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기물을 옮긴다. 중앙의 병사를 두 칸 앞으로. 그에 맞춰 건너편의 남자도 기물을 옮겼다. 가장 끝의 기물을 두 칸 앞으로. 이건. “칼리지 디펜스와 로얄 갬빗의 싸움이군요? 둘 다 지독하게 후반 지향형 오프닝이라 게임 시간이 길어지겠어요.” “이 아가씨 누군지 아는 사람?” “몰라 나도.” 서로의 기물을 잡아먹는 싸움이 이어지고, 끝내 결판이 났다. 승자는 로얄 갬빗을 사용한 건너편의 남자였다. “피렌츠도 졌어?” “이러면 우리 펍에서 도련님을 이길 사람이 없는데.” 피렌츠를 이긴 남자, 도련님은 가볍게 포도주를 홀짝이곤 말했다. “더 없습니까?” “덤빌만한 놈은 다 덤볐어.” “저는 똑같은 사람과 다시 붙어도 괜찮습니다.” 도련님의 말에도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실력 차가 커 흥이 안 돋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사람들의 반응에 도련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땡그랑. 맑은소리가 들린다.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고정된 가운데, 도련님이 입을 열었다. “저를 이기시는 분에게 이걸 주겠습니다.” “금화를 주겠다고? 제정신이야?” “보상이 있어야 사람은 진심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저도 다른 사람과의 내기로 얻은 돈이니 잃어도 미련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돌아갔다. 금화 1개. 그건 은화 100개와 동등한 가치였다. 이런 가벼운 내기로 얻기에는 상당히 많은 돈이었다. 가장 먼저 칼리지 디펜스로 승부를 걸었다 처참하게 요새가 부서진 수염남이 덤볐다. 허나 중반을 가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그다음으로는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로얄 갬빗을 사용하는 남자가 덤볐다. 이번엔 더 심하게 초반도 못 넘기고 패배했다. 그렇게 매지션 게임, 아도리안 디펜스, 클라클 나이츠 게임을 차근차근 박살 낸 도련님이 손가락을 들었다. “훈제 소시지를 추가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도련님의 말에 바텐더가 체스 테이블로 다가온다. 그리고 벌꿀주 5잔을 내려놨다. 도련님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가 주문한 건 훈제 소시지였을 텐데요?” “이건 제가 시킨 거예요.” 자리에 앉은 나는 벌꿀주를 하나 들어 식도에 부었다. 뇌가 떨릴 것 같은 시원함이 몸을 지배한다. 좀 살 거 같네. “저도 훈제 소시지 추가요!” “당신은?” “역대 최고의 아르카나 체스 플레이어예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보인다. 이 세계에서 가장 흔한 머리카락과 눈동자였다. 얼굴은 평범했는데, 정말 본인의 주장대로 시골 농가의 셋째 아들쯤 되는 외모였다. 내가 물었다. “이기면 금화 한 개죠?” “이길 수 있다면요.” 도련님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가, 체스판으로 향한다. 미동조차 없다. 이런 사람은 또 오랜만이었다. “아가씨. 얼굴은 왜 다 태워 먹었어.” 봐라. 이런 반응이 보통이란 말이다. “계약의 대가예요.” “무슨 대가. 악신이면 이단으로 잡혀간다?” “저는 늘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계약만 해요.” 적당히 대답한 나는 도련님 앞에 놓인 기물을 집어 내 앞에 정리했다. 그러자 도련님이 나를 빤히 본다. 뭐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러시나요?” “아닙니다.” 혹시 내 얼굴을 보고 뒤늦게 경악한 건가? 이거이거. 반응속도가 거북이보다 느리구만. 나는 검은색 기물을 예쁘게 정렬하고 도련님에게 말했다. “시작할까요?” 도련님이 가장 끝의 병사를 2칸 앞으로 옮겼다. 로얄 갬빗. 에 정답이 있다면 아마 그중 하나일 오프닝이었다. 가장 강한 기물인 ‘로얄나이트’를 가장 빠르게 진화시키는 오프닝이어서 그렇다. 나는 오른쪽 나이트를 중앙 쪽으로 이동시켰다. 도련님은 그에 맞춰 병사를 추가 전개했다. 변형조차 없는 오리지널 로얄 갬빗 오프닝이었다. 이러면…. 나는 왕 옆 칸에 위치한 병사를 앞으로 한 칸 움직였다. 구경꾼들이 웅성댔다. “올매지션 변형이다.” “저걸 한다고?” 올매지션 변형. 그건 에 존재하는 ‘마법사’라는 기물에 모든 걸 올인하는 오프닝이었다. 장점이 뚜렷하지만 단점도 뚜렷해서 잘 안 쓰는 오프닝이었다. 처음에 한정해 병사를 두 칸 움직일 수 있는 이점을 버리고 병사를 한 칸씩 이동해야 돼서 그런데, 그래서 올매지션 변형 오프닝은 진화를 거부한 고전 오프닝이라고도 불렸다. 내가 희귀한 오프닝을 꺼냈음에도 도련님의 플레이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석적이고 탄탄하게 전개를 이어간다. 그에 반해 나는 변칙적이고 즉흥적인 움직임을 이어갔다. 그 결과. “마법사를 대마법사로 궁극 진화하겠어요. 체크 메이트예요.” “누구랑 계약했나 했더니 체스의 신과 계약한 거였어?” “이 아가씨 진짜 미쳤구만.” 모두가 흥분에 차 환호성을 지른다. 거대한 성벽 같았던 도련님을 내가 끝없이 몰아치는 게릴라전으로 이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용사고 도련님이 마왕인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수비적인 플레이를 하래. 