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현재 전장에는 오만의 사도, 실버즈라, 폭식의 사제인지 뭔지 모를 남자, 헤이즈,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상위 경지끼리의 싸움에서 하위 경지는 도움이 안 됐다. 물론 예외로 기사들의 합격진이 있었는데, 하여간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하위 능력자는 상위 능력자의 싸움에서 빠져주는 게 맞았다. 그래서 나도 실버즈라와 오만의 사도의 싸움을 구경만 했었다. 7위계급의 싸움에 끼는 건, 으로 고유 마법을 여럿 수집한 나도 무리였으니까. 다만 그것도 웬 남자가 느닷없이 끼어들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만족스럽다는 듯 배를 두들기는 남자는 나와 헤이즈를 흘긋 살폈는데, 그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마법과 검격에 정통으로 당한 거치고는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맛없는 놈들밖에 없네.” 사람을 음식으로 보는 시선에도 헤이즈는 검을 앞으로 겨눈 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랑 헤이즈의 공격을,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걸 막았다고 표현하는 건 정확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래. ‘먹어 치웠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모든 공격을 먹어치워 없애다니.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허나 그럼에도 저게 오만의 사도보다는 나았다. 우리가 괜히 오만의 사도와 실버즈라의 싸움은 구경만 하다가, 저 남자가 등장하자마자 끼어든 게 아니었다. 오만의 사도와 다르게 저 남자는, 7위계급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랑 헤이즈가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자, 저 멀리 있던 오만의 사도가 실버즈라를 압박하며 소리쳤다. “탐식! 천검도 아니고 고작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하진 않겠지!” “시끄러.” 탐식? 뭔가 이상한 이름에 내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남자가, 탐식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탐식의 손에 입이 주욱 생긴다. 탐식이 손을 휘두르고, 아그작. 헤이즈의 검이 뜯겨 나간다. “이 무슨!” 헤이즈가 기겁하며 검을 뺐다. 연단 마법으로 보호 중이었음에도 단번에 당한 거다. 당황할 만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탐식이 다른 손으로 헤이즈의 목을 노렸지만, 헤이즈의 망토가 스스로 움직여 탐식의 팔을 감쌌다. 이어서 헤이즈의 장갑이 한 올씩 풀어지며 바람이 된다. 검에 바람이 휘감기고, 헤이즈는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돌풍이 송곳이 돼 탐식을 꿰뚫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탐식의 몸에 길게 생긴 입이, 바람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몸에 생성한 입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는 건가? 이러면…. 나는 등불을 흔들었다. 등불에서 시작된 불꽃이 하늘을 달린다. 직각으로 꺾이며 수없이 궤도를 뒤튼 불꽃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탐식을 노렸다. 콰앙! 폭발이 인다. 그러나 이번에도 탐식은 아무렇지 않게 내 마법을 먹어 치웠다. 빠른 속도와 불규칙적인 공격은 소용없다. 이건 파훼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정공법. 등불 안에 불꽃이 모인다. 한계까지 압축된 불꽃이 완벽한 구체로 변한다. 거기에 약간 구멍을 뚫자, 불꽃의 기둥이 허공에 세워졌다. 번쩍.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 빛이 세상을 밝히고, 그 앞에 우뚝 선 탐식이 손을 들었다. 모든 빛이 탐식의 오른손에 빨려 들어간다. 기어코 초압축 불꽃까지 먹어치운 탐식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다음 말했다. “그 힘. 맛있어 보이는걸?” 직후. 탐식의 왼손바닥에 입이 주욱 생기더니, 그곳에서 붉은빛이 쏘아졌다. 콰아앙! 나무 거인이 초압축 불꽃을 막아낸다. 사방으로 퍼지는 불꽃이 검산을 불태우고, 나는 그 뒤에서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다가 툭하고 말을 꺼냈다. “당신, 그냥 폭식이 아니군요?” 폭식은 욕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있는 걸 기계적으로 먹어 치울 뿐이다. 그러니 폭식이다. 탐욕이 아니라. 허나 저 남자는 달랐다. 욕심을 가졌다. 미식가라도 되는 것처럼 음식을 가렸다. 마치, 탐욕을 품기라도 한 듯. 그러니 탐식인가. 정말이지. 악식의 교단 놈들은 이상한 일을 많이도 저질렀다. 내 질문에 탐식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탐식의 가슴이 갈라진다. 