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다. 이건 능력치와 관계된 문제였다. 예를 들어 멀리 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사람은 순발력, 하체 근육, 순간 폭발 스피드, 유연성이 좋을 것이었다. 허면 여기서 문제. 과연 이 사람이 다른 운동 종목을 뛴다면 어떻게 될까. 잘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멀리 뛰기보다 성적이 안 나올 거였다. 종목이 달라져서 그렇다면 축구로 예시를 들어보자. 스트라이커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수비수에 가져다 놓으면 과연 똑같은 퍼포먼스가 나올까? 아니었다. 공을 차는 건 달라지지 않지만, 요구하는 능력치가 달라지기에 아예 다른 퍼포먼스가 나왔다. 사람의 재능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모든 능력치가 뛰어나진 못했다. 검술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타고난 방향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빠른 것에 능한 사람, 수싸움에 능한 사람, 지켜보는 것에 능한 사람, 느린 것에 능한 사람, 무거움에 능한 사람. 어떤 능력치를 타고났느냐에 따라 익히는 검술이 달라졌고, 전투 방식도 달라졌다. 때문에 검사를 만난다면 우선 관찰이 먼저였다. 상대가 어떤 방식에 특화됐는지 알아야 대처하기 편했으니까. 발리온의 검이 번뜩인다. 허공을 수놓은 붉은 선이 검은 선에 갈라지고, 나는 나무 병사를 대량으로 소환하며 등불을 짤랑였다. 붉은 선이 끝없이 곡선을 그리며 쏟아진다. 나무 병사도 쏟아진다. 피할 곳 없이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찬 와중, 발리온이 검을 움직였다. 쐐애액!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불꽃과 나무 병사가 반으로 갈라졌다. 눈으로 쫓아가기 어려운 쾌검이었다. 속도에 자신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나무 거인을 앞으로 전진시키며 마법을 준비했다. 바람의 핵에 ‘연결’된 불꽃의 그물이 사방에 설치된다. 점점 사라지는 퇴로에 발리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나무 거인을 올려다봤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도주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마법사와 스스로 거리를 벌리는 검사가 세상에 있을 거 같나?” 발리온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졌다. 나무 거인이 주먹을 든다. 등불에서 시작된 불꽃의 폭격이 발리온을 견제하고, 이어서 나무 거인의 주먹이 발리온에게 내려꽂혔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이 파도치듯 사방을 훑고 지나간다. 짓눌린 대지가 터지며 흙이 비산하고, 조그마한 크레이터가 생긴다. 그리고. 쩌저적. 나무 거인의 주먹에 금이 생기며 무너졌다. 재빨리 마력을 주입해 회복시켰지만,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무 거인의 주먹과 당당하게 검을 맞댄 발리온이, 아무렇지 않게 연격을 준비한 탓이었다. 어마어마한 힘이 담긴 검격에 나는 발리온의 평가를 수정했다. 아무래도 쾌검뿐만 아니라 강검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진 모양이다. 힘 대 힘으로 해보자 이거야? 근데, 나도 힘 대 힘은 안 질 거 같은데? 나무 거인의 왼 주먹이 발리온의 검과 부딪힌다.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나무 거인의 왼 주먹이 부서지고, 왼 주먹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나무 거인이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또다시 발리온의 검과 부딪힌 오른 주먹이 부서지지만, 나무 거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복된 왼 주먹을 내질렀다. 산을 먼지로 만들 기세로 나무 거인이 계속 주먹을 내질렀다. 충격파에 곤죽이 된 대지가 끝없이 움푹 파인다. 깊이. 더 깊이. 아예 내핵에 닿을 기세로 나무 거인이 발리온을 두들긴다. 부서지고, 회복하고, 부서지고, 회복하고, 부서지고, 회복하고, 영원히 반복될 거 같던 순환이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발리온이 움직였다. 나무 거인의 주먹과 발리온의 검이 닿는다. 다만 아까와는 느낌이 아예 달랐다. 부드럽게 휘두른 발리온의 검이 주먹의 궤도를 비튼다. 나무 거인의 주먹이 발리온이 아닌 대지를 때린다. 이어서 나무 거인의 몸이 비틀거리고, 그 틈을 노린 발리온이 땅을 박차고 내게 날아왔다. 하나의 연극 같은 움직임에 나는 등불을 들었다. 내 코앞까지 도착한 발리온이 입술을 연다. “나쁘지 않았지만, 힘만 무식하게 강해선 언젠가 막힌다.” “하지만 힘 대 힘 싸움은 결국 제가 이겼죠?” 말을 뱉으며 나는 아까부터 준비하던 마법을 발동했다. 극한으로 압축된 불꽃이 해방되며 붉은 기둥을 만든다. 마치, 붉은색 번개가 가로로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초압축 불꽃에 휩싸인 발리온은 허공을 끝없이 날다가, 이내 몸을 빙글 돌리며 지상에 착지했다. 나는 고작 옷이 그을린 것에서 끝난 발리온의 모습에 시선을 내렸다. 발리온의 왼손에 검은색 장갑이 나풀거린다. 내면을 두들겨 완성한 이상향 중 하나가 현실에 구현된 것이었다. 역시 발리온은 연단 마법의 2단계 각성, 해방까지 익힌 검사였다. 검은색이면 암속성을 타고난 건가. 암속성의 대표적인 능력은 흡수. 아무래도 발리온은 모든 공격을 흡수하는 게 가능한 검사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다. 