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금발 금안의 여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내가 ‘당신은 ○○?!’라는 식으로 반응할 줄 알았나 본데, 정말 미안하지만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얘가 누구야.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걸 쓸데없이 잘 아는 인간에게 묻기 위해서 말이다. 크리스가 말했다. “저 사람 그 사람이네. 루이나 님한테 돈 빌려갔던 사람.” “아무 말이나 하는 걸 보면 크리스 님도 모르는군요.” “웃기지 마. 정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이 황금 마탑의 세피아 님을?” “황금 마탑은 알지만, 세피아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모른척 하지 마!” 세피아가 버럭 화를 내며 주변에 원소를 띄웠다. 각양각색의 원소가 세피아의 의지를 따라 주변을 빙글 돌았는데,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초대형 마법 보관소다! “누군가 했더니 황금 마탑의 대용량 도시…결전 병기 세피아 님이셨군요. 그러게 처음부터 마법을 쓰시지 그랬어요. 헷갈리잖아요.” “정신 나간년.” “그런데 용케 저를 알아봤네요? 보통은 한 번에 못 알아보던데요.” 전신 화상을 입었던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은 약간 차이가 있어서. 보통은 목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알아봤는데, 세피아는 그게 아니라 신기했다. 내 말에 세피아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너처럼 건방진 마법사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뇨. 솔직히 말하면 알아보는 게 이상한데요.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다니까요.” “네가 여태 단추 구멍 눈을 가진 사람만 만났나 보지.” “세상 모든 사람이 이상하다면, 사실은 본인이 이상한 걸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말을 끝낸 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입을 열었다. “크리스 님. 왜 그렇게 쳐다 보세요.” “빠안.” “적영도 그만 보세요.” [빠안.] “오해를 하는 거 같아서 보충 설명을 하자면, 저는 세상 사람들을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입에 침은 바르고 거짓말 해. 루이나 님.” “거짓말 아닌데요.” 억울하다 억울해. 비록 내가 세상 사람들을 마법의 대단한 점을 모르는 불쌍한 자들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정상인 걸 안다니까? 불쌍하게도 그들은 정상이라 마법의 대단함을 모르는 거야. 내가 도와줘야 돼. “야.” 돌연 세피아가 말을 뱉었다. 그녀는 따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에 왔다는 건 너도 논문을 발표하러 온 거지? 마법학교의 강사 자격으로?” “맞긴 한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 “아까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저에 대해 굉장히 잘 아시네요?” 내가 성배 퀘스트를 완수한 것도, 악신의 교단을 저지한 것도, 리치를 죽인 것도, 마법학교의 강사가 된 것도, 의 사용자인 것도, 고유 마법을 다수 보유한 것도 전부 다 아는 게 신기했다. 물론 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잘 알았다. 마치. “누가 보면 제 소식을 하나하나 다 따로 조사한 줄 알겠어요.” “…….” 진짜였냐고. 나는 어이가 없어 질문했다. “혹시 스토커세요?” “아니야!” “그럼 뭔가요. 혹시 저번에 저한테 마법을 못 준 게 미안해서 그런가요?” “마법 좀 그만 뺏어가.” “뺏어가는 게 아니에요. 질문에나 대답하세요.” “…….” 세피아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크게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는데, 내가 눈을 깜빡이자 옆에서 누군가 나를 콕콕 찔렀다. 당연하지만 크리스였다. 나는 세피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꺼냈다. “뭔가요. 크리스 님. 지금 바쁘니 돈은 나중에 줄게요.” “루이나 님. 저거 그거 아니야? 나를 패배시킨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크리스 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낡고 낡은 귀족 영애가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머리가 꽃밭이어야만 가능한 정신머리로 마법사를 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마법사로서 끝난 거니 얌전히 저에게 마법을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는 게 좋아요.” 정말, 이래서 비마법사들이 안 된다. 비우고 비워 그 안에 이성을 가득 채우는 게 마법사다. 크리스가 말한, 이제는 웃기지도 않는 온실 속 영애 행동을 마법사가 하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안 되겠다. 나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크리스 님. 숙소로 가자마자 마법사 특별교육을 시켜 드릴게요. 그런 상태로 세상을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루이나 님.” “네.” “세피아 님 눈물 맺혔어.” 나는 돌렸던 시선을 다시 세피아에게 옮겼다. 세피아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아하. 이해 완료. 나는 세피아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생각해보니 요즘 사람들은 너무 쿨하려고만 해요. 세피아 님처럼 뜨거워도 나쁘지 않아요.” “…여기에 왔다는 건 너도 논문을 발표하러 온 거지? 마법학교의 강사 자격으로?” “거기서부터 다시 하겠다고요.” “…범재치고는 나름 노력한 마법이네. 황금 마탑의 세피아야. 너는?” “너무 뒤로 갔어요.”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아예 유아 퇴행을 시작할 것 같았기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논문을 발표하러 온 거 맞아요.” “나도 논문을 발표하러 왔어. 여기서 승부를 보자. 누가 더 좋은 논문을 냈는지로.” “세피아 님.” “뭐야.” “인용 수로 승부를 보면 이해라도 하는데, 순수하게 뭐가 더 좋은 논문인가를 어떻게 판단해요. 