탐식의 가슴에 생긴 거대한 입을 통해 수많은 마법이 쏘아진다. “루이나!” 헤이즈가 다급히 자리를 벗어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무 거인이 무릎을 꿇으며 거대한 우산이 된다. 나무 거인이 흔들린다. 그에 따라 땅이 흔들린다. 그 아래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탐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시선과 상관없이 내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이미 실버즈라도, 헤이즈도, 오만의 사도도, 탐식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내면을 관조했다. ‘포식’은 모든 걸 먹어 치운다. 나무든, 돌이든, 동물이든, 약초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추억이든, 가리지 않고 난폭하게. 그렇게 먹은 건 영양분이 된다. 몸의 구성원이 된다. ‘소화’가 된다. 그 과정에서 모든 건 ‘해체’된다. 잘게 잘게, 산산조각 난다. 여기까지가 내가 깨달은 포식의 특징과 거기에서 뻗어 나온 각종 원리였다. 나는 포식이 뭔지 꽤 오래 고민했다. 공평과 포식은 의 도움을 받지 않은, 온전한 내 힘이니까. 더욱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포식은 무언가를 삼킨다.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먹어 치워 영양분으로 만든다. 잘게 잘게 부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인가? 포식의 의미는 그게 전부인가? 아니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결국 폭식과 포식은, 같은 결의 능력이었으니까. 견본을 봤는데 깨닫지 못하면, 그건 재능이 없는 걸 넘어 머리가 없는 거였다. 확실히 먹어 치운다는 건, 그 먹어 치운 걸 ‘보관’할 장소가 있다는 것과 똑같다. 나는 등불을 짤랑였다. 불꽃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거기에 생긴 수많은 입이 상대의 마법을 집어삼킨다. 뒤이어 뱉는다. 탐식이 당황한다. “너―.” 나는 끝없는 고양감을 느끼며 마법을 제어했다. 상대의 마법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탐식도 똑같이 마법을 집어삼켜 되돌려준다. 그게 반복된다. 똑같은 마법이 소유자만 바뀌어 허공을 반복해서 날아간다. 대치 상태가 길어지는 와중, 내 다른 마법이 움직였다. 나무 거인과 나무 병사가 탐식에게 다가간다. 헤이즈도 다가갔다. 둘의 압박에 탐식이 입을 늘리며 거세게 저항했지만, 나와 헤이즈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승기가 기울었다. 이제 마무리로 결정타만 날리면 우리의 승리였다. ―상황이 급변한 건, 딱 그 타이밍이었다. 오만의 사도가 비웃는다. “검사가 자신의 세계를 빼앗기면, 그때부터는 더는 검사가 아니지. 아닌가?” 촤아악! 오만의 사도가 휘두른 검이 실버즈라의 가슴을 길게 베었다. 실버즈라는 몸을 뒤틀어 치명상을 피했지만,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실버즈라가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났다. 속절없이 밀리는 게, 아무래도 탐식이 거울의 세계를 맛있게 먹어 치운 것이 실버즈라에게 매우 치명적인 듯했다. 안 좋았다. 현재 싸움이 성립되는 건 어디까지나 실버즈라가 오만의 사도를 막아줘서였다. 7위계급의 강자인 오만의 사도의 발이 풀리면, 그때부터 나랑 헤이즈는 힘을 쓰기 어려워졌다. 나는 마법을 준비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애매했지만, 일단 오만의 사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붉은 선이 허공에 그어지고, 오만의 사도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내 마법을 전부 받아냈다. 효과가 없었다. 이걸론 부족했다. 나는 아예 강철이를 소환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를 상대하면서, 한눈을 파는 건 너무하지.” 그리고 그 틈을 노려 탐식이 허공을 찢어 입을 만들었다. 모든 걸 먹어 치우는 입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강철이를 소환하다 말고 피닉스에 올라타 탐식의 공격을 회피했다. 입이 지나간 자리에 구멍이 뻥 뚫린다. 나를 원호하기 위해 헤이즈가 달린다. 저 멀리에서 오만의 사도가 초대 황제의 검을 들고, 그 앞에서 실버즈라가 검을 꽉 쥔 채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나는 마법을 발동했다. 대지에서 나무가 솟구치며 형태를 갖춘다. 내가 현재 보유한 최대 위력의 마법, ‘강철이’가 소환된 것이었으나. “네놈들이 존경하는 초대 황제의 검이다. 기뻐하며 죽어라.” 우리의 그 어떤 행동보다, 오만의 사도의 행동이 빨랐다. 어두운 별빛이 검에 발광하듯 맺힌다. 오만의 사도가 검을 번쩍 들고, 그대로 내려친다. 초대 황제의 검이 실버즈라의 목을 꿰뚫는다. 그런 줄 알았다. 그 정해진 미래를 막아낸 건, 느닷없이 나타난 웬 남자였다. “맹세한다.” 전장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체를 밝히기 싫은지 남자는 가면을 쓴 상태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아까 봤다. 