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을 들고 호흡을 골랐다. 그런 내 앞에서 레온이 거리를 유지하다가, 미끄러지듯 몸을 날렸다. 레온의 검이 큰 원을 그리며 나를 노린다. 나는 그걸 크로스가드를 세워 단단하게 막아냈다. 방어, 회피, 공격 세 가지의 선택지 중 방어를 고른 것인데, 내 몸에 새겨진 검술 유파가 방어 위주라는 증거였다. 레온이 경쾌하게 발을 놀린다. 그에 따라 검이 길게 늘어지며 잔상을 남겼다. 사람을 현혹해 빈틈을 유도하고, 그렇게 생겨난 빈틈을 물어뜯는 검술이었다. 레온의 첫 공격은 굉장히 빨랐으나, 이미 자세를 잡은 내가 대처하기에 어려운 속도는 아니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고, 레온은 즉시 검을 빙글 돌려 비어 있는 공간을 노렸다.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레온의 검을 또 막아냈다. 불똥이 튄다.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그 사이에서 레온이 춤을 췄다. 검이 늘어난다. 수많은 잔상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 모든 걸 침착하게 응시하던 나는, 허리를 노리고 쏘아지는 잔상을 꿰뚫었다. 챙! 검과 검이 부딪힌다. 나는 최소한의 힘으로, 최소한의 동작으로 레온의 공격을 방어하며 눈을 가라앉혔다. 내가 익힌 검술은 파이론류다. 용병으로 떠돌다 죽은 파이론이 남긴 용병 검술. 방어가 핵심인 파이론류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쉬운 난이도와 탁월한 성능 덕이었다. 16개의 최적의 경로를 상황에 맞게 응용하며 적을 방어하는 파이론류는 단순 암기만 해도 매우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는데, 낭비 없는 움직임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쾌검의 결이 섞여 있기도 했다. 파이론류는 기본적으로 방어를 한다. 적의 공격을 끊임없이 막았다. 마치 단단한 성벽처럼 우뚝 서서 묵묵하게. 허나 알겠지만 결국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적을 죽일 수단이 없다면 그건 검술이 아니라는 뜻이다. 늦게 죽는 방법론이었지. 그래서 극한의 방어 검술인 파이론류에도 결정적인 한 수는 존재했다. 레온의 검이 팔랑인다. 무게 중심을 이동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빈틈을 레온이 물어뜯는다. 챙! 챙! 챙! 챙! 챙! 연속되는 충돌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레온이 나비처럼 팔랑인다. 경쾌하고 가벼운 검격이 나를 압박한다. 그리고. 나는 검을 느릿하게, 하지만 빠르게 휘둘렀다. 파이론류 양손 검술, 1식. 십류귀해(十流歸海). 내 검이 최적의 타이밍에, 최적의 경로를 타고 레온의 목을 노렸다. 그것은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정답이었다. 서로 간에 합을 겨루며 쌓인 정보를 한데 모아 하나의 검로로 짜낸 것. 그게 파이론류 양손 검술 1식, 십류귀해(十流歸海)였다. 낭비가 없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이다. 그런 믿음이 담긴 내 검이 느리지만 동시에 빠르다는, 모순된 속도로 쏘아지고, 이어서 레온의 검이 수십 자루로 늘어났다. 채애애애앵! 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다음 말했다. “한 번을 안 당해주시네요.” “그 어느 상황에서도 스승은 패배하지 않는 게 효과적이거든요. 교육적으로요.” “맞긴 해요.” 노아를 가르치고, 마법학교의 강사 일까지 해서 그런가. 레온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됐다. 사람은 사람의 말을 절대 듣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말만 믿는 게 사람이었다. 이건 인성의 문제도 아니고, 성격의 문제도 아니고, 본성의 문제도 아니었다. 인간의 설계가 그렇게 된 게 원인이었는데, 때문에 종족 자체가 독선적인 인간을 가르치려면 둘 중 하나가 필수였다. 압도적인 신뢰. 혹은 압도적인 권위. 그리고 둘 중 어느 노선이든 제자에게 패배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신뢰를 유지하든 권위를 유지하든 하는 것이다. “근데 레온 님이랑 저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잖아요. 굳이 그리 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시선을 조금만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볼 거 다 봤잖아요.” “그러니까, 시선을 올려서 말하라고요. 저는 그런 어설픈 검에 당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두고 봐요.” 꼭 복수하고 말 테야. 나는 검을 들고 마법을 발동했다. 푸른색 마법이 일렁이며 검에 덧씌워진다. 무사히 청야(淸夜)를 소환한 나는 손 뼘을 펴 청야의 길이를 쟀다. 본래 단검 길이였던 청야가 이제는 롱소드를 거의 덮을 만큼 컸다. 연단 마법에 자질이 없으니 때려치우라던 켈튼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질이 없다고 때려치우는 건 잘못된 행동이다. 날 봐라. 운 좋게 을 얻어 마법을 무럭무럭 성장시키지 않았나? 그러니 모두 운이 좋길 바라며 인생 한 방을 노리는 게 올발랐다. 아니라고? 아님 말고. 나는 청야를 쓰다듬었다. 현재 내 연단 마법의 단기 목표는 1차 각성이었다. 연단 마법의 1차 각성은 신체 강화였는데, 이 신체 강화는 굉장히 중요했다. 