재능엔 한계가 존재했으니까. 따라서 모든 능력치가 뛰어난 건 불가능했다. 보통은 그랬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정말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이 등장하곤 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한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고, 범재의 상상을 아무렇지 않게 부수는 존재. 천재? 아니. 그런 녀석은 천재조차 아니었다. 그래. 언젠가 모든 검의 정점이 될 사람이라면, 젊었을 때부터 이 정도는 해야지. “고위 마법사는 이래서 까다롭단 말이야.” 발리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발리온과의 거리를 쟀다. 약 수십 미터. 멀다면 멀었지만, 초인간의 싸움에선 몇 발짝 움직이면 닿는 거리기도 했다. 나는 발리온을 쓰러트릴 방법을 짜냈다. 우선은 내가 가진 패부터. 나무 거인, 나무 병사, 초압축 불꽃, 화염 폭격, 포식의 불꽃, 물 밧줄, 암석창, 연단 마법, 적영, 불꽃 그물. 이 정도가 내가 평소에 애용하는 공격 마법이었다. 우선 포식의 불꽃은 제외였다. 얘는 대 마법사 전이나 특수한 상황에 유용한 녀석이었으니까. 나무 거인? 썼지만 막혔다. 나무 병사? 마찬가지다. 지푸라기처럼 쓸려나갔다. 초압축 불꽃도 아무렇지 않게 막았고, 화염 폭격은 간지럽지도 않은 듯했으며, 위의 둘이 막힌 시점에서 물 밧줄, 암석창 또한 큰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응용이 잘못됐던 게 아닐까? 나는 마법을 다채롭게 응용하며 머릿속에서 발리온을 상대해 봤다. 허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내 최대 화력인 초압축 불꽃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낸 시점에서 그 어떤 응용을 하든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걸 해결하기 위해선 하나뿐이었다. 더 강한 마법을 사용해야 됐다. 나는 발리온의 한계를 가늠했다. 초압축 불꽃을 코앞에서 맞아도 멀쩡한 저 방어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혹시 내가 아무리 마법을 쏟아부어도 못 뚫는 거 아닐까? 발리온이 몸을 낮춘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한 모습에 나는 상념을 멈추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뭐, 막히면 어때. 막히면 아쉬운 거지. 거기에. 아무리 미래의 제국제일검이라도, 그 나이에 이걸 막기는 쉽지 않을걸? 왜냐하면 이건.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니까.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빠져나가고, 구구구구궁. 땅에서 나무가 솟구쳤다. 솟구친 나무가 형태를 이룬다. 두꺼운 줄기가 엮이며 수십 미터 길이의 거대한 몸체가 완성된다. 마치, 뱀을 닮은 그런 형태였다. 각양각색의 나뭇가지들이 엮이며 신체 부위가 생긴다. 등에 되다 만 날개가 달린다. 어깨에 되다만 팔이 달린다. 머리에 되다만 뿔이 달린다. 하나같이 되다 말았다. 제대로 된 게 없었다. 화륵. 뿔에, 날개에, 팔에 불꽃이 맺히고, 되다만 뱀이 포효한다. 용이 되려다 타락한 이무기. 강철이. 녀석이 거대한 꼬리로 발리온을 후려쳤다. 땅을 박차고 꼬리를 피한 발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환만 해도 마법사 클럽의 보호 장치에 걸리는 거대한 크기 탓일까. 발리온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런 표정이면 어떻게 해. 강철이는 용이 되려다 타락한 이무기, 분노에 휩싸인 괴물이었다. 강철이의 속에 쌓인 분노가 천불이 돼 강철이가 아예 불을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건 유명한 설화였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말이었다. 강철이가 입을 벌린다. 화륵. 불꽃이 모인다. 포식의 불꽃이 강철이의 몸을 불태우며 강철이의 목 안에서 강하게 타오른다. 그게 압축된다. 끝없이, 끝없이, 계속 압축된다. 강철이의 몸을 포식해, 소화해, 끝없이 덩치를 늘린 불꽃이, 임계점을 넘어서까지 계속 압축된다. 제어 범위를 넘은 압축에 불꽃이 불안정해졌다. 불꽃이 여기저기로 뿜어지며 튄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괜찮았다. 강철이는 애초부터 속에 천불을 키우는 괴물. 몸 안에서 아무리 불꽃이 날뛰어도, 그 피해가 외부에 닿을 일은 없었다. “허.” 발리온이 터트린 헛웃음이 미세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손가락으로 발리온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체크.” 직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붉은 빛이, 세상을 꿰뚫었다. “괴물….” 등 뒤에서 들리는 사족 보행…이라기엔 발이 없고 손만 있는 마법사의 중얼거림을 뒤로한 채 나는 발리온을 찾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살았어? [클리어!] [탑을 정복하셨습니다!] 아닌가 보네. 눈앞에 떠오르는 글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맞고 살면 그게 괴물이지. 강철이가 괴물이 아니라. 나는 강철이를 역소환한 후 세피아에게 다가갔다. 세피아가 나를 올려다본다. 경악이 깃든 그 눈빛에, 나는 세피아에게 차분히 요구했다. “살려줬는데, 혹시 마법 하나 줄 수 있나요?” “아니.” 가상 세계는 이게 문제야. 살려줘도 마법 하나 못 받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