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사도는 죽었다. 반신이 검을 뽑은 거다. 코앞에서 탭댄스를 추던 녀석이 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탐식은 도주했다. 녀석을 지옥 끝까지 따라갈 기세로 추격했지만, 아쉽게도 탐식의 도주 능력은 매우 좋아서. 와 피닉스의 힘을 빌렸음에도 붙잡지 못했다. 물론 천검이 나서줬으면 설사 도주의 신이라도 반으로 갈라져 죽었겠으나…. “너도 만나서 알겠지만, 그놈에게 기대라는 걸 하면 안 된다.” “검 외의 것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요.” 내 말에 실버즈라의 부인격이 웃었다. 동감이라는 듯 말이다. 실버즈라의 주인격은 오만의 사도를 반으로 갈라버린 후, 내 얼굴을 슬쩍 본 다음 다시 내면의 세계로 돌아갔다. ‘저 정신병자가 검의 궁극을 보여준다고? 안 본 사이에 눈이 많이 망가졌군. 저건 검을 쥐여 주면 그걸로 마법을 쓸 인간이다’라고 말한 건 덤이었다. 근데 다 좋은데, 내가 왜 정신병자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사람을 정신병자 취급하다니. 억울하네요.” “아무것도 안 했다고?” 내 말에 실버즈라의 부인격이 삐딱하게 끼어들었다. 저 인간은 갑자기 왜 저래. 나는 친절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오만의 사도의 시체를 검으로 푹푹 쑤시던데, 이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검이 아니라 단검이에요.”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마법 구출 시도는 해봐야지. 즉사해 버린 탓에 아무것도 구출하지 못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아무튼 이건 인정하시죠? -마법:인정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실버즈라의 부인격…. 아, 계속 이렇게 부르니까 헷갈리네. “저기요.” “뭐지?” “이름을 짓는 게 어떤가요.” “내게 이름은 가치가 없다만?” “그럼 제가 지어드릴게요. 음. 백구는 어때요?” “라즈라고 불러라.” “좋아요.” 나는 라즈에게 물었다. “실버즈라 님은 죽기 직전까지 몰려도 내면 세계에서 안 나오시나 보네요?” “검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놈이니까. 자기 목숨보다, 당장 한 번 더 검을 휘두르는 게 중요한 놈.” “죽으면 다 끝이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어쩌겠냐. 실버즈라는 아니라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죽으면 더는 검술을 익히지 못할 텐데, 이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손해와 이득을 재는 저울이 망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뇌 용량이 작은 걸 수도. 뇌에 검 말고는 아무것도 못 넣는 사람이면 이해됐다. 하여간. 여기까지 들으면 알겠지만, 이런 실버즈라가 탐식을 죽여주길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거였다. 내 생각엔 오만의 사도도 자신을 죽이려고 해서 죽인 거지, 오만의 사도가 얌전히 도주했으면 그대로 풀어줬다. 진짜. 검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복구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옆에서 라즈가 중얼거린다. 나는 라즈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살폈다. 하늘에 닿을 것 같았던 건물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악신의 교단은 실버즈라만 습격하지 않았다. 실버즈라를 따르던 검림 또한 악신의 교단에게 습격을 받았다. 어쩐지 실버즈라랑 오만의 사도가 난리를 치는데 검림이 지원을 안 와서 이상하다 싶더니, 각자의 사정이 존재했었다. 라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고생만 하고 얻은 게 하나도 없네.” “얻은 게 왜 없나요. 오만의 사도를 해치워서 세상을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들었잖아요.” “너랑 너무나 안 어울리는 말인데?” “저는 세상의 평화를 원하는 평화의 마녀예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세상이 평화로워야 사람들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많아져야 인재가 많아졌다. 마법이 많아지는 거다. 나는 마법을 위해서라면, 세상도 구할 수 있었다. “평화의 마녀가 아니라 강탈의 마녀겠지.” 