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인 팀, 유물 습득 성공. 종료합니다. ​ 종료를 알리는 안내 목소리가 유적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제야 손에 힘을 풀며 고개를 돌렸다, ​ 상대 본대의 두 명은 이미 전원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시온은 유물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김대현과 윤상혁이 서 있었고, 세 사람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 “끝났어.” ​ 나는 눈 앞의 한이리에게 말했다. 그 또한 더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벽에 처박혀 있는 주한강을 뽑아내기 위해 내 뒤로 향했다. ​ 설령 기절했더라도, 크게 다칠 일은 없다. 모든 실습에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 유물이 사라진 자리에 포탈이 생성됐다. 나는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시온이 내 방향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 “해인, 괜찮아?” ​ 그녀가 다가오며 내 얼굴과 상태를 샅샅이 살폈다. 마지막에 고개를 숙였던 것을 보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 “괜찮아.” ​ “진짜 괜찮은거지? 무슨 일 있어?” ​ “아마 저번에 마신 영약 때문인 것 같은데, 예상보다 효과가 더 좋았나 봐.” ​ “그래…?” ​ 시온은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흑요석 팔찌가 검은빛으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 나도 방금 발견했다. ​ 뭐야 이거? ​ “이건 또 왜 이래?” ​ 나는 반짝거리는 팔찌를 보며 물었다. ​ “글쎄 이제 좀 효과가 발생하는 거 아닐까? ‘활력 증진’ 팔찌잖아.” ​ 시온은 팔찌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 -응, 괜찮네…. ​ 나는 그녀와 함께 포탈 쪽으로 걸어갔다. 윤상혁과 김대현은 이미 앞서 나가고 있었다. ​ 그들의 뒤를 따라가려던 순간, 시온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 “부축해줄까?” ​ “아니, 그 정도는 아니….” ​ “그래.” ​ 시온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팔짱을 껴버렸다. 풀려고 살짝 팔을 당겨 봤는데, 꿈쩍도 안 해서 그냥 포기하고 그녀와 나란히 걸어갔다. ​ 포탈에 진입하자,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며 실습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 이미 앉아 있던 학생들의 모든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됐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팀이었던 것 같았다. ​ 시온은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손을 흔들며 다른 학생들을 향해 인사했다. 마치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기는 듯, 그녀의 표정에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 ‘뭐해 얘는….’ ​ 좌중의 모든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옆에 팔짱을 낀 미인까지. ​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모양새에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 빠르게 자리로 향하며 시온에게 작게 속삭였다. ​ “좀 풀어.” ​ 그녀는 내 요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얼굴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만 달싹였다. ​ “아마 적응해야 할걸?” ​ “뭔소리야 또.” ​ 시온은 내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 상태로 자리까지 돌아왔다. ​ 원래 착하다가도 종종 제멋대로일 때가 있었는데, 요즘 좀 그 빈도가 급격하게 는 느낌이다. ​ 자리에 앉아 있자, 주한강을 업은 한이리가 포탈 밖으로 걸어 나왔다. ​ “쟤 깨어있는데.” ​ “누구?” ​ “업혀있는 놈, 주한강.” ​ 옆에 있는 윤상혁이 무심히 말했다. 아무래도 쪽팔리긴 했는지 둘은 곧바로 의료실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 “오늘 첫 모의 던전 수업. 고생 많으셨습니다.” ​ 담당하는 교관은 단상 위로 올라와 입을 열었다. ​ “선발대로서, 여러분들에게 지식을 제공한 8팀에게 박수 부탁드립니다.” ​ -짝짝짝 ​ 박수가 잠시 울렸다. 이어지는 몇 차례의 다음 수업 안내 후, 교관이 포탈을 닫고 수업의 종료를 알렸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실습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 그때 몇몇 학생들이 지나가며 내게 말을 걸었다. ​ “정해인이라 했나? 잘하더라.” ​ "낙하산 아니었어도 입학했겠는데?" ​ "해인아 혹시 나 번호 좀 줄 수…." ​ 나도 퇴장하려 했지만, 중간에 멈춰서 그들의 짧은 평가를 듣게 됐다. ​ 확실히 실력이 있으면 인정받는, 가온다운 모습이었다. ​ 나는 문 옆에 있는 무장 반납함에 창을 반납하고 복도로 나섰다. 시온도 내내 함께였다. ​ 같은 수업을 들은 김에, 저녁까지 같이 먹자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원래는 그냥 숙소로 가서 쉬려 했는데. ​ ‘아니 나는 같은 반이 아니라 만나지도 못하고 밥도 같이 못 먹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 … 그냥 수긍했다. ​ 외부로 나와보니, 창문을 통해 해가 지기 직전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모양. ​ 교내 식당으로 향하던 중, 벽에 붙어있는 화려한 대자보들이 눈에 들어봤다. ​ 우리는 멈춰서서 대자보를 들여다봤다. ​ ‘동아리….’ ​ 동아리를 홍보하는 포스터였다. 가온에서는 학생들에게 최소 1개 동아리 가입을 권장한다. 사실 말이 '권장'이지, 동아리 활동으로 버는 마일리지까지 감안하면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 ​ “가입하긴 해야 하는데….” ​ 원작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동아리 선택은 회차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첫 주차 신청 기간은 그냥 넘기고, 이후 정정 기간과 추가 신청 기간에 멤버를 보고 신청하려고 했다. ​ 아마 다른 주연들은 이미 신청을 마쳤을 것이다. 내일부터 좀 알아보고 나도 신청을…. ​ “해인 아직 안 했어? 나도 안 했는데.” ​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 “어 아직. 정신없어서 못 했어.” ​ “그럼 이거 같이 할래?” ​ 그녀가 하나의 포스터를 손짓하며 가리켰다. ​ “이거 우리 둘이서 신청하자. 재밌을 것 같은데?” ​ 어디지? 어떤 동아리인가 싶어 그녀가 가리킨 포스터를 읽어봤다. ​ [학업으로 쌓인 피로감을 여행으로 치유합니다.] ​ 그녀가 지목한 동아리는 여행 동아리였다. ​ 잠깐만 근데…. ​ 우측 하단에 화살표와 함께 작은 글씨로 ‘뒷면 참조 필수.’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찜찜한 기분에 포스터를 들어 뒷면을 살펴봤다. ​ [연인 동반 신청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 자극적인 하트 심볼과 함께 쓰여 있는 문구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 “… 뭐?” ​ 순간 머릿속에 묻어뒀던 게임 속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거. ​ ‘X스 동아리.’ ​ 이스터 에그 중 하나였던 이 동아리.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겉표지부터 심상치가 않다. ​ 연애와 동아리 활동을 동시에 장려하는 가온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동아리다. 주인공이 특정 히로인과 함께 신청하게 되면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 게다가 입학생들은 전원 만으로 19살 이상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도 딱히 없었다. ​ 시온도 모르고 내게 권유한 듯했다. 나는 대자보를 완전히 뒤집어 까 그녀에게 내용물을 보였다. ​ 그 뒤 시온은 10초가량 아무 말도 없었다가. ​ 얼굴이 새빨개지며 급하게 대자보를 덮었다. ​ “… 몰랐어.” ​ 설마 했지만, 역시 그녀 또한 몰랐던 모양. 할아버지 밑에서 알고 지낸 지도 10년이다. "어 알아." ​ 가족 같은 사이였기에 알고도 이런 권유를 할 리는 없었다. ​ 아마, 절대로. ​ ​ ​ ​ *** ​ ​ ​ ​ 나는 뜨거운 물로 온 몸을 지진 후 거실로 나왔다. ​ “아오, 피곤해.” ​ 고단한 하루였다. ​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 지난 10년간 훈련을 거듭하며 내 몸에 대해 파악한 것이 있다. 순간적인 출력이나 퍼포먼스는 꽤나 쓸만하다. 이건 영감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 그런데, 문제점은…. ​ “연비가 그닥….” ​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좋지도 않다. 지속해서 힘을 발휘하면 지쳐버리는 단점이 있다. ​ 결국 내 약점은 장기전이었다. ​ 나는 기숙사 방 중앙에 앉아 온몸의 상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병원에서는 스스로 간단하게 진단했었는데, 역시나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 ‘제대로 보자.’ ​ 눈을 감고 깊게 마나를 운용하자, 이내 폭발적인 마나가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날뛰는 야수처럼. ​ 지난번에 마셨던 영약은 확실히 내 마나의 절대적인 총량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흐름까지도 과도하게 늘려버려, 몸속에서 제어가 어려운 상태로 변해 있었다. ​ ‘이게 문제였네.’ ​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던 그 순간이었다. ​ 팔목에 찬 흑요석 팔찌가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흑요석 특유의 광택이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깜빡였고, 몸속의 마나가 그 빛에 감응하듯 움직임을 멈췄다. ​ 흑요석 팔찌는 내 몸을 관통하며 폭주하던 마나의 흐름을 단단히 붙잡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어?” ​ 나는 팔목을 내려다보며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 날뛰던 마나는 팔찌가 빚어낸 새로운 흐름에 따라 움직이며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거친 파도 같았던 에너지가 잔잔한 물결로 변하듯, 내 안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던 마나는 점차 고요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마치 거센 물줄기를 품은 댐이 단단히 조율된 수문으로 물살을 제어하는 듯했다. ​ 나는 시험 삼아 손을 펼쳐 약간의 강기를 두르며 감각을 확인했다. ​ 강기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세기, 그리고 선명함까지. ​ 모든 것이, 일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 “허.” ​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천천히 팔찌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 “영감, 완전 나이스.” ​ 내 약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