오죽했으면 신체 강화에 도달하지 못한 기사는 가짜, 도달한 기사는 진짜라 부르는 풍토가 생겼겠는가. 신체 강화를 발동하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됐다. 일반적인 인간이 내지 못하는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신체 강화에 도달해야만 초인들의 세계에서 꿀리지 않고 싸우는 게 가능했는데, 이 부분도 중요했지만 신체 강화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건 다른 이유도 컸다. 바로 영구적인 신체 강화였다. 한 번이라도 1차 각성을 써본 기사는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대폭 향상된다. 도저히 인간의 육체라고 믿기지 않게 바뀌는데, 이 강화의 폭은 경지가 올라갈수록 커졌다. 3차 각성쯤 가면 순수한 맨몸으로 성벽도 부순다는데, 그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여태까지 본 적이 없어서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신체 강화, 반드시 할 거야. 반드시. “신체 강화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뭡니까.” “신체가 영구적으로 강화되면, 벌꿀주를 더 마실 수 있잖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거일 줄 알았습니다.” “역시 제 마음을 잘 아시네요.” 물론 지금도 나는 벌꿀주를 많이 마신다. 식사도 많이 한다. 다른 사람보다 하루 섭취량이 몇 배는 많았으니까.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력 짜내기 수련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만큼 먹지 않으면 체력이 버티지 못하니 음식을 대량 섭취하는 거지, 내 신체가 초인적인 게 아닌 것이다. 그런고로 초인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를 상상하면 즐거웠다. 지금도 이런데 초인의 경지에 도달하면 얼마나 많이 마실 수 있을까. 궁금하다 궁금해. “이쯤 할까요.” “알겠습니다.” 검술 수련은 적당히. 마법 수련은 영혼을 담아서. 내 모토였다. 검술 수련의 목적이 연단 마법의 성장인 만큼 검술 수련 또한 일종의 마법 수련이었지만, 청야만 신경 쓰면 다른 마법이 삐지니까.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 공평하게 키워줄게. 그러니 안심하렴. 나는 검을 집어넣으며 레온에게 물었다. “특별한 이슈는 없나요?” “교국의 학생 신도들과 공화국의 학생들이 크게 시비가 붙었는데, 이런 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하죠.” 내가 원하는 건 마법적으로 특별한 이슈였다. 그나저나 또 시비가 붙었어? 아무리 공화국이 수백 년 전에 인류를 배신하고 악신에게 붙은 전적이 있다지만, 그걸로 언제까지 괴롭힐 거야. “범인은 알리스 님인가요?” “아니요. 다른 학생 신도들입니다. 알리스 신도는 오히려 다른 학생 신도들을 말렸습니다.” 얼마 전 공화국 학생에게 시비를 걸다가, 내 명예 추기경 배지에 고개를 조아린 알리스가 범인이 아니라니. 오히려 학생들을 말렸다니. 굉장히 의외였다. 그건가? 내가 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걸 기억하고 실천하는 건가? 내가 알리스는 싹수가 파랗다고 했지. 애가 참 예의가 발라. 마음에 들었어. 별개로 나는 레온을 토닥였다. “골치 아프겠네요.” “타국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도 좋은 행동은 아니니까요. 주의는 계속 주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나는 손을 꽉 쥐고 레온을 응원했다. 그때였다. “루이나 강사님.”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최근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프린드였다. 프린드는 내 뒤에 선 레온을 아주 잠깐 봤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뱉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요.” “특별 활동 관련으로 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특별 활동은 어쩔 수 없지. “레온 님. 바쁜 관계로 이쯤하고 가볼게요. 다음에는 꼭 콕콕 찔러줄 테니 기대하세요.” “다음에 그런 말을 할 때는, 대련이라고 명확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고요.” 나는 레온을 뒤로한 채 프린드를 뒤따라갔다. “루이나 님. 큰일 났어.” “추가 투자금은 사업 굴러가는 거 확인하고 줄게요.” “루이나 님이 최고야.” 그런 내 옆에 어느샌가 등장한 크리스가 따라붙었다. 나는 크리스와 함께 마법학교를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그래서. 프린드 쟤는 왜 레온을 묘한 표정으로 본거지? 흠. 하긴. 레온이 용병(남자)도 홀리는 마성의 남자긴 해. 레온 얼굴은 이거이거. * 기숙사로 돌아온 프린드는 낡아빠진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직 룸메이트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 낡고 조그마한 기숙사 방은 오로지 프린드의 차지였다. 언제 무너져도 안 이상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프린드는 조금 전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레온. 성배를 되찾아와, 최근 교국의 팔라딘이 된 인물. 