허나 그런 내 말에 헤이즈가 반박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헤이즈 님. 자신만만하게 나서놓고, 검이 뜯어먹히자마자 도망간 주제에 기세가 등등하네요.” “내가 언제 도망갔어.” [아빠. 루이나 님을 두고 도망간 거 내가 다 봤어. 아빠에게 실망했어. 이제 평생 루이나 님과 살게.] “미치겠네.” 헤이즈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최근 틈날 때마다 저러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헤이즈처럼 살았으면 거북목이라는 질병은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거북목은 아니지만, 일단 헤이즈를 따라 하늘을 봤다. 구름이 아직도 반으로 갈라져 있다. 실버즈라가 남긴 상흔이 얼마나 깊었는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구름엔 여전히 기다란 자상이 남았다. 나는 헤이즈에게 말했다. “만족하셨나요?” “솔직히 말해?”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의미는 없잖아요.” “별 감흥은 없긴 해.” 현시대 검의 정점이 보여준 흔적을 시야에 담던 헤이즈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대충 알긴 했어.” “뭐를요.” “정점에 이르려면, 미쳐야 된다는 걸.” “확실히 실버즈라 님이 제정신이 아니긴 해요.” “그러니까.” 흠. 뭔가 이상한데. “헤이즈 님?” “왜?” “실버즈라 님 얘기하는 거 맞죠?” “네 덕분에 많이 배웠어.” “그만 배우세요.” “고마워.” “그만 고마워하세요.” 뭐, 이걸로 헤이즈는 스승이 내준 숙제를 완료했다. 검의 정점을 코앞에서 구경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니 사실상 120퍼센트 완료였다. 검림도 간만에 실버즈라의 검을 구경했으니 이득이었고, 라즈? 라즈는 살았잖아. 한잔해. 나? 나도 포식이 4위계에 올랐으니까. 물론 진작 공평의 특징을 통해 4위계가 된지라 큰 이득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특징이 성장할수록 고유 마법을 얻을 확률이 높아져서. 무조건 좋았다. 다만 문제라면 기껏 검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건데, 이것도 괜찮았다. “초대 황제의 검 그거 별로더라고요.” “네가 말하니까 미련이 남아 보인다. 그러다가 눈 돌아서 초대 황제의 검 가져간 도둑놈 죽여버리겠다고 날뛰는 거 아니지?” [아빠. 루이나 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마음씨가 매우 착해. 천사님이야. 음해를 그만둬.] “그거 그만하라고 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알겠습니다. “근데 초대 황제의 검은 진짜 별로였어요.” “왜? 성능이 별로야?” “그건 아닌데요, 음. 효율이 별로예요.” 초대 황제의 검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잠깐 손을 댄 것만으로도 나는 초대 황제의 검에 담긴 별을 부수는 가능성을 체험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인생의 교훈 하나. 결국 모든 건, 실제로 사용이 가능해야 의미가 있었다. 초대 황제의 검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 그걸 얻기 위해선 맹세를 해야 됐다. 인간을 버리고, 인류의 구원자라는 기계장치로 살겠다고 맹세를 해야 됐다. 마법의 구원자였다면 고민했겠지만, 인류의 구원자는 조금.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그래서 걔는 누구냐? 누구길래 갑자기 끼어들어서 초대 황제의 검과 계약을 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 슬쩍 사라진, 느닷없이 끼어들어 초대 황제의 검을 가져간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 남자가 맞나? 목소리는 남자였지만,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렸는데 목소리도 바꿨을지 누가 아는가. 그래도 정황상 남자가 맞으니까. 남자라고 하겠다. 나는 가면남이 입은 옷을 주목했다. 남색의 로브. 진짜 이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옷의 소재와 마감이 너무 좋았다.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저런 옷을 최근 마법학교 근처에서 파는 걸 봤었다. 마법학교 교수? 아니면 학생? 그것도 아니면 마법학교와 상관없는 사람? 흠. 잘 모르겠다. 게다가 어차피, 큰 관심도 없었다. 아무리 연단 마법으로 만들어졌어도 초대 황제의 검은 검이다. 그리고 연단 마법은 마법이라기엔 이질적인 부분이 많아서. 