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씨―.” 옆에서 바젯이 욕지거리를 뱉는다. 그럴 만했다. 기껏 고생하며 뚫은 미로의 끝이 막혀 있으면 누구나 저랬으니까. 옆에서 레온이 중얼거렸다. “이걸로 벌써 3번째입니다.” “미궁이니까요.” 오히려 3번만 막다른 길을 마주한 게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닐까? 바젯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인원을 나누는 게 좋겠어.” “그러면 다른 세력과 부딪혔을 때 밀어내는 힘이 부족한데요?” “어차피 우리는 다른 세력에 비해 부족해. 우리의 장점은 속도뿐이야.” 요컨대 그거였다. 어차피 전력으로 다른 세력과 정정당당하게 싸워도 비참하게 당하니, 차라리 전력을 쪼개 먼저 던전 중심부에 도착할 확률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럴듯했다. 동의하자 바젯은 순식간에 인원을 10개의 팀으로 나눴다. 우리 팀은 늘 보던 일행으로 구성됐는데, 거기에 바젯의 용병 동료인 남자 하나가 추가됐다. 바젯의 용병 동료, 한스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팀을 나누자마자 우리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흩어졌다. 내가 본대에서 벗어난 건 두 번째 갈림길이 나왔을 때였다.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바젯도 불안할 것이다. 나는 오래 만난 동료가 아니니까. 나뿐일까. 다른 녀석들도 배신할까 봐 걱정되겠지만, 그게 걱정돼 아무것도 안 하면 기껏 유리하게 시작한 던전 공략에 실패할 수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바젯은 내가 의리를 지킬 거라는 가능성에 걸고 팀을 나누는 거였다. 거기에 안전장치로 자신이 가장 믿는 동료 하나도 심어놨으니, 이게 바젯의 최선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바젯에게 확인했다. “던전의 보상을 찾으면―.” “우선권 말이지. 알겠다.” 나는 사전에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바젯과 협상을 했다. 던전의 보상을 발견하면 내가 그중 한 가지를 무조건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협상인데, 다행히 그 제안을 바젯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걸로 던전의 심층부에 도달하면 성배를 얻는 건 확정이었다. 도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일행을 이끈 채 던전의 미로를 가로질렀다. 앞을 키메라가 가로막는다. 너무 만나서 정겨운 수준이었다. 파지직. 뇌전이 튀고, 이어서 노아가 마법을 쏘았다. 약화된 시간에 비례해 위력이 증폭되는 뇌전의 뭉치. 정뢰(正雷)가 키메라를 난자한다. 위력만 보면 3위계 마법이었다. 과연 뇌속성 마법사. 2위계부터 심상치 않았다. 나는 노아를 칭찬했다. “역시 노아 님이에요. 열심히 마법을 키워주세요.” “스승님. 그 말 어딘가 불순하게 들려.” “착각이에요.” 통로의 끝에는 조그마한 방이 등장했다. 방 안에는 각종 귀금속이 널려 있었는데, 나는 방 중앙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마음에 걸렸다. 뭐지. 던전에서 귀금속을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운데, 왜 거슬리지? 내 일행도 전부 정지했다.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멈추니 그에 맞추는 건데. “이거 벌써 수확이 큰데?” 이번에 합류한 한스는 눈치채지 못하고 방 안의 귀금속을 만졌다. 그 순간이었다. 방바닥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전형적인 패턴에 나는 레온에게 소리쳤다. “노아 챙기세요!” 레온이 노아를 챙겨 마법진의 영향 밖으로 벗어난다. 다른 사람도 따라 달렸지만, 아쉽게도 마법사는 검사에 비해 속도가 부족했다. 이윽고. 세상이, 빙글 돌았다. 나는 등불을 밝히며 어두운 통로를 비췄다. 여기는….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왔던 길이 아닌 건 확실했다. “곤란하네.” 내 옆에서 라이젤이 속삭였다. 그밖에는 한스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황금의 잔을 든 채 굳어 있었다. 이 둘이랑 같이 전이된 건가. 그럼 제리는 페란트랑 같이? 나는 적영으로 등불을 띄우며 혀를 찼다. 이 피터팬 증후군 낭만 대마법사 같으니라고. 하다 하다 랜덤 전이까지 던전에 집어넣어? 진짜 자기가 던전 마스터야 뭐야. 그래도 덕분에 귀금속 방이 거슬리는 이유는 알았다. 너무 아무런 리스크도 없이 보상이 주어져서 거슬렸던 거구나. 던전의 낭만이랑은 안 맞는 구성이었어.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느낌상 던전 심층부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확실해?” “아니면 아쉬운 거죠.” 나는 등불이 비추는 통로를 따라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이 괜찮아야 할 텐데. 살짝 걱정되네. * 던전 하면 떠오르는 건 많다. 막대한 보상, 위험한 함정, 강력한 파수꾼. 그리고 황금에 눈이 먼 하이에나들까지. 제리는 화염의 띠를 손목에 장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적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제리를 압박한다. 옆에서 페란트가 기겁하며 뭐라 뭐라 쫑알대지만, 잘 들리진 않았다. 