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루이나는 어둠 속에서, 모든 게 사라진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준 불꽃을 움켜쥐는데….” 화륵. 불꽃이 타오른다. 주변에서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붉은 불꽃이, 푸른 불꽃으로 바뀌었다. 푸른 불꽃을 손에 쥔 마법사의 앞에서 웬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청염이라고?!” “여태까지 잘못 생각했어요. 불꽃은 처음부터 제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었던 거예요.” 직후. 푸른 불꽃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막이 내려가고, 남자의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루이나는 악신의 교단을 무찌르고 성배를 되찾았다고 한다.” 짝. 짝. 짝짝짝. 박수가 쏟아진다.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르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친다. 나?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깜빡였다. 콕콕. 누군가 나를 찌른다. 당연하지만 크리스였다. 크리스가 말했다. “루이나 님? 어때? 내 회심의 연극은?” “고증이 많이 이상한데요.” 다른 것보다 대사가 이상했다. 마음속에 처음부터 불꽃이 불타고 있던 게 뭔데. 저게 대체 무슨 깨달음이야. 허나 내 말에 크리스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루이나 님. 자꾸 아마추어처럼 굴래? 지루하고 현학적인 루이나 님의 깨달음을 고증해 봤자 아무도 안 좋아해. 여기선 모두가 아는 유명한 깨달음을 대충 아무거나 가져다 쓰는 게 맞아.” “저는 언제부터 프로가 된 걸까요.” “그래서 점수는?” “연출은 나쁘지 않네요.” 조명의 사용법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특수 효과를 잘 썼다. 특히 청염에서 감탄했다. 순수하게 마법만으로 청염을 타오르게 하려면 최소 4위계는 돼야 할 텐데, 그런 고급 인재를 연극에서 쓸 리는 없었다. 분명 다른 방법을 쓴 거였다. “연금술의 힘을 빌렸어.” “뮤란 님인가요. 다른 얘기인데, 그 사람 저를 따라다니는 목적을 잊은 게 아닐까요? 언젠가부터 저에게 연금 마법을 가르쳐주기보다 자기 할 일만 하는 거 같은데요.” “좋은 게 좋은 거지. 루이나 님도 이제 딱히 뮤란 님의 교육이 필요 없잖아.” 그건 맞지만. 뭐, 크리스의 말대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뮤란이 크리스를 도와줘서 연극이 잘 되면 나도 좋았다. 나는 크리스의 최대 투자자니까. “자, 루이나 님! 다음 코스야!” “와아.” 나는 크리스를 따라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갔다가, 레스토랑의 인테리어에 감탄했다. 누구는 말라비틀어진 빵을 먹는데, 누구는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니. 이게 빈부격차지. 사실 해피 중세랜드라 농부도 말라비틀어진 빵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흰 빵을 먹긴 하지만. 역시 해피 중세랜드가 최고야. 나는 스테이크와 벌꿀주를 주문했다. 여기서도 벌꿀주냐고 크리스가 질색했지만, 나는 와인을 별로 안 좋아했다. 사람들이 그걸 왜 좋아하는지 알 때까지 계속 먹어봤지만, 결국 그 끝에 내가 안건 하나다. 사람들은 맛없는 걸 좋아한다는 거다. 나는 먼저 나온 벌꿀주를 홀짝였다. 그러자 크리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무슨 중대 발표라도 할 것처럼 구네요.” “루이나 님. 중대 발표야. 드디어 우리의 인생을 바꿀 비장의 무기가 완성됐어.” 탁. 크리스는 아까부터 옆구리에 끼고 있던 포장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포장지를 풀자, 그 안에서 무언가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소망을 이뤄낸 망령이었다. 기어코 용이 된 강철이가 세상을 내려다본다. 굉장히 잘 만든 조각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노력하셨네요.” “루이나 님. 나 힘들었어. 특히 계약한 장인들이 자꾸 디자인을 멋대로 바꿔서….”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크리스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에피타이저고, 메인 메뉴는 이거야. 짠!” 크리스가 테이블에 새로운 조각상을 올렸다. 