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미로는 어땠습니까?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오후 공원에서 만난 듯한 가벼운 태도였다. 레온 따위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어야 나올 수 있는 태도기도 했다. 본인이 주장하길 바이스는 탐욕의 세 번째 손가락이었다. 탐욕의 사도 밑의 열 개의 손가락 중 하나. 그건 바꾸어 말하면 최소 열 번째로 강한 사제라는 뜻이 됐다. 손가락의 숫자와 강함은 상관이 없었으니 바이스가 세 번째로 강한 사제는 아니었으나, 결국 탐욕의 손가락인 시점에서 절대 쉬운 상대는 될 수 없었다. 레온은 성검을 겨누며 바이스 뒤의 만화경을 살폈다. 거울과 거울을 마주 보게 한 듯 비슷한 장면이 수천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말 그대로 똑같은 게 아니라 비슷한 거라. 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마법적 지식이 부족했기에 레온은 바이스가 뭘 하려는지 정확히 알진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악신의 사제가 하는 짓이 정상일 리 없고, 그렇기에 레온이 할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저것도 어차피 바이스가 펼친 성법의 일종. 바이스를 죽이면 덧없이 사라질 현상에 불과했다. 레온은 바이스와의 거리를 재다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에서 시작된 별빛이 어두운 제단의 방을 밝힌다. 콰아앙! 바이스에게 적중한 별빛이 방을 흔들고, 흩어지는 별빛 안에서 바이스가 옅게 웃었다. “성물 강림이라. 분명 얼마 전까진 창세신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텐데요?” 바이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상처도 없었다. 그걸 넘어 옷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방어 성법이라도 사용한 건가? 아니면 다른 방법? 솟아오르는 의문에 레온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바이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바이스의 신성력으로 재현된 검은색 날붙이들이 레온을 노리고 쏘아진다. 레온은 성검을 빙글 돌리며 모든 성법을 쳐내고, 땅을 짓누르듯 밟으며 바이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화살처럼 날아가던 레온은 성검을 세웠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바이스는 결국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사제. 거리를 좁히면 레온이 급격히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이스의 코앞에 도달한 레온은 침착하게 성검을 휘둘렀다. 성검에 별빛이 모인다. 검날을 타고 흐르던 별빛이 이윽고 세상을 향해 해방되고, 새하얀 선이 모든 걸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레온은 이질감에 자리에 멈춰 섰다. 분명, 분명 레온은 바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나 결과는 아니었다. 레온이 벤 건 바이스가 아니라, 그 옆의 허공이었다. 레온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며 바이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방금 그 이질적인 감각. 이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현상. 확실했다. 방금 바이스가 사용한 그건 마법이었다. 그것도. “고유 마법.” 한 마법사가 평생에 걸쳐서라도 도달하고 싶은, 삶의 궤적 같은 마법. 고유 마법이었다. 레온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이스는 손가락으로 레온을 가리켰다. 쏟아지는 성법을 피하며 레온은 생각했다. 바이스는 레온의 공격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막아냈다. 바이스는 레온의 공격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비껴냈다. 무슨 마법이지? 저걸 파훼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속도 하나는 기가 막히군요.” 바이스는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투로 속삭이곤 레온을 재차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직후. 레온의 세상이, 뒤틀렸다. 분명 레온은 왼쪽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직후, 마치 세상을 오려 붙이기라도 한 듯 전조도 없이 오른쪽으로 달리게 되었다. 레온은 다급히 바이스의 성법을 막아내며 머리를 굴렸다. 몇 번 대치하니 알겠다. 바이스는 공간을 뒤트는 고유 마법을 가졌다. 아마 성검으로 날린 공격 또한 공간을 뒤틀어 막아냈겠지. 모든 수수께끼는 정체가 모호할 때 가장 위협적인 법이다. 이처럼 정체가 드러나면 그다음은 단지 문제 풀이의 대상일 뿐이었다. 공간을 뒤트는 고유 마법. 그걸 파훼하는 법은 간단했다. 저런 공간계 마법은 발동 범위가 한정적이기 마련이니까. 강한 만큼 이런저런 제약이 많고, 소모가 극심한 탓이었다. 따라서 공간계 마법은 보통 모든 곳을 막아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 공간계 마법을 공략하는 법은 하나였다. 전방위 동시 공격. 도출된 정답에 레온은 신성력으로 다리를 강화하고, 제단의 방을 가로질렀다. 신속의 영역에 돌입한 레온은 바이스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성검을 들었다. 