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다양했다. 지식?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식이 많으면 더 넓은 시야와 지혜를 갖게 되니까. 친구?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인이 아니라 친구. 이건 굉장히 중요한 구분법이었다. 하여간 친구가 많으면 삶이 풍요로워졌다. 시간? 기억? 기회? 돈? 전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신분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어떤 감투든 일단 쓰면 언젠가 써먹을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교국이 명예 추기경 자리를 준다고 했을 때 냉큼 받은 거였다. 받아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실제로 봐라. 벌써 사용처가 생기지 않았는가? 역시 감투가 최고야. 귀족 만세. 명예 추기경 만세. 제국의 귀족이 교국의 추기경을 겸임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교국은 나라지만 결국 종교의 성향이 강해서. 하물며 명예직이라면 더욱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혈기 왕성한 교국의 젊은이, 알리스를 돌려보낸 나는 마법학교 밖으로 나왔다. 마법학교는 초대 황제에게서 시작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 이게 성능이 너무 좋아. 나도 검으로만 몸 비틀다가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연단 마법 만든 거 아니야.’ ‘폐하. 제발 체통을 지켜주시옵소서.’ ‘마법사 육성해라. 학교라도 만드는 게 어때?’ 제국의 역사와 마법학교의 역사는 동일하다.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명맥이 이어졌기에 현 대륙에서 마법학교 라피엘보다 오래된 나라는 제국과 요정족의 나라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긴 세월이 지나며 때때로 아예 무너지고 재건되는 과정을 몇 번이고 겪었으나, 별개로 마법학교의 명성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재건 과정에서 ‘차세대 구원자’를 육성한다는 명분이 옅어지고, ‘인류의 미래’를 육성한다는 방침이 강화되며 전 세계의 귀족과 왕족이 몰려오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덕분에 인기 자체는 지금이 더 많았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 됐던 과거보다는 말랑말랑하게 인맥 관리를 하는 지금이 귀족과 왕족 입장에서는 훨씬 좋았으니까. 다만 그런 만큼 정말 강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마탑으로 몰렸으나, 그래도 명색이 초대 황제의 유지가 깃든 교육 기관이라. 아직 상당히 퀄리티 좋은 교육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법학교의 강사님이라고요?” 가구점의 주인이 깜짝 놀란다. 나는 어깨를 폈다. 아무리 시간 강사가 비정규직에 언제 잘려도 안 이상한 위치라지만, 그건 시간 강사의 입장이었고. 일반인의 입장에서 마법학교 강사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구를 적당히 구매해 에 집어넣고 맥주 상인에게 갔다. “매주 벌꿀주 몇 통이 배달되는 걸 원하신다고요?” “30통이요.” “30통이라. 흠. 사용인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아도 30통은 살짝 과할 거 같은데 말이죠. 사용인이 정확히 몇 명이십니까?” “저 혼자인데요?” “……?” 벌꿀주는 매주 소형 오크통을 기준으로 30통씩 배달받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집안일을 대신 해줄 사용인을 고용하는 거였는데, 사용인 쪽은 행정실의 도움을 받았다. 보안 문제로 사용인 같은 외부인은 지정된 업체에서만 고용해야 되는 듯했으니까. 이렇게 보안이 철저한데 왜 크리스는 그냥 들여보내 줬던 거지. 아무래도 아까 그 일은 마법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크리스의 혓바닥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입을 놀렸기에 마법학교의 보안을 돌파한 건지 궁금해졌다. 내가 고용한 사용인은 단아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이름은 테리. 몸값이 남들과 비교해 살짝 더 비쌌지만, 요리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설명에 망설임 없이 돈을 지불했다. “엘피니엘 남작님.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제 처음 보는 사람은 나를 엘피니엘 남작이라고 부르는구나. 나는 굳이 테리에게 ‘편하게 루이나 님이라 부르세요’라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남을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처럼, 남도 나를 아무렇게 부를 권리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테리 입장에서는 저게 편할지도 몰랐다. 나야 크게 신경 안 쓰지만, 평민 입장에서 귀족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귀족이 평민 보고 자신을 편하게 부르라고 지시한다? 평민 입장에선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위장에 구멍이 뚫릴지도 몰랐다. 