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이드 그레이프턴에 그런 몬스터가 살았다고?” “네.” 쉐이드 백작은 내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의 포도를 웬 괴물이 훔쳐 먹었다는 소리를 들은 거다. 영주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였다. “훌륭하구나 마법사. 그대의 용기에 감사를 표하겠다.” “별거 아니에요. 기껏해야 마법을 조금 쓴 것뿐이거든요.” 정말 별일 아니다. 그러니 돈 내놔. 당장. 백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고 싶구나. 로브를 걷어주겠나?” “그럼요.” 나는 당당히 로브를 걷었다. 얼굴이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응접실 아래에 내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직후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주위에 있던 측근들 또한 움찔거렸다. 젊은 나이에 얼굴을 다 태워 먹어서 불쌍하지? 그러니 돈 많이 내놔. 얼른. “얼굴은 어쩌다가.” “불행한 사고가 있었어요. 제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죠.” “여자가 그런 끔찍한….”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불행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괜히 웹소설에서 주인공을 일단 고아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만큼 불행한 서사는 사람의 몰입감을 유발했다. 웹소설 고아 스타트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아님 말고. “테너.”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이자에게 금화 10개를 포상으로 내리거라.” “알겠습니다.” 나는 금화 주머니를 받아 백작성을 나섰다. 금화 10개라. 땅속에 숨어다니는 괴물을 죽인 대가로 많은 건지 적은 건지 모르겠다. 기껏해야 포도나무 몇 개 손실 나고 잡은 거면 과정도 굉장히 깔끔했던 거 같은데, 이거면 20개는 줘도 되지 않나? 역시 백작이다. 심장이 강철이다. 내 정신 공격을 받고도 냉정하게 포상을 내리다니. 다음에 만나면 아예 소매를 걷어 팔도 보여줘야겠다. “루이나 님. 어땠어?” “좋았어요. 금화도 10개 받았어요.” “금화 10개….” 크리스의 눈이 풀린다. 한창 돈이 고픈 시기라 그렇다. 아사 직전의 사람이 빵에 눈이 돌아가는 것과 비슷했다. 다행히 크리스는 전 재산을 날리지 않았다. 정말 딱 재기할 수 있는 수준의 자금만 남겨두고 포도주 도박을 했는데, 그래서 크리스는 그레이프턴 강에 뛰어드는 대신 물건을 매입했다. “포도를 다른 지역에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신선한 과일을 못 먹는 지역이면 더 많이 벌고.” “한 번 크게 데여서 건실하게 사실 줄 알았더니, 똑같군요?” “루이나 님. 사람은 갑자기 변하면 죽어.” 해피 중세랜드는 운송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다. 짐마차에 실어 운반하는 게 최대였고, 그런 환경에서 포도는 운반 며칠 만에 부패했다. 괜히 다른 지역에 포도를 팔면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었다. 팔기 힘드니 돈을 많이 버는 거였다. “방법이 다 있어.” “크리스 님. 그 방법이 정말 유효한지 잘 점검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못 떠올린 게 아니고, 떠올리고 실행했음에도 실패해서 안 된 걸 수도 있어요.” “나는 달라.” 다르긴 했다. 설마 인생을 건 도박을 실패하고 바로 또 도박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닌가. 이미 뇌가 거기에 맞게 바뀌어서 저거 말고는 못 하나? 그런 거 같다. 그나저나. 나는 여관 홀을 둘러봤다. 한 명이 비었다. “레온 님은 어디 가셨나요?” “레온 님은 마을 조사.” “왜요?” “그런 이상한 몬스터가 자리 잡았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마지막으로 성배의 흔적을 확인하고 싶은가 봐.” “거북이 촉수 괴물이 여기에 자리 잡은 이유는 포도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오죽 포도를 좋아했으면 크리스 님의 포도주도 다 털어갔겠어요.” “아.” 쉐이드 그레이프턴에서 최상급 포도‘만’ 몇 년째 흉작이었던 건 촉수 괴물이 몰래 쏙쏙 빼먹어서였다. 그걸 귀신같이 좋은 포도만 빼 먹네. 애가 보기와 다르게 미식가 기질이 있었다. 나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며 크리스에게 질문했다. “크리스 님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열심히 돈 벌어야지. 나만의 상회를 꾸릴 때까지 못 멈춰.” “이번 행상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나도 일단 루이나 님이랑 똑같이 벨몬테 윈터헤이븐으로 갈 거야. 왜?” “그럼 이렇게 해요.” 나는 체스 내기와 포상으로 받은 금화 15개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투자예요. 그 포도 운송에 저도 끼워주세요.” “지금이라면 6:4로 모십니다. 루이나 님이 6입니다.” “5:5로 해요.” 이런저런 방법을 고안하고 그걸 실행하는 건 크리스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적게 받으면 서운할 수가 있었다. 거래는 성립됐다. 금화 주머니를 연 크리스는 안에 든 금화를 꺼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금화다….” “그런 예쁜 얼굴로도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군요?