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나는 꽤 유명 인사였다. 자의식과잉이 아니다. 정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이런 나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많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랑 친해졌을 때의 이득을 계산 중일 것이었다. 특정 사람과 친해졌을 때 생기는 이득은 그 사람이 가진 타이틀을 확인하면 예상이 됐다. 그럼 내가 가진 타이틀은 무엇이냐. 몇 개만 추려보겠다. 영지를 가진 계승 남작. 교국의 명예 추기경. 마법학교의 강사. 아델리안의 제자의 제자. 대충 보기만 해도 나를 이용하면 생기는 이득이 막 떠오르지 않나? 특히 영지를 가진 계승 남작이 미혼의 여자(중요)라는 게 귀족들의 입장에선 군침이 뚝뚝 떨어질 거였다. 어떻게 날 잘 꼬시기만 해도 영지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여간. 상황은 이랬는데, 여기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과연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랑 친해지려면 무슨 수를 쓰는 게 가장 좋을까. 정답은. 사교계에 초대하기입니다. “많네요.” 나는 산처럼 쌓인 초대장에 감탄사를 뱉었다. 솔직히? 내가 유명하다는 걸 안다고 했었지만? 직접 겪으니 그건 착각이었다. 산처럼 쌓인 초대장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내가 현재 화제의 인물이라는 걸 말이다. 고민이 깊어졌다. 이중 어디에 가야 마족을 잘 찾아낼지 헷갈렸다. 흠. 좋아. 팔짱을 푼 나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크리스 님도 초대장을 선별해 후보를 골라주세요.” “응? 나도 해?” “네.” “왜?” “초대장이 산처럼 쌓인 이유 중에, 크리스 님이 절찬리에 판매 중인 시리즈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될 거 같나요?” “자, 당장 일해야지. 초대장초대장.” 기묘한 노래를 부르며 크리스가 초대장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나는 옆에서 초대장을 들다가, 문득 생각나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호엘 님이 초대장을 잘 모아놔서 다행이네요. 아예 일을 날림으로 처리한 건 아니군요.” “…감사합니다.” “칭찬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사실 칭찬 맞아요.” “…감사합니다.” 호엘은 내 뒤에 공손히 서 있었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거치고는 술 냄새가 하나도 안 났는데, 아까 헐레벌떡 화장실에 갔다 온 게 원인이지 않을까 싶었다. “호엘 님. 가만히 서 있지 말고 호엘 님도 도우세요.” “어떤 식으로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네요. 초대받는 사람이 많고, 시끄럽고,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질 법한 곳이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내 말에 호엘은 헐레벌떡 초대장의 산을 뒤적였다. 그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어필에선 향수마저 느껴졌다. 흡사 병장의 명령에 몸을 격렬히 움직이는 이등병을 보는 느낌이라. 아무도 저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나도, 크리스도, 적영도. 따라서 호엘은 혼자 제 발이 저려 난리를 치는 거였지만, 놔뒀다. 열심히 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었으니까. 정말 의외에 공감도 잘 안되겠지만, 나는 호엘을 자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호엘은 내 영지를 대리해서 관리해 줄 거였다. 사고를 친 사람을 안고 가는 게 이상할 수 있다. 그건 나도 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딱히 호엘을 자를 이유도 없었다. 물론 호엘이 직업 윤리적으로 살짝 실수를 저지르긴 했으나, 딱히 횡령을 저지른 건 아니지 않나? 기껏해야 사용인이 고용인의 집에서 주인 몰래 술 파티를 벌인 수준인데…나열하고 나니 조금 쓰레기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 정도로 자를 생각은 없긴 했다. 그래도 호엘이 영지 관리 자체는 잘해서. 애가 일은 잘해 일은. 혹자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도덕적으로 이미 결점을 보였는데 일을 잘한 줄 어떻게 아냐고. 괜히 사람들이 직업윤리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직업윤리가 엉망인 사람은 업무도 엉망으로 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호엘이 횡령하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확신한다. 호엘은 일 자체는 멀쩡히 했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확인했으니 알지. “루이나 님? 왜 자꾸 쳐다봐?” “크리스 님은 이럴 때 도움이 많이 되네요.” “말 자체는 칭찬인데, 뭔가 느낌은 아닌 거 같아. 나 기분이 이상해 루이나 님.” 돈 관련이라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날카로운 크리스다. 이 돈에 미친 서큐버스가 횡령 증거를 못 찾았으면 그건 안 한 게 맞았다. 생각해 보니 서큐버스를 이미 찾았는데, 굳이 사교계에 진입할 필요가 있나? 없는 거 같은데? 