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에요.” 내게 도움을 받은 중년 마법사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격했는데, 누구나 죽다 살아나면 저런 반응을 보일 거였다. 그런 중년 마법사에게 레온은 피 한 방울 안 묻은 검을 집어넣으며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성법 쪽이 약해서.” “아니요. 회복 포션이 있으니까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중년 마법사는 텅 빈 병을 흔들었다. 괜히 회복 포션을 여분의 목숨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션만큼 든든한 것도 드물었다. 나는 중년 마법사를 뒤로한 채 바닥에 머리를 박은 용병들을 살폈다. 이들과는 딱히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내가 나무 병사를 거느리고 등장하자마자 용병들이 즉시 땅에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일주일 넘게 여행했음에도 용병과 안 마주쳐서 뭔가 했더니, 전부 제 나무 병사를 보고 도망친 거였군요?” “나 같아도 나무 인간이 마차를 몰고 있으면 쳐다도 안 볼 거 같아.” “곤란해졌네요.” “어차피 용병들은 그럴듯한 마법이 없었잖아.” “그래도 까보는 재미가 있었잖아요.” 나는 등불을 짤랑이며 용병들에게 마법 3원칙을 읊었다. “자신이 마법을 소유했거나, 마법을 공유할 생각이 있거나, 마법을 양도할 의향이 있으신 분?” “…….” “없네요.” 내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중년 마법사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저 배신자들이 마법을 익혔을 리 있습니까. 제 마법을 가져가십시오.” 나는 동료였던 것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가, 간신히 살아난 중년 마법사에게 차근차근 질문했다. “원소 적성은요?” “물입니다.” “좋은 원소 적성이네요. 특기 마법은요?” “그러지 말고 전부 가져가세요. 어차피 이제 용병 일도 때려치울 생각입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전부는 불가능해서요. 하나만 고를게요.” 내가 거래로 가져올 수 있는 마법은 하나뿐이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더 가져올 수 있긴 한데, 그러면 상대편에게 감당 못 하는 손상이 발생했다. 꼭 하나만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음.” 중년 마법사는 잠시 고민하고는 마법 목록을 쭉 읊었다. 나는 그중 물로 상대를 묶는 마법을 가져왔다. “거래는 성사됐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풀란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저는 더는 관심이 없어서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정말 더는 관심이 안 갔다. “에엥?” “진심입니까?” 그러자 크리스와 레온이 화들짝 놀랐다. 이 녀석들은 또 뭐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은 뭔가요.” “루이나 님은 여태까지 그 누구도 살려 보내지 않았잖아.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지.” “그거야 제 목숨을 노렸으니까요. 검을 뽑은 자는 자신도 검에 찔릴 각오를 해야 돼요.” 나는 절대 죽을 수 없다. 모든 마법을 익히기 전까진 죽여도 죽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 환생한 거 아니겠는가? 하여간 그런 만큼 내 목숨을 노린 녀석들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했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나를 죽이려 한 게 아니라 폴란을 죽이려 한 거고, 나랑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머리를 박았으니까. 내 입장에선 굳이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루이나 님. 정말 이런 놈들을 살려둬도 될까?” “제도(帝道)에서조차 강도질을 하는 녀석들이니까요. 저 또한 인성이 의심되지만, 어쩌겠어요. 더는 저랑 연관되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뭘 원하시나요 폴란 님?” “그래도 함께한 정이 있으니 살려서 치안 기관에 넘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요. 저도―.” “무슨 일이야 이게.” 돌연 끼어든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말에 탑승한 두 명의 남자였는데, 그들은 말에서 내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두 남자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용병들에게 시선을 주고는 나직이 물었다. “습격을 당한 건가?” “정확히는 폴란 님이 배신당해서 죽을 뻔했어요.” “확실해?” “네? 아. 그러니까.” 나는 폴란에게 두 남자를 맡기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 사람들이 누군지는 뻔했다. 수도와 연결된 제도(帝道)를 감시하며, 제국을 수호하는 창이자 방패. 제국 기사였다. “그래도 잘됐네요. 제국 기사에게 넘기면 수월하겠어요.” 나는 크리스에게 속삭이며 상황을 지켜봤다. 폴란과 레온에게 사정 청취를 들은 두 남자는 이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용병들을 구속했다. 그 깔끔한 엔딩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강도질을 당해도 제도에서 당해야 뒤처리가 편하구나. 지식이 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마법 준비해 놓으세요.”