혹시 논문 처음 내보세요?” “……나 집에 갈래.” 어디 가. 마법 주고 가. * “4대 원소 적성은 특별한 재능이 아닌 인류의 기본 능력이었으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단일 원소 적성으로의 특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제 논문의 핵심 주장입니다.”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세피아는 단상에서 내려갔다. 박수가 쏟아진다. 그만큼 세피아의 논문은 흥미로웠다. 인류가 본디 4대 원소 적성을 타고났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구 결과에 따라 마법사의 가능성이 어림잡아도 4배로 늘어났으니까. 물론 그런 주장은 전부터 있긴 했지만, 세피아의 논문은 자신이 타고난 4대 원소 적성을 바탕으로 치밀한 연구가 밑바탕 됐기에 신뢰도가 높았다. “과연 황금 마탑인가.” “저 나이에 고위 마법사가 된 건 우연이 아니군.” 황금 마탑의 정수를 흡수한 세피아는 마법사 세계에서 유명인사였다. 인류의 상아탑이자 지식의 정점인 황금 마탑이 애지중지하는 차세대 대마법사다. 유명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거기에 과연 황금 마탑의 눈은 틀리지 않았는지 세피아는 20살도 안 된 나이에 5위계 득위(得位) 마법사가 됐다. 유명세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세피아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렸다. 뭐가 ‘순수하게 어떤 것이 더 좋은 논문인지 가리는 건 힘들어요’야. 세상에 우열을 나누지 못하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조차 우열을 나누는 게 가능했다. 하물며 논문? 주변 사람의 반응만 살펴도 구별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세피아의 논문 발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여태 논문을 발표한 그 누구보다 열띤 반응을 얻었으니까. 세피아는 어렸을 적부터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혈통? 공작가의 영애로 황실에서도 함부로 하기 힘든 신분이었다. 외모? 태어나자마자 직계와 방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재능? 우연히 만난 황금 마탑주가 보자마자 눈이 돌아갔을 정도로 뛰어났다. 세피아는 늘 자신을 위해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한 번도 세계는 세피아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항복.’ ‘과연 황금 마탑의 결전병기 세피아 님이에요. 너무 강해서 이기기 힘드네요.’ ‘수고하세요.’ 딱, 머리가 한 720도 쯤 돈 마법사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는 뜻이다. 루이나에게 패배한 뒤로, 루이나가 비록 과거의 환영일지라도 제국제일검을 홀로 쓰러트린 뒤로 세피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이,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세피아는 루이나를 약간 조사했다. 덕분에 세피아는 루이나를 약간 알았다. 루이나 엘피니엘. 4위계 화염 마법사. 제국을 반란으로부터 지킨 마법사. 성배를 되찾아 온 마법사. 악신의 교단과 이상할 정도로 자주 부딪히는 마법사. 사우스 클랜드 우드 출신. 아델리안의 아이들인 5위계 마법사 켈튼을 스승으로 둠. 스승에게 을 물려받음. 기껏 받은 영지에 단 한 번도 안 가봄. 물질적인 거에 관심이 없음. 으로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유 마법은 과 . 공간계 고유 마법이 하나가 더 있는 듯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추측하기 힘듦. 불꽃을 극한으로 압축하는 게 특기. 등불을 계속 들고 다니는 걸로 봐선 규칙으로 마법의 위력을 늘리는 타입.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많음. 아마 마력의 한계를 매번 넘는 방식으로 수련을 할 것. 현재 불로불사를 추적 중. 영원에 관심이 지대함. 그리고. 마법에 미쳤음. 마법에 미친 인간, 루이나 엘피니엘. 세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단상 위에, 마침 그 인간이 올라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한 루이나는 곧 논문 발표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피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정할게. 너는 확실히 뛰어난 마법사고, 저번에 날 이긴 건 우연이 아니야. 하지만 이번엔 달라. 그 어떤 논문도, 내가 발표한 논문은 못 이겨. 따라서 이번엔 내가. 이겼―! “바로 들어갈게요. ‘복수 고유 마법 능력 획득에 관한 체계적 접근법’.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 ……? 순간 세피아의 머릿속에 갈고리가 생겼다. 그런 세피아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누군가가 루이나에게 질문했다. “잠깐만. 뭐라고 했지?” “네? 아. 바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이게 문제였나요? 죄송해요. 발표 전에 스몰토크를 먼저 해야 되는 문화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아니. 그거 말고. 그다음!” “아, 복수 고유 마법이요. 말 그대로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고유 마법은 고유하고 유일하기에 고유 마법이야!” 남자 마법사가 소리친다. 그만큼 루이나가 하는 말은 엉터리였다. 고유 마법이 왜 고유 마법인가.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불가능한, 한 마법사의 삶이 반영되는 유일한 마법이니 고유 마법 아닌가. 세피아도 남자 마법사의 말에 동의했다. 고유 마법을 얻고 더 확실히 알았다. 이런 걸 여러 개 얻는 건, 단순히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허나 어째서일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아니었다. 세피아는 두근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루이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루이나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