비록 아직 실력이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레온이 팔라딘이 되는데 불만을 품지는 않을 거였다. 정확히는 불만을 품은 사람이 꽤 많겠지만, 그 누구도 티를 내지는 않을 거였다. 그만큼 교국의 상징을 되찾아 온 업적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건 프린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배를 되찾아 온 건, 프린드의 입장에서도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뭘까.’ 프린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성배는 프린드도 찾아다니던 물건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성배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었는데, 누가 선수를 쳐서 성배를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그게 싫지는 않았다. 성배가 교국의 손에 돌아간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다만 이상하긴 했다. 레온.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본적 없는 얼굴이다. 그런 사람이 떡하니 교국의 12번째 검이 된 게, 매우 기묘한 프린드였다. ‘게다가 그 인간….’ 조금 전 슬쩍 등장했던 분홍 머리의 상인, 크리스. 이번엔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 또한 기묘한 프린드였다. 그녀가 자신이 알던 사람과,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그럼 혹시 진짜 다른 사람인 거 아니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만 답하겠다. 이건 물리적으로 헷갈리는 게 불가능한 안건이었다. ‘뭘까.’ 이것은 비단 이번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프린드는 요즘 매번 이런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제국의 내전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압됐을 때부터, 계속 그랬다. 즉. 이번 사태의 원인은 생각보다 명확했다. 프린드는 최근 조심히 관찰하는 인간의 이름을 떠올렸다. 루이나 엘피니엘. 현 황제를 구하고, 제국이 반으로 나뉘는 걸 막은 마법사. 사람들은 모르지만 루이나가 한 일은 생각보다 더 엄청났다. 루이나가 아니었다면 제국은 반으로 나뉘고, 몇 년간 내전 상태에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프린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제국이 내전 상태에 들어가, 제국을 좀먹는 쭉정이들이 자연스럽게 처리되는 것도 좋았을 텐데. 사람은 고통에서만 성장한다. 내전이 사라져 제국의 전력이 보존된 건 분명 장점이었으나,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성장의 기회를 잃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런 만큼 살아난 인재도 많았으니 일장일단이 있었지만, 하여간 덕분에 계획이 살짝 꼬인 건 맞았다. ‘어차피 앞으로 만날 적은, 전력 조금 보존한다고 처리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뭐, 말했듯 내전이 발생하지 않은 지금도 장점은 많아서. 지금 상황에 맞춰 다시 계획을 바꾸면 그만이긴 했다. 정말 내전이 중요했으면 프린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전이 되는 흐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별개로. 계속 이러면 곤란했지만. ‘누구야. 당신.’ 프린드는 루이나가 누군지 몰랐다. 아예 몰랐다. 알기 위해 강의 계획서가 굉장히 이상함에도 억지로 수강 신청을 넣었지만, 특별 활동을 핑계로 더 가까이서 관찰을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저런 인간은, 저번 시간대에는 없었으니까. ‘나비 효과인가.’ 프린드는 많은 일을 저질렀다. 프린드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고 살린 사람이 몇 명인가. 이런 일이 발생할 건 진작 예측한 바였다. 다행히 루이나는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제국의 내전을 막았고, 성배를 교국에 돌려줬으며, 악신의 교단과 맞서 싸웠다. 이런 인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너무나 환영이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선물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프린드는 손바닥을 폈다. 그 위에서 마법이 넘실거린다. 고유 마법, . 프린드를 지금의 시간대로 날려 보내준, 그러나 그 탓에 현재 대부분의 힘을 잃고 회복 중인 마법. 주먹을 쥐어 을 흩어낸 프린드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막는다. 지옥같은 풍경을 막는다. 오직 그걸 위해 프린드는, 시간을 넘어 과거로 돌아왔다. * “루이나 엘피니엘 남작님 맞습니까?” “맞는데, 무슨 일인가요.” 나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이었는데, 내 물음에 남자는 차분히 대답했다. “의뢰입니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