그건 메이드복을 입은 은발 녹안의 여자였다. “…….” “어때 루이나 님? 마음에 들어?” “이게 뭔가요.” “딱 보면 알잖아. 메이드가 된 루이나 님이야.” 와. 나는 기어코 감탄사를 뱉었다. 이 돈에 미친 서큐버스는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구나. 이거 다른 평행 세계에선 돈을 위해 인류도 팔아먹은 거 아니야? 나는 메이드 조각상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다 좋은데, 메이드복은 조금 뜬금없지 않나요?” “루이나 님.” “뭔가요.” 내 말에 깍지를 낀 크리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진지하게 말을 뱉었다. “귀여우면 뭐든지 용서돼.” “저한테는 용서를 못 받을 거 같은데요.” “돈이 되는데?”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에요. 하지만 저는 착하니 허락해 줄게요.” “루이나 님이 최고야.” 덤으로 크리스는 내게 책도 줬다. 현재 절찬 판매 중인 이었다. 성배라는 기적의 산물이 교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식이어서. 사건의 중심이었던 내 이야기가 담긴 책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곧이야. 곧 모든 사람의 집에 루이나 님의 책이 꽂히고, 루이나 님의 조각상이 모든 사람의 집에 놓이는 계획이 완성돼.” “힘내세요.” 상관없는 얘기인데, 레스토랑의 음식은 그저 그랬다. 다음부터 누구랑 식사할 일이 있으면 그냥 집으로 데리고 가서 테리가 해주는 음식이나 먹어야겠다. 사용인으로 테리를 고용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집안일이면 집안일, 요리면 요리 못 하는 게 없었으니까. [너도 고문이면 고문, 미친 짓이면 미친 짓 전부 다 잘하지 않나?] “자 따끔해요.” 나는 바람 꼬챙이로 뽀삐를 콕콕 찔렀다. 그러자 뽀삐가 허허 웃었다. [이래봤자 너만 힘들다.] “하지만.” [하지만?] “안 하면 심심하잖아요.” 이게 다 뽀삐랑 놀아주는 내 마음인데, 이걸 몰라주네. 그럼 너 계속 에 갇혀 있을 거야? 가끔은 산책도 해야 될 거 아니야. [화염에 타오르고, 바람에 썰리고, 암석에 눌리고, 뇌전에 감전되고, 물에 꿰뚫리고, 나무에 목이 졸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다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구나.] 나는 포식의 불꽃을 피워내 뽀삐를 물어뜯으며, 천천히 질문했다. “뽀삐 님.” [말해라.] “외신 추종자들의 정보를 더 말하세요.” [내가 아는 건 이미 다 말했다만.] “그게 끝일 리가 없잖아요.” 뽀삐가 말해준 외신의 정보라고 해봤자 몇 개 없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을 떠다니는 차원 침략자. 외법의 정점에 선, 신성을 빼앗는 약탈자들. 확실히 뽀삐가 말해준 건 기존에는 없던 외신의 정보였으나, 문제는 그거였다. 실속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침략하는 건지, 왜 이곳을 침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계획의 진행도가 어떤지를 알려줘야지, 저런 두루뭉술한 것들은 말해 봤자였다. [끝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게 끝이다.] “쓸모가 없네요.” [그거 말고 다른 건 도와줄 수 있다. 이를테면 외법 교육이라든가. 나한테 외법을 배워놓고 한 번도 안 써보지 않았나? 아깝지 않나? 이세계의 마법인데? 지금 써보겠다면 내가 도와주겠다.] 이놈의 뽀삐는 이게 문제였다.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유쾌하게 행동하다가도, 은근슬쩍 노림수를 던졌다. 대체 외법에 뭐가 숨겨졌길래 자꾸 내가 외법을 쓰도록 유도하는 거지. 외법을 쓰면 외신과 연결되기라도 하나? 나는 포식의 불꽃을 하나 더 피워내 뽀삐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뽀삐의 말을 정정했다. “이세계 마법이라는 말은 자제해주세요. 외법은 마법이 아니거든요.” [어째서지?] “낭만이 부족해요. 낭만이.” 외법이 마법이면 마술도 마법이다. 그러니 헛소리는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거치고 외법에 흥미가 많아 보이던데?] “흥미롭긴 하잖아요.” 어디 외법 안전하게 쓰는 방법 없나. 아델리안이라도 찾아가야 되나. 나중에 다시 만나면 외법 괜찮은 거 맞냐고 반드시 물어봐야겠다. [흥미로우면 그놈의 되도 않는 검술 수련은 그만하고, 외법부터―.] 나는 쫑알대는 뽀삐를 안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갔다. 강의 시간이었다. 