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즈가 조용히 검을 뽑았다. 가검이 아닌 진검을 말이다. 대련에서는 보통 진검을 쓰지 않지만, 그것도 하수들끼리의 싸움 얘기다. 연단 마법의 2단계 각성, 해방의 극에 달한 검사들끼리의 싸움에선 가검과 진검이 무의미했다. 그건 모든 공격을 완벽히 제어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결국 다른 의미가 더 컸다. 그 정도 경지의 검사에겐 어차피 나뭇가지도 위험했다. 헤이즈에 맞서 레온도 검을 뽑았는데, 꽤 신중한 모습이었다. 레온이 원래 신중했지만, 이번엔 조금 더 신중하다고 해야 되나.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레온도 은근히 승부욕이 강했다. 부조리를 바로 잡는 싸움이면 모를까. 이런 아무래도 좋을 승부는 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 같았는데. 하긴. 레온도 남자니까. 얼굴이 미소년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레온에겐 은근 상남자 기질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그래. 인질범이 ‘인질을 살리고 싶음 오른팔을 잘라’라는 명령을 내리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 인질범을 베어버릴 느낌이었다. 그게 인질을 살릴 가장 높은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TMI로 헤이즈는 인질극을 당하면 코웃음을 칠 느낌이었다. 인질이 소중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아니면 ‘어쩌라고’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을까. 검을 든 두 남자가 천천히 상대를 살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입이 심심하네요.” “그러실 거 같아서 여기 다과와 홍차를 준비했습니다.” “깜짝이에요.” 느닷없이 끼어든 사람은 사용인인 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테리와 눈이 마주쳤다. 테리는 미소를 지으며 간이 테이블에 홍차와 다과를 세팅했다. 테리를 고용한 지 이제 몇 달밖에 안 됐지만, 그럼에도 하나 확실한 게 있다. 테리를 고용하면 삶이 너무 편해져서 글러 먹은 인간이 됐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걸 딱딱 내놓는데, 나한테 도청 마법이랑 감시 마법을 달아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흠. 나는 마력을 뿜어 몸을 훑었다. 이상은 없었다. 아니. 단정 짓지 마라. 그런 안일한 사고방식이 재앙을 부른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4위계 마법사에게 도청 마법과 감시 마법을 부착하려면 어떤 방식이 가장 편할까? 뭐긴 뭐야. 마법사와 늘 붙어 다니지만, 도청 마법과 감시 마법을 발견 못할 만한 녀석에게 부착하는 게 제일 편하지. [?] “이리 오세요.” 나는 적영을 데려와 이리저리 뒤적였다. 꼼꼼하게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적영의 금발에 꽂힌 구름 머리핀이 어느새 5개로 늘었다는 걸 제외하면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나저나 얘 머리핀은 왜 이리 좋아하는 거야. 너 여자 아니라 무성이라며. 머리핀을 너무 빤히 본 걸까. 내 속마음을 읽은 적영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쯧쯧. 주인님. 아직도 몰라? 머리핀이 많으면 그만큼 돈이 많다는 뜻이잖아. 즉 이 머리핀은 부의 상징인 거지.] “크리스 님이랑 그만 붙여놔야겠네요. 이상한 말투가 옮았어요.” [나예요.] “저랑도 떨어트려 놔야겠어요. 이참에 독립하죠?” 적영과 한바탕 하고 나니 문득 진한 탈력감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너무 생각이 많다. 말의 뒷면을 읽으려 하고, 행동의 의미를 찾으려 하며, 현상의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테리는 그냥 성실한 사용인이었다. ‘능력이 매우 좋다’라는 특이 사항이 붙었지만, 그녀가 마왕의 하수인이라든가, 악신의 사제라든가, 외신의 첨병이라든가, 이런 숨겨진 정체는 없었다. 생각이 많은 건 마법사에게 있어 장점이다. 허나 세상 모든 일에 생각이 많은 게 꼭 장점으로 발휘되지는 않았다.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나. 생각이 적으면 실수를 하지만, 생각이 많으면 인생을 망친다고. 나는 머리를 깨끗하게 비웠다.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끝내 텅 빈 마음에 의지를 채웠다. 검을 뽑았다. 엘프 명장의 영혼이 서린 검날이 번뜩이고,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는 검날에 얼굴을 가두며 나는 마법을 발동했다. 청야가 완벽히 검을 뒤덮는다. 직후 청야와 내가 연결된다. 내면을 두들겨 완성되는 마법은, 완성된 순간부터 역으로 나를 두들겨 완성시켰다. 세포 하나에, 육체 하나에 초인의 힘이 깃든다. 꽈악. 나는 주먹을 쥐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단계 각성, 신체 강화 획득 성공. 신난다. 이제 마법 연습하러 가야지. * 켈튼을 처음 만나 마법을 배우고 약 8년이 지났다. 8년 만에 4위계. 솔직히 결과만 따지면 나는 어디 가서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하는 순간 맞아 죽었다. 하지만 나는 재능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 세계의 마법은 인식과 달리 재능이 막 엄청나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별개로 재능이 없는 건 맞았다. 