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네요.” “루이나 님. 언제 출발할 거야? 출발 시간에 맞춰 포도를 구해야 하거든. 미리 말해주면 좋겠어.” “내일 당장 출발할 거예요. 이 마을에 더는 볼일이 없으니까요.” 사실 오늘 당장 출발하고 싶었으나, 레온이 아직 미련이 남았다니까. 딱 하루는 기다려주는 게 맞았다. 나는 손을 들며 주문을 넣었다. “여기 벌꿀주 한 잔 주세요.” “루이나 님은 볼 때마다 술을 마시는 거 같아.” “제가 술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벌꿀주는 맛있거든요.” “앞에 술을 안 좋아한다는 사족은 안 붙여도 될 거 같아. 말의 신뢰도가 확 내려가거든.” 금화 주머니를 단단히 묶은 크리스는 이내 손뼉을 치며 물었다. “맞다. 그럼 호위는 공짜로 해주는 거야? 루이나 님도 이제 행상에 지분이 있잖아.” “그렇네요. 그 부분은 같이 지낸 정이 있으니까요. 싸게 금화 한 개에 해드릴게요.” “…싸게 했는데 왜 금화 한 개야. 원래 그것보다 적었잖아.” “마법 실력이 올랐거든요.” “그럴 수가.” 내 단호한 말에 크리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구경을 했다. 나는 천장에 연기를 흘려보내고,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농담이에요.” * “카이렌 님. 축제는 즐거우십니까.” “베른하르트. 내가 암행 중엔 본명으로 부르지 말랬지.” 카이렌은 나직이 답하며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축제가 한창인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했는데, 그런 카이렌의 모습에 베른하르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카이렌 님이 체스로 이상한 내기만 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저도 사적인 공간에서도 철저하게 가명으로 불렀을 겁니다.” “들키진 않았잖아.” “고위 귀족가 영식이 축제를 즐긴다는 소문이 쫙 났는데 말입니까?” “들키진 않았잖아.” 계속대는 타박을 적당히 흘러 넘긴 카이렌은 테이블을 손으로 톡톡 쳤다. 테이블 위에는 성은(星銀)으로 만들어진 파이프 담배가 올려져 있었는데,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거였다. 파이프 담배를 만지작대던 카이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포도주는 어떻게 됐어?” “잘 전달했습니다.” “들키진 않았지?” “저는 그분과 만난 적이 없는데, 들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최고급 포도주를 공짜로 주면 의심할 만하잖아.” “축제 기간이지 않습니까. 분위기로 잘 넘어갔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카이렌은 파이프 담배를 조심스럽게 가죽 케이스에 넣고 벌꿀주를 한입 마셨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단 걸 왜들 그리 좋아하는지.” “아무래도 술의 신이 세상에 퍼트린 술이니까요. 권능으로 만들어져 항상 시원하니, 사람들이 즐겨 찾을 만하죠.” “내 취향은 아니야.” 탁. 술잔을 내려놓은 카이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히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이었는데, 베른하르트는 침착한 목소리로 카이렌을 말렸다. “카이렌 님. 아직 마도구 사용을 안 하셨습니다.” “이거 영 불편하단 말이야.” “염색을 하는 것도 아닌데 불편하십니까?” “뭔가 뒤집어쓰는 기분이라고. 이건 직접 써봐야 알아.” 작게 한숨을 쉰 카이렌은 마도구를 꺼내며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순금을 짜아 만든 선명한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 밑엔 선이 굵은 미남의 얼굴이 자리 잡았는데, 전부 아버지의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덕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카이렌의 혈통을 얘기할 때 얼굴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이렌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주황색과 자주색이 섞인, 황혼색 눈동자와 눈이 마추친다. 이 황혼색 눈동자야말로 에테르노 황실의 피를 이었다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으니까. 다른 사소한 특징은 언급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딸깍. 마도구를 작동하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던 눈과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변한다. 완벽히 변장에 성공한 카이렌은 밖으로 떠나기 전, 지나가는 식으로 베른하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그 사람 말이야. 다음엔 어디로 가는지 알아?” “지나가는 말투치고는 굉장히 간절해 보이는군요. 잘 모릅니다. 루이나 님이 행선지를 주변에 이야기 하고 다닌 게 아니라서요.” “…….” “조사해 올까요?” “아니. 됐어.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카이렌은 쿨하게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카이렌. 에테르노 제국의 5황자. 방년 20살. 축제를 즐기기 딱 적당한 나이였다. * “루이나 님. 세상에 산적이 너무 많은 거 같지 않아?” “산적이 아니라 용병이에요. 도적은 부업인 거죠.” 크리스의 잘못된 지식을 정정해 준 나는 앞을 가로막은 용병들의 다리를 불꽃으로 먹어 치웠다. 벨몬테 윈터헤이븐으로 떠난 지 3일째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