솔직히 이걸 마법이라 부르는 게 맞는지 의심될 때도 많았다. 별개로 연단 마법을 주면 받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기에 초대 황제의 검에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하나. 마법이었다. 마법 얘기 자꾸 하니까 마법이 마려워지네. 안 되겠다. 나는 피닉스에 올라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헤이즈 님은 저랑 다시 만날 때까지 꼭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놔야 해요.” “얼른 가라.” * 오늘도 체스 특별 활동에서 수많은 승리를 챙긴 프린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린드? 어디 가냐?” “이만 돌아가서 쉬어야지.” 기숙사로 돌아간 프린드는 침대에 앉았다. 룸메이트가 돌아오려면 멀었기에 프린드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손으로 덮었다. [맹약자여. 머리가 아파 보이구나.]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큰 건 하나 해결해서 마음이 편해져서 그래.” [시간을 거슬러 세계를 구원하는 구원자라. 내 맹약자에 걸맞은 서사긴 하군.] 이클립스가 웃는다. 이클립스의 반응에 프린드도 웃음으로 대꾸해 주려다가, 기운이 나지 않아 짧게 숨을 뱉었다. 이번에 프린드가 얻은 건 많았다. 첫 번째, 천검의 생존. 이건 매우, 매우 큰 업적이었다. 검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없던 미치광이는, 본인의 주장대로 저번 시간대에선 오만의 사도에게 목이 베여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천검을 먹어 치운 ‘탐식’이 급속도로 성장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게 인류의 입장에서 매우 안 좋은 분기점이었다. 허나 이제 그런 미래는 사라졌다. 그것이 굉장히 기꺼운 프린드였다. 두 번째, 오만의 사도 사망. 오만의 사도는 악신의 교단의 주요 인물이었다. 악신의 교단이 본격적으로 준동하는 지금부터 정말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게 전부 사라지는 거다. 얼마나 계획이 편해질지 감도 안 잡혔다. 아쉽게도 탐식은 생존했지만, 천검을 먹어 치우지 못한 탐식은 아직 안 무서웠다. 아직은 말이다. 마지막. 이클립스 확보. 저번 시간대에선 악신의 교단에 의해 소멸했던 이클립스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프린드는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격을 무시하고, 권능을 무시하고, 법칙을 무시하는 이클립스다. 이클립스만, 이클립스만 있다면―. [맹약자.] “무슨 일이야.” [그래서 나와 맹세해서 무엇을 죽이고 싶은 거지?] 이클립스의 질문에 프린드는 멈칫했다. 무엇을 죽이고 싶냐라. “신살의 검을 손에 넣어서 죽이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지.” [신인가.] 프린드는 지금은 미래가 되어버린 과거를 떠올렸다. 세상이 불탄다. 모든 생명체가 비명을 지른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검게 변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한 명의 초월자가. 아니. 신이 되어버린 승천자가, 오만, 나태, 질투, 색욕, 분노가 섞인 시선으로, 그리고 그 모든 신성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시선으로 프린드를 내려다봤다.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승천자의 얼굴은 늘 왜곡돼 있다. 승천자가 신이 되기 전부터 계속. 따라서 승천자의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승천자가 손을 든다. 직후. 검은 불꽃이, 세상을 먹어 치우기 위해 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오는 장면을 차분히 곱씹던 프린드는, 이내 자신이 회귀하면서 계속 품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봐. 이클립스.” [무엇이지.] “너, 마신도 죽일 수 있어?” [마신이라. 윤회교의 신을 말하는 건가?] “아니.” 확실히 녀석은 악신의 교단이, 윤회교가 배출한 승천자였으나, 딱히 윤회교와는 관련이 없었다. 정확히는. 녀석의 본질이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한 박자 쉬고. 프린드는 차분히 말을 뱉었다. “너, 마법의 신도 죽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