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서큐버스 퀸 크리스에게 속절없이 밀리던 나는, 그녀의 인간성이 남았다고 믿으며 최후의 도박을 하게 되는데…. 늦은 오후.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평화롭네요.” “세상이 어지러운데 본인만 평화롭다면, 의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요.” “본인이 혼란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입니다.” 나는 제리를 빤히 바라봤다. 내 시선을 태연히 넘기며 제리는 엄하게 말을 꺼냈다. “세스. 원소의 제어가 흐트러진다.” “죄송합니다.” “기껏 희귀 원소를 타고났어도 겁을 먹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신의 마법에 겁을 먹는 마법사는 3류 이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세스는 심호흡을 하고 원소 제어를 시도했다. 세스의 손 위에서 어둠이 고요히 잠을 잔다. 음울한 빛을 내뿜는 어둠에 세스가 침을 삼켰다. 아마 과거를 떠올리는 중일 거였다. 리치의 마을에서 살아왔던 과거를. 무럭무럭 성장 중인 세스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리치의 마을에서 주워 온 성장형 마법 보관소가 수련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얼른 고유 마법을 만들렴 세스야. 너만 믿는다. “엘피니엘 남작님. 잠시.” “고마워요 테리 님.” 사용인인 테리가 메이드복을 팔랑이며 테이블에 무언가를 잔뜩 올려놨다. 벌꿀주에, 감자샐러드에, 훈제 고기에, 꼬치구이에, 하여간 뭐가 많았다. 나는 감자샐러드를 한입 먹은 후 벌꿀주를 들이켰다. 모든 일이 끝나고 먹는 벌꿀주만큼 짜릿한 것도 드물다니까. 나는 훈제 고기를 포크로 푹 찍어 입에 넣으며 제리에게 질문했다. “제리 님. 고유 마법을 여러 개 얻는 건 어떻게 되셨나요?” “어렵더군요.” “구체적으로는요?” “마치 처음부터 다시 5위계에 오르는 느낌입니다.” “아하.” 어쩐지 내 논문의 타당성이 인정됐음에도 결과가 안 나와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 문제가 있었나. 하긴. 따지고 보면 아예 새로운 고유 마법을 하나 더 얻는 거니까. 방법을 알았다고 이게 바로 되면 세상에 고위 마법사라는 개념은 없었다. 모든 마법사가 고위 마법사인 세계에서 무엇을 고위 마법사라 칭하느냐는 문제였다. 내가 4위계로 고유 마법을 다수 보유 중이라는 특이한 상황이라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못 했다. 고유 마법을 만들어봤어야 알지. “그밖에 진척은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곤란하네요.” “의외군요. 논문의 내용 증명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제리가 이상한 말을 했다. 방금의 대화에서 왜 내가 그런 곳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아직도 나를 몰라? “저는 딱히 내용 증명에 관심이 없는데요.” “그럼 왜 곤란하단 겁니까.” “고유 마법을 사람들이 잔뜩 가지고 있어야, 하나쯤 저에게 줄 거 아니에요.” “하아.” 제리가 깊게 숨을 뱉었다. 왜 그러지? 알았다. 얼른 고유 마법을 만들어서 나에게 넘길 생각에 신나는 모양이구나? 나는 제리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제리 님. 마법은 감사히 받을게요.” “그나저나 루이나 씨. 당신 강의 안 합니까?” “하는 중인데요?”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지만 나는 성실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적영으로 원격 강의도 요즘은 안 한다. 피닉스 덕에 이동이 워낙 빨라져서. 쉬는 날에 의뢰를 처리하고 바로 돌아와 직접 강의를 하면 굳이 적영의 도움이 없어도 됐다. “그런 거치고는 너무 여유롭습니다만.” “제가 원래 여유를 가지며 살아요.” “논문을 만들고, 밖에 싸돌아 다니고, 대낮에 술을 마시고.” “이제야 깨닫는 건데, 듣기만 해서는 저 매우 열심히 사는데요?” 말의 의도를 모르겠어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행동의 여유가 아니라, 기한의 여유를 너무 가진다는 뜻이었습니다.” “기한의 여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루이나 씨.” “네.” “혹시 중간고사 시험 문제 내는 거, 까먹으셨습니까?” 난 또 뭐라고. 괜히 긴장했네. 탁. 벌꿀주가 든 잔을 내려놓은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런 건, 강의 계획을 짠 첫날에 전부 만들어놨죠.” “루이나 씨가 여태 보여줬던 그 어떤 기행보다 방금 말한 게 가장 안 믿기는군요.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성실하게 강의를 준비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듣는 걸까. 이해가 안 돼 눈물이 났다. 이 슬픈 마음은 오직 파이프 담배만이 달래줄 수 있는 법. 나는 입에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동시에 불이 붙었다. 이건…! “제리 님. 드디어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담뱃불이 붙는, 심담뱃불의 경지에 올랐군요?” “세스. 다음은 원소를 형태로 가공하는 법을 연습한다.” “알겠습니다.” 후우. 나는 연기를 하늘 위 구름에 섞어 보냈다. 문득 깨달은 건데, 요즘 주변 사람들이 내 말을 무시하는 빈도가 높아진 것 같았다. 크리스도 그렇고, 제리도 그렇고, 노아도 그렇고, 뮤란도 그렇고. 이러면 남은 건 레온밖에 없었다. 성정체성을 지켜준 값을 톡톡히 치르는구나. 역시 은혜 갚기는 레온. 레온의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요즘 검술 수련을 살짝 등한시했다. 청야가 들으면 굉장히 섭섭하겠지만, 이게 결국 바빠지면 검술 수련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달빛을 머금은 검을 뽑았다. 명장이 인생을 담아 제련한 검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한 기세를 내뿜었는데, 검신에 새겨진 엘프의 문양이 이 검의 출처를 명확히 알려줬다. 검림에서 얻어온 엘프의 검에 청야를 덧씌웠다. 물 원소 기반의 푸른색 마법이 엘프의 검을 뒤덮는다. 나는 침을 삼켰다. 