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잉.” 크리스가 통곡한다. 서큐버스는 눈물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크리스의 눈물을 짜낸 범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플로라 성력 2335년 ~ 성력 2363년 10월 26일 영생을 꿈꾸며 여기에 잠깐 잠들다」 완벽한 묘비명이었다. 새삼 내 센스가 뛰어난 걸 체감했다. 크리스는 눈가를 비비며 작게 중얼거렸다. “플로라 님이랑 훈제 고기 파티를 하기로 했단 말이야….” “그건 아쉽네요. 저희끼리라도 할까요?” “루이나 님. 진짜 사람의 마음이 없어?” 크리스가 정색한다. 어느새 눈물은 들어간 뒤였다. 눈에서 빔을 쏘는 크리스에게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플로라 님은 제가 소생시키기로 했단 말이에요. 울 필요가 없다고요.” “……지금?” “물론 지금은 아니고 나중이에요.” “그래?” 크리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울다가 웃으면 요리 주머니에 뿔이 나는데 알까 모르겠다. “다행이다. 난 또 영원히 이별인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안심하고 플로라 님의 온천물을 퍼가도 되는 거겠지?” “와.” 벽이 느껴졌다. 그런가. 플로라와 켈튼이 말했던 언젠가 내가 마주하는 벽은 이거였나. 확실히 너무 거대해 마음이 꺾였다. 이런 걸 넘어서라니. 도저히 무리였다. “크리스 님이 이겼어요. 저는 범부예요.” “잠깐.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지 말아줘. 루이나 님이 시작한 거잖아.”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자리를 피하려는 움직임을 취하자, 크리스가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루이나 님 잘 들어 봐. 악신의 사제들이 플로라 님의 여관을 습격했다는 소문이 벌써 수도까지 퍼졌을 거란 말이야?” “이만큼 화려하게 저질렀으니까요.” “악신의 사제조차 탐냈던 무언가가 있던 온천수! 지금 판매! 어때?” “그렇군요.” 확신했다. 이 녀석은 서큐버스가 아니었다. “제 앞에 태초의 그림자 중 하나, 탐욕의 사도가 있었군요?” “루이나 님. 그래서 안 할 거야?” “당장 하죠.” 할 건 해야지. “루이나 님. 크리스 님.” 진중한 목소리에 우리는 묘비를 마저 지켜보다가, 묘지를 떠났다. 플로라는 의외로 재산이 적었다. 물론 고위 마법사 ‘치고’ 적었다는 거고, 일반인 입장에선 눈 돌아가는 돈을 가지고 있긴 했다. 플로라의 재산은 전부 용병 길드에 넘겼다. 용병 길드의 유산 관리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면 적법한 상속인이 나올 때까지 맡긴 돈을 적당히 까먹으며 묘지 관리를 해줄 거였다. “저희 용병 길드가 판단하는 적법한 상속인은 루이나 님인데 말입니다. 제자잖아요.” “저는 플로라 님의 제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플로라 님이 돈까지 준다고는 안 했어요.” 어디까지나 플로라가 주기로 한 건 성은이었다. 재산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모르지 않나. 플로라가 예전에 키웠다 까먹은 제자가 있을지. 나는 용병 길드를 나와 반쯤 부서진 플로라의 온천으로 향했다. 이제는 옛 추억이 돼버린 온천 여관‘이었던’ 것을 구경하던 나는, 이내 낑낑대며 나무통에 온천수를 채우는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기어코 하시는군요.” “루이나 님. 도와줘.” “어차피 다른 온천수를 플로라 님의 온천수라 속여도 못 알아보지 않나요?” “루이나 님. 상인의 기본은 신용이야. 아무리 우리가 상술로 굳이 말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진짜 거짓말을 하는 건 안 돼.” “알겠어요. 그거 내려놓으세요.” 내 말을 따라 나무통을 내려놓는 크리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나무 병사를 소환했다. “진짜 편하다.” “놀라운 마법이에요.” 나무 병사는 나무통 안에 있던 다른 온천수를 비우고, 플로라의 온천수로 새로 채우는 작업을 끝없이 반복했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남장을 다시 하셨네요? 몸매를 가리는 펑퍼짐한 옷만으로 서큐버스라는 걸 감출 수 있는 게 참 신기해요.” “슬슬 출발해야 되니까. 그리고 난 서큐버스가 아니야 루이나 님.” “고기나 먹을까요.” 점심은 포장해 온 훈제 고기였다. 플로라가 추천했던 그 식당이었다. “잉잉.” 크리스는 질질 짜면서 훈제 고기를 세팅했다. 그 광경이 꽤 웃겨 나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옆에서 냉혹하게 온천수를 퍼 올리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울어도 신뢰도가 떨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떻게 해.” “그러면 울긴 해야죠.” 치익.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인 나는 하늘을 봤다. 눈이 내린다. 눈의 고장에서 눈을 맞으며 바비큐라.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루이나 님. 혹시 플로라 님처럼 막 나무로 지붕 같은 거 못 만들어? 