강의실로 향하자 익숙한 5명이 미리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아, 타시아, 카이렌, 프린드, 엘피. 강단 위에 선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신기하게도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요. 어째서일까요.” “그야 스승님이 그동안 나무 인형한테 강의를 외주줬으니까.” “노아 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비록 제 몸은 강의실에 없었어도, 강의는 제가 원격으로 직접 진행했잖아요.” “나는 그 둘의 차이를 모르겠어….” 몰라? 그걸 모르면 마법사 실격인데? 아무래도 노아를 위한 특별 수업을 준비해야 될 듯했다. 기대하도록. 출석을 부른 나는 준비한 커리큘럼을 진행했다. ‘먹어서 배우는 원소의 이해’의 핵심은 결국 경험을 통해 상위의 경지를 유사하게 느껴보는 거였다. 유사하게 느껴본다. 이게 중요했다. 상위의 경지로 갈수록 원소에서 다양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걸 넘어 점점 원소와 가까워졌다. 괜히 4위계 마법사를 동위(同位) 마법사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마법사는 완성될수록 점점 원소와 하나가 됐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나는 매우 잘 알았다. 4위계였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느꼈던 감각을 역설계하면, 어떤 식으로 세팅해야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 추측이 됐다. 나는 땅을 파 불구덩이를 완성한 후, 프린드를 데려왔다. “뛰세요.” 저번에 귀족 영애가 울면서 도망친 이후로 이제 내 강의실에 화염 원소 적성은 없었지만, 프린드는 예외였다. 얘는 4대 원소 적성이라. 덕분에 다양한 원소를 가지고 놀…경험시켜 줄 수 있어서 나도 신났다. 불구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린드는, 곧 내게 말을 걸었다. “강사님.” “네.” “이거 효과 있는 거 맞―.” “자 번지!” 나는 프린드를 나무줄기로 밀어 불구덩이에 빠트린 후, 노아를 데려왔다. “스승님? 나는 뇌속성 원소 적성인데?” “번개엔 불도 포함되기 마련이에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아아악!” 요즘 건방진 노아에게도 즐거운 체험을 시켜주니 속이 다 시원했다. 잘 하자 노아야. “루이나 님.” “네. 카이렌 님.” “저도 하겠습니다.” “…카이렌 님은 수속성 원소 적성이지 않나요?” “물에는 불도 포함되는 법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렌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당황스럽네. 아니다. 역시 카이렌이다. 열정이 뛰어났다. 나중에 상으로 칭찬 벌꿀주라도 줘야겠다. 그렇게 학생들과 즐거운 강의를 마친 나는 여유롭게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제 방에서 나가세요.” “뮤란 님 요즘 안 보여서 챙겨주러 왔어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가세요.” 자꾸 나를 쫓아내려는 뮤란을 무시한 채 나는 뮤란의 방 곳곳에 있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연금술사라 그런가.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았다. “뮤란 님. 이건 뭔가요?” “…별빛이 담긴 보석이에요.” “이건요?” “…그건 얼음 불꽃이에요. 연금술 재료죠.” “이건요?” “…그건 제 속옷이에요.” 속옷이 왜 방 안에 굴러다녀. 정리 좀 해라 정리 좀. 나는 뮤란의 속옷을 내려놓으며 방 안을 마저 구경했는데, 그런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일종의 섬이었다. 그게 굉장히 신기해 나는 만질 생각도 못 하고 뮤란에게 질문했다. “이건요?” 내 말에 뮤란은 슬쩍 시선을 옮겼다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천공의 섬을 재현한 미니어처예요.” “이게 천공의 섬이라고요.” 톨트피어가 만들었다는 천공의 섬의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생긴 건 처음 봤다. 나는 천공의 섬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천공의 섬이라. 언젠가 가보긴 해야 되는데, 시간이 안 나네. 좋아. 우선 불로불사부터 얻고, 그다음에 가자. * “저보고 천공의 섬에 가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