제리는 조금 전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스인지 뭔지가 귀금속을 만진 직후, 외딴곳으로 전이된 제리는 옆에 페란트가 있는 걸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왜 전이가 돼도 이딴 놈이랑. 페란트는 자신이 누구랑 전이 됐는지 확인하고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입을 마구잡이로 놀렸다. “제리 님! 이거 저희 둘만 외딴곳에 전이된 모양입니다! 이럴 때는 구조를 기다리기보다, 저희끼리 따로 탐사를 진행하는 게―.” “다 아는 내용이니 조금만 조용히 해주게.” 제리는 페란트를 진정시키고 허공에 불꽃을 띄웠다. 그러다 통로 끝에 무언가가 보여 시선을 집중했다. 저건―. “제리 님! 저거 던전 최심부 아닙니까?!” “아닐 거 같다만.” 제리는 통로 끝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거대한 도서관이 나왔다. “도서관이라.” 대마법사의 던전에서 발견된 도서관. 딱 봐도 가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제리는 들뜬 마음으로 도서관에 꽂힌 책 중 하나를 꺼냈다. 어디 보자, 음. “…일반 소설이군.” 대마법사의 위대한 깨달음이라도 적혔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실망이 컸다. 제리는 덤덤히 책을 집어넣었다. “우리 목적은 던전 최심부니 말일세. 아쉽지만 여기는 머릿속에만 넣어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게―.” 그때였다. 화염이 제리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왔다. 제리는 재빠르게 불꽃의 탄환을 발사해 화염의 새를 격추했다. 그 후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새끼들이야. 저벅. 방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온다. 놈들은 여러 명이었는데, 하나 같이 적색 로브를 입었다. 적탑. 싸가지없기로 유명한, 마법 외엔 관심 없는 괴물들의 등장에 제리는 입맛을 다셨다. 왜 하필 저놈들일까. 저놈들 말 안 통하기로 유명한데. ‘마법의 끝을 보는 것’이 목표인 적탑은 마법을 수집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 과정이 워낙 제멋대로라 그 부분으로 더 유명한 집단이었다. “수색해라.” “알겠습니다.” 적탑의 마법사들은 제리와 페란트를 아랑곳하지 않고 도서관을 조사했다. 그 안하무인의 행동에 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서관을 벗어났다. 어차피 마법 외엔 관심도 없는 놈들이다. 자연스럽게 빠져주면 문제가 없―. “어딜 가나.” 허나 예상과 다르게 적탑의 마법사는 제리를 붙잡았다. 제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도서관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말이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다만?” “네놈들이 뭘 숨겼을지 어떻게 알고 보내준단 말인가. 기다려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무것도 숨긴 것 없다네. 정 수상하면 몸수색이라도 하면 되지 않나?” 현재 제리의 일행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은 성배였다. 때문에 굳이 적탑과 마찰을 일으키기보다 좋게 좋게 넘어갈 생각이었던 제리였으나. “꼭 몸에 숨겼으리란 보장은 없지.” “설마 우리가 중요 자료를 도서관 어딘가에 숨겼을 거란 건가?” “그러니 우리가 도서관 전부를 수색할 때까지 기다려라.” “헛소리가 길군.” 이 넓은 도서관을 언제 다 조사한다고 기다린단 말인가. 제리는 적탑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적탑의 마법사가 허공에 불꽃을 띄웠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기다려라.” “하.”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제리가 몸을 돌렸다. 제리의 손목에 불꽃의 띠가 장전된다. 제리가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라틴이다.” “라틴. 그래. 본인의 이름은 제리다. 기억해두도록.” 탕! 불꽃의 탄환이 허공을 날아다니던 불꽃의 새를 격추한다. 라틴은 몰랐지만, 제리도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번 참아준 게 놀라울 정도였다. 왜냐하면 제리는, 그의 스승인 8위계 대마법사 아델리안 크로프트가 공인한.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오만한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제리가 눈을 가라앉히며 선언했다. “한꺼번에 덤비게. 단숨에 끝내줄 테니.” * “바젯 님 아니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전이 함정에 빠졌다. 루이나 너는?” “저도요. 우연이네요.” 한참 던전을 떠돌던 루이나는 우연히 건너편에서 등장한 바젯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루이나는 여태까지 모은 정보를 공유했다. “이게 체감으론 티가 안 나지만, 쇠구슬을 굴려보면 통로가 한쪽으로 기운 거 아세요? 점점 밑으로 가는 중인 거예요. 곧 최심부에 도착할 게―.” 쫑알대는 루이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누군가가 희열에 가득 찼다. 곧이다. 곧, 천칭이 내 손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