눈 내리는데?” “비슷한 효과는 낼 수 있지만, 플로라 님처럼은 안 돼요. 기다려 보세요.”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무 거인이 튀어나와 지붕 역할을 했다. 크리스가 입을 쩍 벌렸다. “꼭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해야 돼?” “반대예요. 이런 식으로밖에 못 하는 거예요.” 내가 거래로 얻은 건 플로라의 고유 마법이었다. 플로라의 마법 체계 전반이 아니라. 따라서 내가 현재 쓸 수 있는 마법도 플로라의 고유 마법, [생장]뿐이었다. 생장을 응용해서 비슷한 효과를 낸다면 모를까. 정말 플로라와 완전 똑같은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식사나 해요.” 우리는 반파된 여관에서 주워 온 식탁에 접시를 올리고 모닥불을 피운 뒤 훈제 고기를 먹어 치웠다. 나는 벌꿀주를 한입 들이켜고 아까부터 옆에서 조용히 있던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신성력을 얻은 기분이 어떠세요?” “나쁘지 않습니다.” 레온은 이번에 신성력을 각성했다. 사제들의 표현으로는 부름을 받았다. 견습 딱지를 떼고 정식 성기사가 된 것이다. “몸 안에 생명력이 넘치는 기분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조심하세요. 막 힘을 각성한 사람들이 딱 그 상태에서 사고가 나거든요.” “조심하겠습니다.” 레온은 장작을 조용히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진중한 표정이었는데, 이제 나는 저 이유를 명확히 알았다. 악신의 사제에게 가족이 죽었구나. 방법은 아마 화형. 그런 과거를 가졌다면 악신의 사제를 증오하는 것도, 모닥불을 피울 때마다 눈빛이 가라앉는 것도 이해가 됐다. “루이나 님! 나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저는 크리스 님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불안해져요. 뭔가요.” “저 나무 인간들 얼마나 정교하게 조작이 가능해?” “글쎄요. 아무래도 실뜨기는 못 하지 않을까요?” “말을 모는 건?” “그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네요.” “그러면 우리 이제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야? 루이나 님이 대신 하면 되니까. 이야 돈 굳었네.” “…….” 나는 크리스를 빤히 봤다. 그러자 크리스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이나 님?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이나 님?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내가 잘못한 거 같은데? 혹시 나 뭐 저질렀어?” “천재는 범재의 마음을 모르니까요. 어쩔 수 없어요.” 돈 계산에선 그 어떤 대마법사 안 부러운 머리 회전 속도를 보여주는 크리스였다. 나 같은 평범한 돈 애호가는 범접하기 힘들었다. 담배 연기를 눈 내리는 하늘에 흘려보낸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결국 크리스 님은 저조차 돈으로 보이겠죠. 흑흑.” “루이나 님. 다 좋았는데 울음소리가 너무 연기 톤이었어.” “이런.” 식사를 마친 우리는 마지막으로 플로라 여관의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레온 님도 참 부끄럼이 많네요. 굳이 벽을 세워줘야 되고요.” “우리는 괜찮은데, 그치 루이나 님?” “그러니까요.” “하아.” 임시로 만든 나무 벽 너머에서 레온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물이 너무 뜨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온천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겉이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성은을 쓰다듬었다. “이게 성은이야?” “네.” “엄청 크네. 정말 이걸로 등불을 만들게?”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원주인이 등불을 요구했으니 등불로 만드는 게 이치에 맞았다. “아깝지 않아? 이걸 쪼개서 사용하면 그냥 평범한 성은이 되잖아.” “당연히 이걸 전부 써야죠.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어요.” “연금술?” “연금술에 좋은 기술이 많더라고요.” 연금술의 가장 대표적인 기술로는 압축이 있었다. 가격은 꽤 나가겠지만, 이만한 성은을 통째로 사용하는 대가다. 지불할 만했다. “그러면 무겁지는…성은은 가벼워서 괜찮나?” “아마도요. 해보진 않았지만 압축해도 평범한 금속 무게지 않을까요.” “별의 금속이 참 여러모로 좋긴 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얻겠다고 찾아다니잖아요.” 그렇게 바비큐 파티도 끝내고, 온천욕도 끝낸 우리는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고 짐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나무 병사를 4마리 소환한 후 고삐를 잡게 했다. “돼?” “되네요.” “되는구나.” 성공적으로 마차를 움직인 나는 짐마차에 구겨 넣은 성은을 툭툭 치며 입술을 뗐다. “이제 출발해요.” “황도를 향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