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의 낫이 빙글 돌며 벤트의 목을 노렸다. 굉장히 깔끔한 궤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벤트의 머리 또한 깔끔하게 땅에 떨어졌다. “응?” 리퍼가 당황했다. 가벼운 견제기에 벤트가 죽어버린 거다. 오만의 사제조차 이걸 예상하지는 못했다. “뭐야. 기세만 등등하고 일반인이나 다름없―.” 리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가 사라진 벤트의 몸이, 검을 휘둘러 리퍼를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카가가강! 낫과 검이 부딪히며 불똥이 튄다. 리퍼는 목 없는 벤트의 모습에 유쾌하게 웃었다. “목 없는 기사랑 싸우는 건 오랜만이, 군” 리퍼가 낫을 힘껏 휘둘러 벤트를 밀어냈다. 뒤로 세 걸음 물러난 벤트가 몸을 바로 세운다. 그리고 시간이 역행하듯, 벤트의 머리가 되돌아와 목과 합체했다. 리퍼는 휘파람을 불고 워커에게 말했다. “저거 정말 분노의 머저리들이 잃어버린 성검 맞나?” “으아아아아!” 벤트가 분노를 터트리며 힘껏 검을 휘둘렀다. 직후, 검붉은 검기가 터져 나왔다. 반원 형태의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지고, 리퍼와 워커는 신성력을 끌어올려 검기를 막아냈다. 허나 그들이 막아낸 건 딱 자신에게 닿은 검기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대로 숲을 훑고 지나갔다. 구구궁. 나무가 쓰러진다. 그 광경을 흘긋 살핀 리퍼는, 워커에게 물었다. “분노를 먹어 치우는 꼴을 보면, 확실히 분노의 머저리들이 잃어버린 성검은 맞는 듯한데. 워커 네가 보기엔 어떻지?” “나도 동의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그거다. 언제부터 분노의 성검에 불사의 기능이 달렸지?” “내 말이 그거다.” 리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노의 성검은 놀라운 무기였다. 사용자의 분노를 힘으로 치환하는 검이었으니까. 마음속에 커다란 분노를 가진 분노의 사제들이 저 검을 쓴다면 고위 마법사와 필적하는 위력이 나왔는데, 별개로 지금 저 검의 퍼포먼스는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온몸에 돋은 검은 선. 저건 뭐 마검을 쓴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 분노의 성검에 저런 리스크가 생겼단 말인가. 두 번째로 느껴지지 않는 신성력. 분노를 제련해 만든 성검은 분노의 신의 신성력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분노를 먹어치워 검기를 날릴 때조차도. 마치, 이상한 게 덧씌워진 듯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인데. 리퍼는 낫을 휙휙 돌리며 말을 뱉었다. “머저리들의 성검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기능이 없을 텐데, 넌 대체 뭘 가지고 있는 거냐. 미치광이.” 리퍼의 질문에 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굳게 쥐고 자세를 잡았다. 직후, 벤트의 몸이 길게 늘어지며 리퍼에게 날아갔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벤트의 다리가 박살 났지만, 괜찮았다. 바로 시간이 되돌아가듯 치료됐으니까. 벤트의 팔이 크게 부푼다. 그러고 그 힘 그대로 리퍼를 후려쳤다. 굉장히 위력적이었으나, 결국 일반인의 검술이었다. 그런 허점투성이의 검에 당해주기엔 리퍼의 경험이 너무 많았다. 리퍼는 낫을 지지대 삼아 상대의 공격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흘리고, 그대로 벤트의 팔을 잘랐다. 동시에 벤트의 팔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번에도 리퍼는 옆으로 한 발 움직이며 벤트의 목을 베었다. 동시에 머리가 없는 벤트의 몸이 검을 휘둘렀다. 계속되는 전투에 리퍼는 혀를 찼다. “끝이 없군.” 기본적인 무기술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았다. 상대의 공격을 흘리며,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 이게 모든 무기술의 근본이자 핵심이었다. 그래서 리퍼도 이러한 법칙에 의거해 벤트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벤트는 모든 부상이 1초 만에 회복되는 괴물. 치명상을 입힌다는 무기술의 전제부터 무너져버렸다. 이 괴물을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리퍼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에 든 낫을 땅에 버리며 오른손을 들었다. 검은색 빛기둥이 리퍼에게 꽂힌다. 낫 형태의 성물을 ‘강림’시킨 리퍼는, 낫을 위협적으로 돌리며 벤트에게 소리쳤다.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볼까!” 푸슈―! 낫의 뒤에서 연기가 뿜어진다. 이어서 폭발한다. 낫의 뒤에서 일어난 폭발이 추진력을 일으키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리퍼는 공간을 접듯 벤트의 팔을 베어버렸다. 여태까지와 똑같은 전개였으나, 리퍼는 유심히 벤트의 팔을 살폈다. 이번에도 벤트의 팔이 시간을 역행하듯 회복된다. 다만 그 시간이 현저히 느렸다. 정답인가. 리퍼는 낫을 어깨에 기대며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마법도 베어 죽이는 낫이다. 네가 어떤 괴상한 힘을 손에 넣었건, 이 낫에 베이면 멀쩡하지 못해.” “…….” 벤트의 눈이 가라앉는다. 진정된 걸까? 그게 아니라는 건 오만의 사제인 리퍼가 제일 잘 알았다. 저건 응축된 분노였다. 