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나는 폴란과 헤어진 후 폴란에게 얻은 마법을 살폈다. 휙. 물 밧줄이 레온을 묶었다. 레온은 물 밧줄에 묶인 채로 나를 묵묵히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사람을 상대로 마법 연습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때요?” “성능 자체는 좋습니다. 신성력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 끊기 어렵군요.” 단련된 검사인 레온조차 근력으로 끊기 어려운 물 밧줄이라. 이거면 전투에서도 써먹을 구석이 많았다. 나는 그 밖에도 다양한 마법을 연습했다. 플로나의 마법이 참 좋은 게 한 번 발동하면 집중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등불 안에 다양한 화염 마법을 사용했을 때였다. “루이나 님! 여기에 야영지 꾸리자!” 크리스가 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외쳤다. 슬슬 해가 지고 있기에 딱 적당한 타이밍이긴 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나무 병사를 해제하고 레온에게 다가갔다. “레온 님.” “무슨 일입니까.” “저 검술 좀 알려주세요.” “검술 말입니까?” “네.” 최근에 여러 전투를 겪으며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고, 연단 마법을 연마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연단 마법이 그대로일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법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활로를 찾아야 됐고, 내가 생각하는 활로는 검술을 익히는 거였다. 괜히 견습 기사들이 마법보다 검술을 먼저 배우겠는가.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러는 것이다. 아마도. “가르쳐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잘됐네요.” “제가 익힌 검술의 종류는 많습니다만, 어떤 걸 원하십니까?” “평범한 거면 돼요.” “보통 기사 커리큘럼은 롱소드를 사용하죠. 제 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레온이 건네 검을 받아 뽑았다. 근처의 나뭇가지 몽둥이를 가져와 든 레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술의 핵심은 결국 하나입니다.” 레온이 나무 몽둥이로 내 검을 밀었다. 나는 거기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검을 뒤로 물렸다. “이번엔 루이나 님이 밀어 보십시오.” 시키는 대로 검으로 몽둥이를 밀자, 레온의 나무 몽둥이가 뒤로 물러났다. 레온이 설명했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진다. 이게 검술의 시작이고, 여기서 모든 게 응용됩니다.” “작용과 반작용이네요.” “그걸 머릿속에 넣었다면 다음은 힘의 작용입니다. 검에서 손잡이와 가까운 곳은 힘이 더 실리지만 뭉툭하고, 멀어질수록 힘이 덜 실리는 대신 날카로워집니다.” “지렛대의 원리네요.” “방금 제가 말한 부분을 머리로 생각하면 늦습니다. 몸에 때려 박고 숨 쉬듯 나와야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만약 몸에 각인 됐다면 그다음은 거리 감각인데, 이건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레온의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비춰라. 청야(靑夜).” 검에 마법이 불안전하게 덧씌워진다. 당장이라도 흩어질 거 같은 연단 마법을 유지한 채 나는 검을 휘둘렀다. 검이 흐른다. 허공을 수놓는 검은 마치 유성우처럼 느껴졌다. 그 위에 푸른색 연단 마법이 흩날린다. 물의 원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얻은 마법도 물의 원소였다. 내가 물과 인연이 깊나? 물이라. 물, 물, 물. 물, 검, 유성우, 파란색, 차갑다. 흐른다. 돌연 나는 검을 멈췄다. 그리고 오른손을 폈다. 쪼르륵. 손에서 물이 튀어나왔다. 나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사람 손에서 물이 나온다!” “루이나 님 손에서 물이 나온다!” “새로운 원소를 얻은 겁니까?” 레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중 원소는 그만큼 희귀한 재능이었다. 나도 살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게는 다중 원소 적성이 없었으니까. 즉 이건…. 마법을 거래로 얻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당 원소를 깨달은 건가? 켈튼이 준 천칭 마법에 그런 기능까지 달려 있었을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위계로 따지자면 0위계 상태인 물 원소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가, 주먹을 쥐며 중얼거렸다. “성장하라는 연단 마법은 그대로고 원소 적성만 늘어났네요.” “잘된 일 아닙니까? 다중 적성은 어마어마한 재능이라고 들었는데요.” “글쎄요….” 어렴풋이 느껴진 바로는 내 현재 상태가 다중 적성이라 부를 만큼 엄청나지 않았지만, 나쁜 건 아니니까. 나는 기분 좋게 검을 들었다. 오늘은 딱 천 번만 휘두르고 자야겠다. * “루이나 님! 도착이야!” 눈을 감은 채 짐마차에 누워 있던 나는 크리스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내가 살아생전 봤던 그 어떤 도시보다, 현대에서 봤던 그 어떤 도시보다 화려한 광경이 멀리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에테르니아. 에테르노 제국의 황도에 드디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