레온은 느리지만 동시에 빠르게라는, 모순되는 검술을 펼쳤다. 성검이 잔상을 남기며 늘어난다. 수십 개로 나누어진 성검이 바이스를 감싼다. 그리고. 바이스를 사방에서 찔렀다. 모든 게 허초임과 동시에 실초인, 환의 묘리의 정수가 담긴 검술. 이거면 공간계 마법을 파훼하고 바이스를 쓰러트릴 것이었다. ―그럴 거라 믿었다. “발상이 재밌군요. 혹시 제가 공간을 왜곡시키는 줄 알았습니까?” 번쩍. 검은색 빛기둥이 바이스에게 꽂힌다. 신이 내려준 사슬이 레온을 후려치고, 레온은 피를 토하며 허공을 부웅 날았다. 바닥에 떨어진 레온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기꺼운지 바이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게 탐욕의 미로에서 계속 지냈으면 서로 좋지 않았습니까.” 뚜벅. 바이스가 레온에게 다가온다. 촤라락! 사슬이 레온에게 쏘아지고, 그걸 힘겹게 쳐내며 레온은 별빛을 날렸다. 허나 레온이 날린 별빛은 바이스가 서 있는 방향과 아예 반대편인, 어이없는 경로로 날아가 버렸다. 촤악! 성법이 레온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 레온은 어깨를 감쌀 생각도 못 하고 추가로 날아오는 성법을 간신히 막아냈다. 사슬이 뱀처럼 허공을 누비며 레온을 노린다. 그걸 발놀림으로 회피하려던 레온이었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공간이 뒤틀리며 모든 게 엉망이 된다. 기기긱! 성검과 신의 사슬이 부딪친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고, 진작 자세가 무너진 레온은 바닥에 넘어지며 사슬에 깔리고 말았다. 쿨럭. 입에서 피가 나온다. 레온은 사슬을 튕겨내며 몸을 굴렸다.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레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부터 신성력으로 몸의 회복을 시도하는 중이었으나, 그 속도가 굉장히 더뎠다. 아무래도 사슬에 상처 회복을 막는 능력이라도 붙은 모양이었다. 무력감. 거대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호기롭게 저를 찾아온 것치고는 영 성과가 없군요.” “…….” “저를 죽이고 동료를 구하기라도 할 생각이었습니까? 아쉽지만 그건 무리입니다.” 바이스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사슬이 뱀처럼 바이스의 주변에 똬리를 틀었다. 바이스가 말을 이었다. “운 좋게 창세신에게 성물을 하사받을 위치까지 간 듯하지만, 고작 그걸로 저를 이기기엔 부족합니다. 저는 이미 진작 성물을 하사받은 사제이며, 고유 마법까지 얻은 마법사니까요. 어느 정도의 차이가 벌어져 있는지 이해가 됩니까?” “…….” “저를 죽여서 동료를 구한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오만이었습니다. 당신은 동료가 탐욕의 미로에서 말라 죽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요.” 아직 레온은 많이 약했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탐욕의 미로는 사람의 욕망을 잡아먹는 세계. 직접 겪어봤으니 잘 알겠죠. 그 세계에 갇히면, 가진 욕망이 텅 비어 빈 껍데기가 될 때까지 빨아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레온은 자신에게 많은 실망을 했다. 고작 이 정도로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잘도 설쳤구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 당신의 동료가 어떤 꼴이 될지 상상이 되십니까? 어떤 끔찍한 몰골이 될지―.” “이봐.” 레온은 바이스의 말을 끊었다. 확실히 레온은 자신에게 실망했다. 했지만, 그런 상태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었다. 크나큰 실망을 하는 와중에도, 실망을 잃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이스의 말이 맞았다. 루이나를 구해야 된다니. 자신만이 루이나를 구할 수 있다니.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누가 누굴 구한다고 설쳐. 내가? 루이나를?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것만큼 웃기는 소리도 없었다. 알아서 잘할 인간을 구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니, 루이나가 알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놀릴 게 분명했다. 루이나는 반드시 이곳에 등장한다. 탐욕의 미로 따위는 홀로 찢어버리고, 당당하게 휙. 근거도 명확했다. “정신이 나가셨군요.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건.” “너는 마법사지?” 레온의 물음에 바이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습니다만.” “무려 고유 마법까지 얻었고.”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 바이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콰아아앙―. 순간, 충격이 성채 전체를 뒤흔들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바이스는 볼을 매만졌다. 대기의 온도가 약간이나마 올라갔다. 바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당신. 뭘 노리는 겁니까.” 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그런 건 의미 없었다. “뭘 노리는 거냐고 물었―.” 짤랑. 매우 익숙한 소리에, 레온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등장한 등불이, 정확히는 등불을 든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