네가 힘 좀 써줘야겠다. ​ ‘요한.’ ​ 그를, 이용하면 된다. ​ 나는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그렸다. ​ ​ ​ ​ ​ ​ *** ​ ​ ​ ​ ​ 공격팀의 눈을 피해 모인 숲속. 그들 사이에서 짧고 무거운 대화가 오갔다. ​ “… 진짜 해야 하는 거지?” ​ 떨리는 목소리. ​ “당연하지.” ​ 요한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 단호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 요한과 그가 이끄는 크루세이더. 팀원들은 숲속에 보여서 토론하고 있었다. ​ 모든 학생을 어우르며 단체로 이동하는 청팀의 주서준과 달리. 요한은 자신에게 잘 보이거나, 또 성에 차는 사람들만 팀을 이뤘다. ​ [4200점] VS [3010점] ​ 결국 워치 속 점수는 잔인하게 현실을 드러냈다. ​ 이쪽 또한 유세린을 잡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설마 가온이 못 잡을 수준의 보스를 넣지는 않았을 테니. ​ 그들이라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터였다. ​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인원은 다섯. ​ 만약 주서준이나 다른 청팀에게 걸리면 큰일이다. ​ 공수가 바뀌자마자, 공동에서 나오기 전에 바로 노린다. ​ 그게 그들의 전략이었다. ​ 숲 너머, 검은 연기가 지면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유세린이 이동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 “진영 갖춰.” ​ “진입하자마자 바로 섬광이야.” ​ “최전방은 요한.” ​ 하나둘씩 전략을 이야기한다. 요한은 조용히 검을 뽑았다. ​ “앞장선다.” ​ 그리고 그와 함께, 다섯 명의 그림자가 검은 안개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 그리고, 그 움직임을 느낀 유세린은 걸음을 멈췄다. ​ 그녀는 조용히 눈을 떴다. 팔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사슬이 얽혀 뚝뚝 떨어지듯 흩어졌다. 아까보다는 명백히 적은 사슬의 개수. ​ 이번 상대는 수비팀이었다. ​ “… 으휴.” ​ 가볍게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 “한 번 더 오나 보네?” ​ 그녀는 이미 두 번이나 싸웠다. 그것도 심지어 리미트를 푼 상태로. 많으면 두 번, 적으면 한 번 정도 싸울 것이라 여겼는데. ​ 학생들의 승부욕은 그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 천여울 윤채하. 강아린 하시온. ​ 절대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뜨릴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리미트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강했고, 예상보다 오래 버텼다. ​ 몸이 약간 무겁다. 평소 같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피로가 몸 끝부터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 “조금 피곤하네.” ​ 그녀는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었다. 검은 사슬이 다시 손목 주위에 얽히며 또아리를 틀었다. 일정한 간격. 맞춰진 발소리. ​ “다섯?” ​ 진영이 잘 갖춰진 팀이었다. ​ 유세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 그때. ​ “섬광!!” ​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경을 집중하자, 지면 아래로 흐르던 검은 연기가 그대로 몸을 따라 올라오며 그녀를 띄워냈다. ​ 첫 섬광이 터졌다. 빛이 번쩍이며 공동의 중심이 하얗게 물들었다. ​ 그러나, 그녀는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 섬광에서 피했다. ​ 섬광 속.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들 머리 위를 지나갔다. ​ “위ㅡㅡ!” ​ 요한이 소리치기도 전에, 사슬이 하늘에서 휘감겨 떨어졌다. ​ - 쾅! ​ - 쾅쾅! ​ 두 명. 즉시 바닥으로 튕겨 나가며 검을 놓쳤다. ​ 유세린은 통통, 두 발로 바닥을 디디며 착지했다. 마치 놀이처럼, 발끝을 돌리며 한 바퀴 회전한다. ​ “반가워요?… 헉, 유명한 얼굴?” ​ 그녀의 눈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남은 세 명. 그중 중앙, 검을 든 요한의 시선과 맞닿았다. ​ 순간, 유세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빠른 돌진과 함께 요한이 검을 휘둘렀으나… 유세린의 사슬에 완벽히 막혔다. ​ - 챙! ​ 그의 손목에서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 눈 깜짝할 새에, 사슬이 그의 손목을 비틀며, 반격을 가했다. ​ - 훅! - 캉! ​ 그의 검은 유세린의 사슬을 막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 ‘젠장….’ ​ 요한은 얼굴을 찡그렸다. ​ 그의 팀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유세린의 발밑에서 나오는 고작 몇가닥의 사슬로 전부 가로막혔다. ​ 물론, 그건 요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요한은 이 시험이 끝나면, 저놈들을 갈아치울 생각뿐이었다. ​ 반대로 유세린은 이상함을 느꼈다. ​ ‘뭐지…?’ ​ 그녀는 잠시 멈추어 생각했다. ​ 요한의 저항. 분명 그녀가 시험 전에 예상했던 가온의 랭커 수준이었다.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강함. ​ 그러나, 분명 전에 싸운 학생들은, 이 학생과는 수준이 한참 달랐다. ​ 리미트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까다로웠으니까. 그래서 가온의 순위권 학생들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었는데…. ​ “으잉?” ​ 다시 원래 예상했던 수준으로 돌아왔다. ​ ‘차이가 이 정도라고?’ ​ 유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준 차이가 이렇게 날 줄은 몰랐다. ​ “큭, 크으으!” ​ 그의 고통 섞인 비명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 몇번의 합이 더 오간다. 요한의 검이 유세린의 사슬을 꿰뚫지 못할 때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갔다. ​ 요한이 약한… 건 아니다. 유세린이 너무 강할 뿐. ​ 그녀의 사슬이 요한의 모든 공격을 압도하고, 다시 그를 밀어내는 식으로 방어했다. ​ - 퍽! ​ - 쿵! ​ 이미 주변의 팀원들은 전부 나가떨어졌다. ​ 마지막으로, 요한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낸 부작용, 마력 탈진이었다. ​ 그는 눈을 감고 숨을 헐떡였다. ​ 유세린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고생했어요~” ​ 유세린도 뭐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점수 현황은 그녀에게도 공유가 된다. 따라서 백팀의 최후의 도전이 올 것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 하지만 이렇게 속전속결로 끝날 줄은 몰랐다. ​ 결국 뭐, 정해인은 만날 수 없었다. ​ 그녀의 사슬이 요한의 워치를 톡 터치했다. ​ [공략 실패] ​ 수비팀으로써 보스에게 도전했기에, 탈락은 아니다. ​ 그러나. ​ 그때. ​ 워치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 유세린은 뒤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다. ​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 ‘늦었….’ ​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 - 콰아아아앙!!!! ​ 사슬이 그녀의 등에 감기며,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 투쾅! ​ 그녀는 땅에 튕겨 나가 그대로 건물 벽에 처박혔다. ​ ‘무슨…!’ ​ 요한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 그의 눈앞에 거대한 창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눈으로 보기 전까지도,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유세린에게 정확히 꽂히는 모습을 요한은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 그 공격을 보는 순간, 요한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고 말았다. ​ 마력의 밀도, 크기, 속도까지. 이미 학생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 ‘누구지?’ ​ 요한의 시야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잔뜩 지친 기색의 남성. 어깨가 가볍게 들썩이고, 땀에 젖은 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 “어우… 죽겠네 진짜.” ​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요한의 등이 움찔하며 떨렸다. ​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 정해인. ​ 그는 요한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 요한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 그리고 이어진, 정해인의 한 마디. ​ “야 인마… 너 왜 이렇게 약하냐….” ​ 비웃음도 아니었고, 조롱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감정 없이, 정말 궁금해서 던진 말처럼 들렸다. ​ 그게 오히려. ​ 요한에게는 더욱 잔인하게 들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