뇌까지 침투했던 분노가 오직 심장에 머물게 됐기에 냉정해진 거지, 절대 진정된 게 아니었다. 그 깔끔한 분노 제어에 리퍼는 나직이 감탄하며 입술을 뗐다. “이봐. 그만 싸우는 게 어때?” “리퍼.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의 임무는 분노의 성검 수색 및 회수였을 텐데?” “분노의 머저리들이 불쌍해서 아량을 베풀어준 거지, 딱히 우리가 놈들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잘 봐. 저 녀석, 자질이 있어.” 리퍼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밉지 않나? 이 세상이 잘못됐다고 느끼지 않나? 그렇다면 우리 윤회교에 합류해라. 네가 원하는 법칙으로 세상을 다시 세우는 거다!” “여동생은 절대 넘기지 않아. 이 더러운 귀족의 하수인아!” 검붉은 검기가 흡사 채찍처럼 모든 걸 짓누른다. 그걸 줄넘기하듯 피하며 리퍼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워커가 웃는다. “미치광이를 말로 설득하려 하다니.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닥쳐라 워커. 쯧. 어쩔 수 없나. 우선 성검을 빼앗고, 그 뒤에 설득해야겠어.” “너답지 않게 지극 정성이군.” “저만한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줄 아나? 윤회교가 강해지면 우리의 목표 또한 이루기 쉬워진다. 그만 구경하고 도와라 워커.” “알겠어.” 번쩍. 검은색 빛기둥이 워커에게 꽂힌다. 권갑 형태의 레플리카 성물을 강림시킨 워커는 리퍼와 함께 벤트를 압박했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 벤트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게 전부 힘이 부족한 탓이다. 만일 힘이 충분했어도, 이렇게 핍박받았을까? 힘이 필요했다. 더 강력한 힘이. 왜냐하면…. 생각을 이어가다 말고 벤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순간 벤트는 뇌를 꺼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니, 답답해 죽을 거 같았다. 왜 내가 힘을 추구했더라? 왜였지? 여…동생 때문이었지. 그래. 빠르게 납득한 벤트는 눈앞의 적들을 살폈다. “저 녀○, 우리 ○을 알아○긴, ―――그만 포기하고 여자를 넘겨라. 백작님이 기다린다.” “봤○아. 못 알○듣는 ○, 얌전히 제○, ―――꼴에 남자라고 너도 그 여자가 아깝구나? 웃긴 녀석이네.” “닥쳐!” 벤트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그런 벤트에게 누군가 속삭인다. [힘을 원하나?] 원해. [대가는?] 대가? 그건 뭐든 가져가. 뭐든, 가져가라고―! [알겠다.] 끼익. 무언가 기우는 소리가 난다. 이어서. 검에서 시작된 검은 선들이, 벤트의 몸에 꽂혔다. “지랄 났군.” 벤트의 몸이 부푼다. 벤트의 몸이 변형된다. 점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모습으로 말이다. [전부, 전부, 죽여버릴 거야―!] 이제는 성대가 아닌 이상한 기관으로 말을 하는 벤트의 손에서, 검붉은 빛이 쏘아진다. 다급히 공격을 피하며 워커가 말했다. “이래서 미친놈들을 상대하면 안 된다니까. 어쩔 거야?” “흠.” 리퍼는 벤트를 분석했다. 그 후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저게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모르겠다는 것도 정보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세상에 등장했다는 정보를 교단에 전해야 될 거 같군.” “확인했어.” “하지만 그 전에.” 리퍼는 신성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자세를 낮췄다. “성검은 회수해야지.” “알겠어.” 리퍼를 따라 워커 또한 신성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분노한 벤트가 힘을 모은다. 그에 맞춰 리퍼와 워커는 틈을 노렸다.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일인가요.” 거대한 나무 거인이, 묵직한 발걸음으로 끼어들었다. 리퍼와 워커는 전투태세를 풀며 나무 거인의 어깨를 살폈다. 나무 거인의 어깨 위에선 웬 여자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는데, 그 깨끗한 얼굴에 리퍼는 탄식을 뱉었다. “이제 저 미치광이를 구별할 방법이 언동밖에 없겠군.” “리퍼. 방금 내가 미친놈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동의한다. 이대로 물러나자.” 리퍼와 워커는 그대로 신성력으로 다리를 감싸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법사, 루이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이건 또 무슨 일이냐고 했을 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요.” * 탐색엔 자신이 없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세상이 떠나가도록 폭발을 자꾸 터트리는데, 이걸 찾지 못 하면 그건 청각에 이상이 있는 거였다. 나는 눈앞의 살덩어리를 바라봤다. 저게 벤트인 거 같은데, 음. 나는 벤트에게서 느껴지는, 정확히는 벤트의 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입맛을 다셨다. ‘―――!’ 내 몸속 탐 원소가 울부짖는다. 나는 등불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오빠(아님)가 남겨준(아님) 마법이 여기에 있었구나? 역시 가족(아님)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