청야가 검을 거의 다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흥분에 가득 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다음 학교를 가로질러 교국 측 학생들이 머무는 구역으로 달려가 외쳤다. “레온 님! 저희들의 청야가 또 컸어요!” 직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새하얀 정복을 입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는데, 1km 밖에서 봐도 교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그렇게 내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와중, 학생들을 가르치던 레온이 뚜벅뚜벅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뱉었다. “제발, 오해를 살만한 소리를 좀, 자제해주세요.” “무슨 오해요?” “…….” 레온이 입을 다물었다. 입으로 직접 말하기 부끄러운 듯했는데, 나는 레온의 머릿속 말을 그대로 꺼내줬다. “레온 님. 청야를 저희들 자식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떻게 사람 이름이 청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증거로, 들어봐라.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명예 추기경님은 언제나 밝군.” “사고방식이 비범해. 남들이 따라가질 못해.” “아주 뛰어난 마법사지.” “너네들 머리가 돌았다는 말을 잘도 돌려 말하는구나?” “이 새끼 감히 명예 추기경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묶어!” “와아아아!” 헛소문을 퍼트리려는 선동꾼을 착한 신도들이 묶어서 매단다. 나는 그 광경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지켜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교국이 참 신도 교육을 잘하네요.” “그래서 왜 왔습니까.” “말했잖아요. 청야가 1차 각성 직전이라고요.” “보여주시죠.” 레온의 말에 나는 순순히 검을 뽑아 연단 마법을 발동했다. 검을 감싼 청야를 유심히 관찰하던 레온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얼마 안 남았군요.” “그죠?” “검술 수련을 하러 오셨습니까?” “레온 님은 말이 잘 통해서 좋아요.” 얼른 연단 마법의 1차 각성에 도달하고 싶었다. 별 이유는 아니고, 1차 각성인 신체 강화에 도달하면 영구적으로 신체가 강화돼서. 이걸 최대한 빨리 얻고 싶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신체가 강화되면 그냥 살기 편했다. 외워라. “1차 각성을 그런 이유로 얻으려는 사람은 루이나 님이 처음일 겁니다.” “한 명쯤은 그래도 있지 않을까요.” “구체적으로는?” “크리스 님이라던가요.” 크리스는 힘이 쎄지면 더 많은 상품을 나르기 편해진다고 좋아할 거 같다. 레온은 빠르게 납득했다. “크리스 님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맞죠?” “어쨌건 검술 훈련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할―.” “여기에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레온이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누군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탓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범인을 검거했다. “헤이즈 님?” “오랜만이네.” “혹시 헤이즈 님의 시간은 남들보다 10배 빨리 가나요? 오랜만이라기에는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고작 몇 주 전인데요?” “뭐 하고 있었어.” “검술 수련이요.” 헤이즈가 왜 마법학교에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알 필요가 있나 싶었다. 헤이즈가 애도 아닌데 알아서 합리적인 이유로 움직였겠지. 내 말에 헤이즈는 ‘흐음’이라고 중얼거리고는, 흘긋 내 뒤를 살폈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까? 검술이면 내가 도움이 될 텐데.” “방금 그 말은, 제가 도움이 안 된다는 뜻입니까?” 헤이즈의 말에 반응한 건 레온이었다. 헤이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지. 하지만 아무리 팔라딘이라도 검술에만 집중한 나보다 검술을 더 잘 알 거 같지는 않은데?” “제가 팔라딘인 건 어떻게 아셨죠?” “감.” 헤이즈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 헤이즈를 레온은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루이나 님이 말해주셨겠죠. 헤이즈 님이라. 기억났습니다. 마법에 한눈을 팔아서 검술이 엉망이었던 기사 아닙니까? 아, 저도 루이나 님에게 들은 겁니다.” “뭐라고 했냐.” 헤이즈와 레온이 서로를 빤히 응시한다. 그 불꽃 튀는 신경전에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천검(千劍)도 그랬지만, 왜들 이리 나를 제자로 못 삼아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우든 상관이 없었다. 마법이야 켈튼 외의 사람을 스승으로 모실 생각이 없지만, 검술? 도움이 된다면 누구든 괜찮았다. 나는 양보할 마음이 없는 두 사람을 차례대로 살폈다. 얼른 검술 수련을 하고 마법을 전체적으로 점검하고 싶은데, 이러다 날 밤 새겠다. 안 되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상황을 정리할 마법의 단어를 뱉었다. “헤이즈 님. 그쯤하고 물러서세요.” “…하아. 그래. 내가 좀 과했어. 미안―.” “헤이즈 님은 레온 님한테 안 돼요. 포기하세요.” “……뭐?” 헤이즈가 멍하니 나를 봤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헷갈리는 건데, 나는 친절히 말을 되풀이해 줬다. “헤이즈 님은 레온 님한테 안 돼요. 포기하세요.” “야. 너 나랑 한판 붙어.” 성공. 나는 당황하는 레온과 열이 받은 헤이즈를 뒤로한 채, 적당한 곳에 앉았다. 스승으로 누굴 골라야 할지 모르겠으면 싸움을 붙여보면 되지. 저기서 이긴 사람에게 검술을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