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즈는 빠르게 나를 훑었다. 그는 내 얼굴을, 목을, 팔을 차례대로 확인했다가, 이내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살폈다. 헤이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 뭐야.” “루이나예요.” “그 얘기가 아니라, 아니.” 헤이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지간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남은 손으로 죽엽청을 들어 단번에 들이켠 헤이즈는 길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너…치료받았네?” “스승님의 유언이어서요. 왜요? 이상해요?” “이상…이상하긴 해. 그냥 이상해. 기분이 이상해.”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리고 그 죽엽청 제 거예요.” “그냥 이상해. 그냥….” 한참을 읊조리던 헤이즈가 마른세수를 한다. 눈두덩이를 지그시 누르고,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 헤이즈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잘 지냈나 보네.” “당연하죠. 제가 못 지낼 리 없잖아요.” “너는 불구덩이가 보이면 일단 들어갈 거 같아서.” “그러고 싶긴 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도 나는 가끔 불을 먹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그건 꿈이니까. 켈튼은 내게 많은 걸 주었지만, 그만큼 부탁도 많이 했다. 그래서 가끔은 융통성 있게 풀어주길 바랐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켈튼은 체스별 나라의 사람이 됐는걸. 안 되겠다. 꼭 부활시켜서 한 달에 한 번은 불을 먹게 해달라고 해야지. 내가 부탁하면 켈튼은 어차피 한숨을 푹 쉬고 들어줄 테니, 부활 마법만 찾으면 됐다. 지금은 영생이 먼저였으나, 이것만 해결하면 그다음은 부활 마법이다. 이건 정해진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주문하신 죽엽청과 고기파이입니다.” “이리 주세요.” 나는 종업원이 가져온 헤이즈 몫의 음식과 술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종업원이 예상 밖의 일을 겪었다는 듯 움찔거린다. 하긴, 나는 정당한 내 몫을 돌려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제3자 입장에선 강도처럼 보이겠다. “헤이즈 님. 헤이즈 님이 해명하세요. 강도는 제가 아니라 헤이즈 님이라는 걸요.” “강도입니다.” “어…편하게 식사하시길.” 종업원이 떠난다. 식탁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다만 불편한 침묵이 아니라 마음이 편해지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내가 느긋하게 죽엽청을 한 모금 마시자, 헤이즈가 물었다. “검림엔 무슨 일이야. 기어코 검술에도 관심이 생겼어?” “이미 마법을 배운 제가 왜 검술에 관심을 가지겠어요.” “검술이랑 마법이랑 무슨 상관이야.” “검술이 궁극에 닿으면 마법처럼 변하잖아요. 즉 검술은 마법의 하위호환인 거죠.” 예전부터 생각해 온 의견을 당당히 밝혔다. 이놈의 검사들은 욕심이 많아서. 꼭 검으로 마법을 쓰려고 했다. 마법사들은 당당하게 근접전을 포기하건만, 에휴. 어쩌겠나. 이 모든 게 마법에 닿지 못한 불쌍한 자들의 발버둥인 것을. 오히려 칭찬을 해줘야 됐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법을 쓰려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가? “칭찬 도장을 드릴 테니, 헤이즈 님도 꼭 마법에 닿아야 돼요.” “반박할 곳이 많지만, 진짜 미치도록 억울한 부분 하나만 지적할게. 마법사들도 근접전 하잖아. 강화 마법으로 검사랑 정면 대결하는 마법사를 내가 한두 명 본 게 아닌데?” “마법사는 그래도 돼요.” 마법은 모든 게 가능하기에 마법이었다. 따라서 마법사는 근접전을 해도 된다. 하지만 검사는 아니다. 너네는 칼질이나 해. 왜 자꾸 검에서 빔을 쏘는 거야. 그럴 거면 너네도 마법사 하든가. “너 다운 대답이다.” 피식 웃은 헤이즈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나는 역으로 헤이즈에게 질문했다. “뭐 하면서 지내셨나요. 타시아 님의 수호 기사는 그만두신 거 같던데요.” “그건 어떻게 알았냐.” “타시아 님이 혼자서 마법학교에 다니더라고요. 아, 저 마법학교 강사가 됐어요.” “…네가 강사가 됐다고?” 헤이즈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내가 강사가 된 게 어지간히 이상한 듯했는데, 이해됐다. “저만큼 마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강사라는 게 이상하긴 해요. 최소 준교수여야 정상인데요.” “준교수가 아니라 마법에 미친 악귀겠지. 