얼른 가져다 바치고 의뢰 완수해야겠다. “크리스 님. 새로운 고유 마법은 잘 쓸게요. 고마워요.” “근데 루이나 님. 그래도 기왕이면 다른 사람을 쓰는 게 낫지 않아?” “누굴요.” “아무나?” 호엘을 해고하라는 건데,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긴 했다. 다만. “사람을 구하는 것도 일이에요. 괜히 귀찮게 심력을 낭비하기보다는 호엘 님을 쓰는 게 낫죠.” “그런가?”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한 번은 할 수도 있죠. 한 번은 용서해 주는 게 맞아요.” 너무 각박하게 구는 것도 효율이 낮았다. 게임 이론이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게 너그러워야, 세상도 나를 너그럽게 봐줬다. 내 말에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엘 님을 믿어? 그러다 이상한 짓 하면 어떻게 해?” “사람인데 실수 한 번 했으면 더 안 하겠죠.” “루이나 님. 그거 실수를 한 번 더 저지르면 사람 취급 안 한다는 말 같은데, 내 착각이지?” “정답은 60초 후에 공개할게요.” 옆에서 호엘이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초대장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뭐, 호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원래는 철저하게 일을 했지만, 영주라는 인간이 영지에 단 한 번도 안 들르니 느슨해진 느낌이라.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고 호엘처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앞으로도 영지를 완전 방치할 건데, 이런 상태의 영지를 잘 관리해 줄 사람을 찾느라 시간을 쏟기 보다는 호엘을 재활용하는 게 나았다. 호엘이 일은 잘해 일은. 윤리적인 문제가 걸린다면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게 잘 타이르면 될 일이다. 말했듯, 사람이면 실수를 두 번은 안 저지르겠지. 사람이면. “목숨을 걸겠습니다.” “너무 거창하니까 오히려 믿음이 안 가네요. 당장의 논란을 회피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거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감사합니다.” “사실 농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호엘을 영지 대리에 적합한 인재로 적당히 개조하고 나자, 곧 적당히 쌓인 편지가 나를 반겼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추렸는데도 이만큼 남았네요.” “1차 분류를 한 거니까. 다시 분류하자.” 그래도 이제 대충 후보의 윤곽이 드러나긴 했다.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은 매번 바뀌지만, 어떤 종류의 사람이 화려한 삶을 사는지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른 사람들은 전부 화려한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파티를 좋아했고, 사교계를 즐겼으며, 떠오르는 신예들과 교류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들. 진솔되게 고백하자면 나랑은 결이 안 맞는 녀석들이긴 했으나, 일이니까. 사람이 어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겠나. 결이 안 맞는 사람들과 잠깐 친해지는 것도 하기 싫으면,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까먹는 것 외에는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어디 보자. 나는 초대장을 뜯어 내용물을 읽었다. 지루하고 현학적인 인사말을 건너뛰고 나를 초대한 사람의 이름만 확인했다. [에스텔 백작부인] 코델리나 에스텔 백작부인은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컸다. 사교계에 안 좋은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은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뒤에서 음험하게 사람을 가지고 노는 이미지를 떠올리겠지만, 사교계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바. 상류층 또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타입은 싫어했다. 때문에 사교계에 강한 영향력을 뿌리려면 보통 구성원들에게 그만큼 은혜를 베풀어야 됐다. 예컨대 혼담을 주선해준다든가. 예컨대 체면을 살려준다든가. 예컨대 영애들을 잘 챙겨준다든가. 예컨대, 그냥 돈이 많다든가. 코델리나 에스텔 백작부인의 남편인 에스텔 백작은 돈이 많았다. 많다 못해 썩어났다. 추가로 애처가였다. 부인이 돈을 마음껏 쓰게 해줬다. 돈이 넘쳐나 파티를 자주 열고 사람을 자주 불러도 그건 결과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게 됐다. 어느 세계건 어느 시대건 물주는 존중을 받았다. 그게 인간의 양심이자 본능이었다. 돈이라. 나는 슬쩍 크리스를 흘겨봤다. 내 시선에 크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루이나 님? 왜 그래?” “크리스 님 덕에 어딜 가야 될지 결정됐어요.” “나 뭐 했어?” “비슷해요.” 돈은 사람을 홀린다. 돈에 깃든 마력은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았다. 냄새가 났다. 냄새가. 마족이 만일 감정을 먹고 싶어서 사교계를 돌아다닌다면. 반드시, 에스텔 백작부인의 파티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