프로는 잘하는 건 기본이고 추가로 팬들을 즐겁게 해야 되는 거 몰라? “이 금화는 착한데 쓸게요.” 반짝이는 금화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이걸로 대충 새끼발톱 끝만큼의 치료비를 벌었다. 나는 기물을 정리하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음 분?” “한 판 더 하죠.” 내 말에 대답한 건 도련님이었다. 도련님은 겸손하게 흰색 기물을 정렬했는데, 그 모습이 매우 흐뭇했다. 나는 천장에 연기를 흘려보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흰색이 자신의 실력에 어울린다는 걸 눈치챘군요?” “……한 판 더 합시다.” “그렇게 해요. 다만.” 짤랑. 나는 금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심심하니 내기를 계속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제가 방금 얻은 금화 한 개를 걸겠어요.” “상관없습니다.” 도련님은 품에서 금화를 하나 더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흐으음. “시작하겠습니다.” 도련님의 플레이에 변화가 생겼다. 가장 끝의 병사가 아니라 왕 앞의 병사를 두 칸 전진. 저건 가장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정석 오프닝이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대응하겠다는 건데, 신경 쓰지 않고 올매지션 오프닝을 펼쳤다. 그리고 걸려들었다는 듯 도련님이 나이트 갬빗으로 응수했다. 기사로 마법사를 잡아먹으려 시도였으나. “이 금화는 제가 먹어요. 신사답게요.” 게임 중반. 은밀하게 완성된 포진에 기사가 역으로 잡아먹혀 그대로 패배했다. 도련님은 열이 오르는지 포도주를 쭉 들이켜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한 판 더 합시다.” “좋아요. 판돈은 금화 2개예요.” “알겠습니다.” 다음 판. 도련님은 아예 올나이트 변형으로 승부를 걸었다. 내가 올매지션 변형만 하니 맞춤 오프닝을 쓰려는 건데, 나는 거기서 바로 로얄 갬빗을 사용했다. 그러자 도련님이 입을 다물고 체스판을 노려봤다. “…….” “왜 그러세요?” “이 아가씨 이제 보니 체스의 신이 아니라 악마랑 계약한 거였구만?” 로얄 갬빗 특유의 단단하고 묵직한 한 방으로 시원하게 때려눕히자, 도련님의 눈이 돌아갔다. “색을 바꿔서 합니다. 저는 흑색이 특기거든요.” “저는 모든 색이 특기에요.” “금화 10개를 걸겠습니다. 이걸 마지막으로 더 승부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나는 앞에 흰색 기물을 놓고 생각했다. 어떤 오프닝을 해야 도련님이 좋아 죽을까? 음. 그게 좋겠다. 나는 양 끝의 병사를 두 칸 이동시켰다. 로얄 갬빗. 내 행동에 도련님은 심호흡을 하고 똑같이 양 끝의 병사를 두 칸 이동시켰다. 맞 로얄 갬빗이었다. 이러면 보통 보고 움직일 수 있는 후수의 로얄 갬빗이 유리했다. 그러니 변형이다. 나는 반대편 병사를 두 칸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로얄나이트 앞의 병사를 한 칸 이동시켰다. 로얄 갬빗의 변형. 초가속 로얄 갬빗이었다. 초가속 로얄 갬빗은 로얄 갬빗의 많은 장점을 버리는 오프닝이었지만, 딱 하나. 로얄 갬빗보다 좋은 점이 있었다. 이쪽이 보다 속도가 빨랐다. “이 아가씨 절대 지는 꼴을 못 보네?” “도련님 제대로 임자 만났어.” 그렇게 나는 진화하지 않은 로얄나이트를 활용해 이득을 조금씩 보다가, 상대의 진화 턴을 잘 넘기고 한 방 역전 카운터로 게임을 승리했다. 금화 10개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꿀꺽. 마지막 남은 벌꿀주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나는 금화 5개를 도련님 앞에 놓았다. 멍하니 고개를 드는 도련님. 그 넋이 나간 표정에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딴 돈의 반만 가져가요.” “아.” “그리고 마스터? 이 금화 4개가 마를 때까지 펍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세요.” 이걸로 내가 얻은 금화는 5개가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쉽게 얻은 돈은 남에게 베푼다. 개인적인 철칙이었다. 뒤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펍을 나섰다.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금화 5개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높으신 분의 행적이 어쩌다 일개 행상인에게 들어갔나 했더니, 본인이 숨길 생각이 없었구나. 어떤 농민의 아들이 열받았다고 금화 10개를 내기로 걸어. 아예 광고를 해라. 나는 크리스가 도박에 성공했다는 걸 확신하며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큰돈을 벌었을 테니, 크리스에게 시원하게 쏘라고 해야지. * “루이나 님. 큰일 났습니다. 영지의 포도주 비축분이 넘친답니다.” “저런.” 오늘의 교훈. 도박은 절대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