마법학교 근처에서 파는 거 같은, 그러나 그렇다기엔 꽤 흔한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가면을 쓴 남자는 오만의 사도에게 손을 뻗은 채, 읊조렸다. “그러니 내게 힘을 빌려줘. 이클립스.” * 초대 황제의 검과 관련돼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사람들은 초대 황제의 검이 절대적인, 신조차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확실히 초대 황제의 검을 손에 넣으면 신조차 죽일 수 있다. 이건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초대 황제의 검이 대단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말 초대 황제의 검이 대단했다? 그럼 고작 오만의 사도 따위가 저렇게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초대 황제의 검은 보잘것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초대 황제의 검은 그저 안에 별빛이 담긴 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대 황제의 검은 위대했다. 정확히는. 초대 황제의 검과 맺는, ‘맹세’가 위대했다. 가면을 쓴 남자, 프린드는 이클립스에게 고했다. 내 삶을 오직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쓰겠다. 내 힘을 오직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쓰겠다. 인류를 위해 살겠다고 맹세하겠다. 그러니 부탁해. 내게 힘을 보태줘. [맹세는 이루어졌다.] 별빛으로 화한 이클립스가 오만의 사도의 손에서 빠져나와 프린드의 손에 잡혔다. 드디어 온전한 모습이 된 이클립스를 프린드는 오만의 사도에게 겨눴다. “이봐 오만! 계획이랑 다르잖아!” 그러자 저 멀리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프린드가 아는 놈이었다. 악신의 교단의 입장에선 세상에 처음 선보인 놈일 테지만, 과거로 돌아온 프린드의 입장에서 수없이 본 지긋지긋한 놈일 뿐이었다. 폭식과 탐욕을 합쳐 만든, 초월자를 죽이기 위해 악신의 교단이 준비한 맞춤형 비장의 무기. 탐식. 저놈은 위험했다. 시간을 주는 순간 수많은 것들을 먹어 치워 끝없이 강해졌으니까.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챈 오만의 사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오만의 사도의 신성력이 폭주한다. 상황이 틀어졌으니 실버즈라라도 죽이고 가자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걸 가만히 둘 프린드가 아니었다. 이클립스를 휘두르자, 별빛이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 오만의 사도를 벤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법칙이 뒤틀린지 오래. 분명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역으로 프린드의 상반신이 갈라진다. 그걸 이클립스가 ‘고정’의 능력으로 상쇄한다. 프린드는 이클립스에 담긴 힘의 양을 가늠하며 혀를 찼다. 이제 막 계약을 한 탓에 이클립스도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긴 힘들었다. 그런 사정을 오만의 사도도 아는지 그는 묵묵히 악신의 신성력을 긁어모아 필살의 성법을 발동시켰다. 프린드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클립스가 힘을 쓰기 힘들다면, 여기선 고유 마법의 회복이 늦어지더라도 을 사용해서 틈을―. “죽기 직전에도 안 나오다니, 너도 어지간히 독한 놈이다.” 아까부터 침묵하던 실버즈라의 부인격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게 포기 선언이라 생각했는지 실버즈라의 부인격을 향해 오만의 사도가 ‘만물을 아래에 두는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실버즈라의 부인격이 말했다. “네가 그토록 바라는 다음 단계에 도달할 녀석을 만났는데, 안 만나볼 거냐?” 그리고 모든 게 정지한다. 그리고. 단지 의지를 세운 것만으로 세상을 정지시킨, 실버즈라가 말했다. “넌 뭐지?” “이런. 기어코 깨어났나.” 신의 힘을 최대로 빌린 오만의 사도는 모든 압박을 끊어내며 창을 휘둘렀다. 이어서. “신경 쓸 필요가 있는 녀석은, 아니었군.” 실버즈라가, 검을 뽑았다. “하.” 오만의 사도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실버즈라는 오만의 사도를 지나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검의 끝을 보여줄 녀석이 누구지?” 멀어지는 실버즈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만의 사도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맑디맑은 검산의 하늘이 오만의 사도의 시야에 들어온다. 푸른 하늘, 밝은 태양. ―그리고 검으로 베인 것처럼 반으로 갈라진 구름이, 오만의 사도를 일깨웠다. 용으로 진화한 이무기가 탐식에게 청염을 내뿜는 걸 확인한 오만의 사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게. 오만의 사도가 기억하는 마지막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