이건 이미 인증된 사항이었다. 8위계 마법사가 재능이 없다고 직접 말해줬으니 확실했다. 허나 나는 평균점을 벗어나는 성과를 보여줬다. 으로 얻은 마법들을 제외해도 그랬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를 나는 꽤 오래 생각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 둘의 차이는 컸다. 설사 아는 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해도, 아는 게 백배 나았다. 어째서 나는 재능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상당한 성취를 얻은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전에 우선 이 세계의 마법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원소를 제어해 마법을 완성하는 이 세계 마법의 핵심은 원소 친화력이었다. 원소 친화력이 높아야 원소 이해도가 높아졌고, 그걸 바탕으로 원소 제어력이 올라갔으니까. 나는 이 원소 친화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원소 이해도도 자연히 더디게 올라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법칙이 어그러졌다. 예상했겠지만 내가 불 속에 몸을 던진 후부터였다. 불 속에 몸을 던져, 불을 온전히 느낀 순간부터 나는 원소 이해도가 상당히 빠르게 올라갔다. 따라서 인과는 명확했다. 불로 몸을 지졌더니 원소의 이해도가 올라간 건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결과였다. 다만.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몸을 불태운다고 원소 이해도가 올라가는 거였으면 전장의 병사들은 모두 화염 원소 적성일 거였다. 몸을 불태운 건 수단일 뿐이고, 거기서 플러스알파로 무언가를 해야 재능의 벽에 금이 가는 걸 텐데, 이게 명확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어렴풋이 짐작은 됐지만, 막상 말로 풀려니 안 튀어나왔다. 이론 정립이 안 된 거다. 그렇기에 이건 재현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비슷한 세팅을 해도 다른 결과가 나올 게 분명했다. 뭐, 아예 깜깜한 건 아니었기에 대충 감각대로 내가 느꼈던 것들을 종합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긴 한데, 그걸로는 부족했다. 조금 더. 좀 더. 마법적인 성과를 얻고 싶었다. 내가 보유한 마법들을 정리하자. 우선 , 혹은 ‘탐’ 원소의 힘으로 얻은 마법들부터. 도적을 부업으로 즐기던 용병을 털어 얻었던 연단 마법. 마찬가지로 도적을 부업으로 즐기던 용병에게 습격당한 마법사를 구해주며 얻은 물 밧줄 마법. 예지의 마녀를 도와주고 얻은 암석창 마법. 까마귀 수인과 승부를 해 얻은 암속성 웅덩이 마법. 연금술사 길드와 거래해 얻은 연금 마법. 바람 꼬챙이 마법. 물 화살 마법. 리치에게 얻은 대검을 만드는 마법. 마법에 한눈을 판 기사를 구해주고 얻은 적영(寂影).제자와 공유한 정뢰(正雷). 켈튼의 소망이 담긴 . 플로라의 바람이 담긴 . 탐욕의 사도 직속, 탐욕의 세 번째 손가락에게 빼앗은 . 전대 탐 원소 소유자가 세상에 뿌린, 분노의 성검에 기생 중이었던 . 백탑주와 거래해 얻어낸 . 참 많았다.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얻어낸 마법도 있으니까. 불꽃을 가볍게 압축해,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비며 공격하는 화염 폭격 마법. 불꽃을 한계까지 압축해, 일순 뿜어내는 초압축 화염 마법. 방온 마법. 방음 마법. 이빨이 돋아난 불꽃으로 적을 물어뜯는 마법. 적을 포식해 화염의 위력을 키우는 마법. 마법을 포식해 그걸 그대로 뱉어내는 마법. 화염 그물 마법. 불꽃을 재료 삼아 타오르는, 염뢰(炎雷). 그밖에 물 원소, 바람 원소, 대지 원소, 나무 원소, 암흑 원소 적성까지. 누군가는 한 명의 마법사의 안에 담겼다기엔 많다고 할, 그리고 내가 보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한 마법을 살피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마법을 손에 넣을까. 더 많은 원소 적성을 보유해야 된다.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야 된다. 원소에서 더 많은 특징을 발견해야 됐다. 더 많은 원리를 발견해야 됐다. 많이, 많이, 많이. 모든 걸 다. 손에 넣는 법. 그건―. “하아.” 상념을 이어가다 말고 길게 한숨을 뱉었다. 나는 약속을 했다. 물론 약속엔 강제성이 없었다. 당연했다. 켈튼은 내게 소망을 남겼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내가 자유롭길 원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소망은 그 어떤 강제성이 강한 법칙보다 나한테 무거웠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내가 행복하길 바랐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은 거다. 뭐, 을 받아놓고 왜 이런 소망을 남겼냐고 징징대면 그게 양심이 죽은 거라. 나는 법 없이서 사는 양심인인 만큼 현 상황에 매우 만족했다. 이제 하던 대로 촛불 켜놓고 마법 훈련이나 해야겠다. 근데 이 정도면 많이 참지 않았나? 진짜 인정해. 많이 참았잖아. 켈튼이 뭐라고 했지? 얼굴을 망치지 말고, 치료를 하고, 수명을 대가로 바치지 말고, 신체를 소중히 여기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된다? 정신도 신체 중 하나야. 더 참으면 나 정신병 걸려. 나는 허공에 물을 소환했다. 그다음. 그대로, 그걸 삼켰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