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망가셨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레온은 멋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당연히 잘 지냈죠. 저희 헤어진 지 한 달도 안 지났어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어요.” 더 추궁하면 레온이 우유에 코를 박고 죽을 거 같았기에 자제했다. “그러게 왜 그런 아련한 작별 인사를 했어요.” “안 아련했습니다.” “네? ‘언젠가, 또 만나기를’이 안 아련하면 세상 모든 말이 안 아련한데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어요.” 루프를 시작한 레온. 나는 이번에야말로 자제하고 궁금한 걸 질문했다. “마법학교엔 왜 왔나요. 교국에 계속 머무는 거 아니었나요?” “그건―.” 레온은 자신이 마법학교에 온 이유를 전부 설명했다. 나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송이 팔라딘이 처치 곤란이니, 마법학교에 일단 수납한 거군요.” “그렇게도 볼 수 있죠.” 흠. 정치적인 이득을 보기 위해 마법학교에 레온을 파견 보냈다는데, 나는 그게 살짝 의문이었다. 마법학교에 팔라딘을 파견 보내 얻을 정치적 이점이 뭐가 있지? 이건 교국과 제국이 최근 무슨 마찰을 빚었는지 알아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선 망상만 가능할 뿐, 추측은 불가능했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마법학교가 제국과 교국에게 중요한 위치로 급부상했다는 망상인데, 마법학교는 원래 온 대륙의 유학생이 찾아와 중요한 곳 아니었나? 잘 모르겠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는 마법만 열심히 갈고닦으면 되니까. “어라? 레온 님이잖아.” “크리스 님. 오래간만입니다.” 지나가던 크리스가 레온을 발견하고 놀라며 다가왔다.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간만? 우리 헤어진 지 한 달도 안 되지 않았어?” “한 달은 넘었습니다.” “근데 레온 님. 헤어질 때 분명 세상 무너지는 목소리로,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당신들과 모험을―’이라고 했었잖아. 이렇게 바로 만날 거면 그건 왜 한 거야.” “그런 적 없습니다.” 레온이 단호히 대답하자, 크리스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루이나 님? 나만 저렇게 들었어?” “저도 들었어요.” “봐봐 레온 님. 루이나 님도 들었다잖아.” “하아.” 레온이 길게 한숨을 쉰다. 나는 크리스와 손을 부딪쳤다. “루이나 님. 레온 님이 항복했어. 우리의 승리야.” “제가 레온 님은 금방 쓰러트린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우리가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돌자, 레온이 평온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마법학교는.” “나쁘지 않았어요.” 마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기도 하고, 강의 견학도 해본 다음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여기 생각보다 더 괜찮다. 옛 격언에 ‘스승 또한 제자에게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가르치는 사람 또한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는 뜻인데, 내가 지금 딱 그랬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가르쳐보니 머리가 간질거렸다. 못 참겠다. 나는 크리스와 레온에게 말했다. “저는 마법 수련하러 갈게요. 찾지 말아 주세요.” “루이나 님! 알았으니까 투자금 주고 가―.” “그럼 이만.”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엘피니엘 남작님. 일찍 오셨군요.” 테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사용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메이드복이 팔랑인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할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테리를 지나쳐 지하실로 향했다. 내가 배정받은 저택엔 무려 지하실이 존재했다. 보통 지하실은 창고로 사용됐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일반인들의 얘기고. 마법사에게 지하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용도였다. 공방. 수많은 마법을 갈고 닦는, 마법사의 아지트. 화륵. 등불 안의 불꽃이 공방을 밝힌다. 나는 적영(寂影)에 등불을 걸고 공방 안을 훑었다. 이 꽉 막힌 폐쇄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나만의 공방을 갖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켈튼과 함께 지낼 때도 그건 내 공방이 아니라 켈튼의 공방이었으니까. 켈튼이 부활 대기 상태가 된 후로는 떠돌아다니느라 공방을 만들 여력이 안 됐으니, 이번이 유일하게 공방을 만들 기회였다 할 수 있겠다. 나는 작업대에 올려진 금속을 매만지다가, 연금 마법을 발동했다. 철이 ‘변화’하며 흐른다. 나는 거기에 ‘연결’의 특징을 부여하고 여러 금속을 더해 합쳤다. 그다음 합금을 잘 주물러 반지의 형태로 가공하고, 보석을 박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투명한 보석 안에 ‘포식’의 특징을 부여해 불꽃을 삼키게 했다. 완성. 나는 새로 만든 마도구를 요리조리 둘러봤다. 투명한 보석 안에서 불꽃이 나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친다. 나는 반지를 꼈다. 새로 만든 마도구의 성능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으음. 