나는 테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에 테리가 고개를 숙였다. “혹여나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신지.” “혹시 사람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마법을 보유하셨나요?” “저는 비마법사입니다. 남작님.” “아니면 사람을 가상세계에 봉인하는 성법을 보유했나요?” “저는 신성력을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남작님.” 이제 덕에 뒤통수를 맞아도 대처가 됐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을 처음 만나면 의심병부터 도졌다. 이 세계의 마법은 특수 능력의 성능이 지나치게 좋아서.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맞아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다음엔 감지 관련 마법을 얻어야 되나.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의심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뭐, 테리는 나쁜 사람이 아닐 거 같긴 했다. 어떻게 아냐고? 관상이 그래. 저택 옆에 딸린 사용인 전용 숙소에 테리가 짐을 푸는 사이, 나는 마법학교를 거닐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가. 마법학교의 내부는 한산했다. 슬슬 본가로 귀향했던 학생들이 돌아오는 시기라 아예 텅 비진 않았지만, 생기가 덜하다고 해야 되나. 밝고 희망찬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좋긴 하지만. 나는 사람이 많으면 기가 빨린다. 인간 설계 자체가 그렇게 됐다. 그런 녀석이 수십 명이 넘는 학생 앞에서 수업을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싫어하는 건 무질서한 대중이라고만 답하겠다. 학습이라는 일관된 목표로 모여 있다면 100명이든 1000명이든 기가 안 빨렸다. 외워두도록. 나는 학교를 구경하기로 했다. 차차 알아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학교 부지는 굉장히 넓었다. 도시 몇 개를 합친 듯한 크기였는데, 공원 형식의 휴식 공간을 가로지른 나는 울창한 숲 앞에 멈춰 섰다. 여기는…. “마법학교에 항상 등장하는 공간 중 하나! 금지된 숲이군요!” “딱히 금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얘기를 할 뿐이죠.” 그게 금지된 거 아니야? 나는 태연히 헛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푸른색 눈동자가 빛나고, 푸른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남자가 말했다. “이번에 새로 오신 분이신가 봅니다?” “루이나 엘피니엘이에요.” “루이나 엘피니엘.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한 마법사가 이번에 남작이 됐다고 했죠.” “그게 저예요.” “이거 참. 대단하신 분이 왔군요. 저는 크로닐 테리스입니다. 준교수죠.” 크로닐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크로닐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마주 잡았다. 그다음 마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자, 크로닐이 말을 이었다. “같이 열심히 합시다.” “네.”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크로닐을 살폈다. 크로닐은 실수로 기름을 퍼마신 것처럼 웃었는데, 그 느끼한 표정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크로닐 얘가 사람들을 배신하고 마법학교를 테러해도 놀라지 않을 거 같네. 왜냐고? 관상이 그래 관상이. 가까이하지 말아야겠다.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같은 처지끼리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제가 시간이 나면 연락을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언제 나냐고? 나야 모르지. 그래도 언젠간 나지 않겠어? 나는 크로닐을 뒤로한 채 마법학교의 다른 시설을 구경했다. 연구동. 교수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 도서관. 공부에 미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 실습실. 다양한 마법을 실습하는 곳. 기숙사. 평민 기숙사, 귀족 기숙사, 왕족 기숙사로 구별이 돼 있었는데, 나는 평민 기숙사가 재밌어 보이더라. 훈련장. 훈련하는 곳. 온실. 각종 마법 재료를 기르는 곳. 마법 창고. 각종 마법 재료를 저장하는 곳. 그밖에 수많은 시설을 둘러본 나는 들뜬 마음으로 훈련장에 들어갔다. 훈련장의 시설은 다양했다. 원거리 마법을 연습하는 사격장이 있는가 하면 각종 훈련 시설이 군데군데 배치됐는데, 나는 그중 사격장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앙―. 가벼운 폭발이 인다. 사격장을 향해 마법을 발동한 금발의 미인이 심호흡을 하고, 그녀의 옆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다. “타시아 님. 날이 갈수록 마법 실력이 올라가시는 거 같아요.” “타시아 님. 이번 외부 활동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타시아 님. 저희 다 같이―.” 금발의 여자, 타시아는 추종자들의 말에 적당히 호응하며 마법을 재차 날렸다. 절제된 빛 원소의 마법이 표적지를 꿰뚫고, 깔끔한 결과에 타시아가 손을 털었다. 마력이 다 떨어진 듯했는데, 나는 훈련장을 떠나는 타시아에 눈을 깜빡였다. 쟤 걔잖아. 황도에서 만났던 체스 허접 황녀잖아. 왜 여기에 있지? 음. 왜 왔긴. 마법 배우러 왔겠지. 신경 끄고 학생이나 가르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