잘 모르겠다. 이건 일종의 보온 마도구였는데, 이미 내가 더위와 추위를 느끼지 않는 4위계 화염 마법사라. 마도구가 잘못 만들어져서 아무 변화가 없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구별이 안 됐다. 나는 반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제리는 고위 화염 마법사라 나랑 똑같고, 레온도 신성력을 각성했으니 마찬가지였으며, 노아는 어리고 뮤란은 그냥 주기 싫으니까. 크리스에게 줘서 실험해야겠다. ……아니다. 크리스한테 이걸 주면 팔아먹겠구나. 뮤란이나 주자. 마도구 성능 점검은 뮤란이 제일 잘해주겠지. 하루에 한 번씩 하는 연금 마법 수련이 끝났으니 다음은 얘였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에 푸른색 마법이 깃든다. “비춰라. 청야(靑夜).” 청야는 롱소드를 반 이상 뒤덮었는데, 고작 단검 길이였던 예전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이상 자랐다.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청야를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레온도 있으니 마법 연습 다 끝나고 검술 대련이나 해달라고 해야지. 나는 청야를 지운 후 검을 집어넣었다. 연금 마법과 연단 마법 훈련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마법 수련. 나는 적영을 조종해 등불을 내 앞 허공에 띄웠다. 성은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등불 안에서 불꽃이 조용히 일렁거린다. 내가 타고난 원소는 화염이다. 화염은 내 근본이었으며, 기반이었다. 따라서 어떤 마법을 익히든 내 기둥은 화염 원소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렇기에 지금은 다른 걸 신경 써야 됐다. 기둥이 될 화염 원소가 무려 4위계까지 성장했으니까. 나는 허공에 물을 생성했다. 액체 상태인 물은 형태 없이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물 원소에서 발견한 특징도 ‘변화’였다. 변화. 변화라. 나는 물을 밧줄 형태로 만들어 휘둘렀다. 촤라락! 물 밧줄이 근처에 놓인 허수아비를 제압하고,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 변화라는 특징은 쉽게 말해 물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특징이었다. 그래서 물 밧줄 같은 게 성립하는 거였다. 일반 상식으로는 물로 밧줄을 만들어봤자 그 무엇도 구속하지 못했으나, 이건 마법. 물 원소 또한 일반적인 물이 아니었다. 물론 방금 쓴 물 밧줄 마법은 예전에 으로 거래해서 가져온 거지만, 아마 그 사람도 물 원소에서 ‘변화’와 비슷한 특징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는 물 원소를 조금 가지고 놀다가, 지웠다. 당장 물 원소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적어도 2위계는 돼야 쓸만한 발상이 떠오를 것이었다. 다음은 바람 원소다. 나는 끈적한 바람을 손위에서 주물렀다. 그래도 바람의 원소는 1위계부터 쓸모가 있어서, 이걸로 마법 하나를 만들긴 했다. 마법 도시 아르기넬의 마법사 결투 클럽에서 써먹었던 화염 그물 마법이 그거였다. 아무래도 ‘변화’의 특징보다는 ‘연결’의 특징이 범용성이 더 좋은 듯했다. 뭐, 연결은 다른 마법과 응용해야 됐기에 단일로는 변화가 더 좋았지만, 어차피 나는 여러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는 대마법사(예정). 내게는 바람의 원소가 더 쓸모가 많았다. 연결, 연결이라. 나는 문득 적영을 살폈다. 따지고 보면 적영도 나랑 연결이 된 상태였다. 내 의지에 따라 반응하니까. 제국제일검 발리온 드라고밀의 제자, 헤이즈의 특기 마법 적영. 저걸 얻은 지도 꽤 됐다. 적영 덕에 여태 편했다. 강조는 안 했지만, 등불을 직접 안 들고 다녀도 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적영은 일종의 인공자아를 만드는 마법이었다. 스스로 판단해, 스스로 움직이는 바람의 구체를 만드는 마법. 때문에 나는 적영을 한 번 발동하면 아예 신경을 안 써도 됐다. 마력만 대주면 적영이 알아서 움직이기에 그야말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손이 하나 더 생긴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런 비슷한 마법이 내게는 하나 더 있었다. 고유 마법 . 도 비슷했다. 한 번 소환하면 그 뒤로는 마력만 대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물론 적영과 다르게 은 자동화의 레벨이 낮다고 해야 되나. 정교하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편한 건 맞았다. 만약 자동화 기능이 없었다면 소환물을 하나하나 직접 컨트롤해야 됐을 텐데, 상상만 해도 별로였다. 피곤해서 마법을 어떻게 써 그러면. 지금대로만 갑시다. 나는 나무 병사를 소환했다. 나무 병사의 주위를 적영이 빙빙 돈다. 그에 따라 등불이 나무 병사를 다양한 각도로 비춘다. 적영, 연결, 나무 병사, 적영, 연결, 나무 병사, 적영, 연결, 나무 병사, 적영, 연결, 나무 병사…. ……. 순간, 머릿속에서 펑 하고 폭발이 인다. 연결이라는 게 꼭 물리적으로 접촉해야만 연결이 아니었다. 마음의 연결도 연결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바람의 원소를 뒤로한 채―. 적영을 손으로 붙잡았다. “……???” 적영이 몸을 부르르 떤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도 좋았다. 나는 그대로 적영을 나무 병사에 쑤셔 넣었다. 직후. 나무 병사와 내가 ‘동조’한다. 눈을 감자, 시야가 바뀐다. 나는 시야에 들어온 ‘눈을 감은 은발의 미소녀’를 훑다가, 눈을 떴다. “……!” 적영이 나무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나는 박수를 쳤다. 원격으로 제어 가능한 나무 몸체(자동 운행 기능 있음) 제작. 대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