학생들의 마법을 빼앗는 건 범죄야.” “제가 학생들의 마법을 왜 뺏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감사의 마음과 교환해 마법을 양도받을 생각일 뿐이다. 빼앗는 거랑은 많이 달랐다. 헤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 좀 이상한데….” “제 얘기는 됐고, 헤이즈 님 얘기나 해보세요.” “나? 나는….” 기억을 훑던 헤이즈는 돌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헤이즈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새로 받았어. 계속.” “발리온 드라고밀 님이죠?” “그래.” “제대로 구르셨겠네요. 보통 성격이 아니시던데요.” “…스승님을 알아?” “언젠가 싸워본 적이 있어요.” 나는 발리온 드라고밀과의 만남을 되새겼다. 물론 진짜 발리온은 아니고 과거 발리온의 환영을 만난 거긴 했지만, 8위계 마법사가 만든 환영이잖아. 굉장히 정교했던 만큼 실제 발리온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였다. “싸워…본 적이 있다고?” “암속성 원소를 타고나셨던데, 응용이 까다롭더라고요. 저도 어렵게 이겼어요.”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8위계 대마법사를 만나고, 8위계 연금술사의 미궁을 탐험하고, 성배를 찾고, 악신의 교단과 혈투를 벌이고, 마법학교에 취업했어요.” “어이가 없네.” 헤이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어이가 없던 건데, 어딘가 유쾌한 감정도 섞였다. ‘그럴 줄 알았다’ 정도가 헤이즈가 느낀 감정이 아닐까. “제 동업자가 열심히 일해서 그런지 온갖 사람들이 제 소문을 접하던데, 헤이즈 님은 아예 모르시네요?” “말했잖아. 스승님에게 수련을 받았다니까. 사실상 폐관 수련을 한 거라 소문은 듣고 싶어도 못 들어.” “그래요? 그런 거치고 잘 돌아다니는데요?” “수련이 끝났으니까. 일단은.” 헤이즈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굳은살이 굳게 박인 손은 헤이즈가 피나는 수련을 반복했다는 걸 알려줬다. 검사는 오직 땀으로만 말하는 법이다. 주먹을 꽉 쥔 헤이즈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야.” “네.” “내가 준 마법 잘 쓰고 있냐?” “적영(寂影)이라면 잘 지내요.” 나는 머나먼 공간을 넘어 ‘연결’된 적영을 느꼈다. 지금 녀석은 노아와 노는 중이었는데, 잠시 고민한 나는 적영을 역소환했다. 직후 를 응용한 초장거리 ‘연결’이 끊어졌다. 이러면 되돌리는 게 불가능했다. 이건 케이블 줄을 생각하면 쉬웠다. 케이블 줄을 길게 늘어트리며 이동하다가 회수했을 때, 동작을 반대로 한다고 다시 케이블 줄이 길게 늘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케이블 줄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선 다시 케이블 줄을 길게 늘어트리며 이동할 필요가 있었는데, 적영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마법학교에 적영을 배치하고 싶으면 적영을 소환해 마법학교에 직접 가져다 놔야 됐다. 어차피 이번 주 강의는 다 끝나서. 다음 주까지는 적영을 이용해 원격 수업을 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역소환해도 문제가 없었고, 초대 황제의 검을 찾는 일이 길어진다 싶으면 피닉스를 이용해 적영을 마법학교로 나르면 됐다. 피닉스가 효자야 효자. 아주 쓸모가 많아. 각설하고. 나는 으로 몸체를 만든 다음, 거기에 적영을 집어넣었다. “……!” 적영이 화를 낸다. 잘 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부르냐고 항의하는 건데, 나는 적영을 톡톡 친 후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 적영이 눈을 깜빡였다(없지만). 헤이즈와 눈이 마주친 적영이 먹먹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야? 정말? 정말 아빠야? 아빠. 고마워. 아빠 덕분에 나는 행복했어. 그러니 동생 하나만 더 낳아줘. 아빠라면 할 수 있어. 힘내.] “야.” [아빠? 왜 그래? 말투가 차가워.] “물구나무를 서서 들어도 네가 말하는 거잖아. 죽을래?” “들켰네요.” 눈치가 빠른 헤이즈였다. 과연 제국제일검의 제자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그런데 그래서 마법 하나 더 안 만들어주시나요? 적영이 혼자서는 외롭대요.” “일 없다. 그리고 나 마법 끊었어.” “그럴 수가.” 이러면 적영 군단을 만들어 전 세계에 마법 외교관을 파견하려던 내 계획이…! 흠. 차라리 내가 만들어야 되나. 어떻게 잘하면 될 거 같기도 한데…. 이 부분은 나중에 연구해 봐야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헤이즈는 적영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만지다가, 내 시선에 입술을 뗐다. “아무튼, 루이나 너는 검림엔 왜 왔냐?” “초대 황제 폐하의 검이 발견됐다고 해서요.” “너도야?” “지금 검림에 찾아오는 외부인은 전부 그 목적이지 않을까요.” “맞긴 해.” 초대 황제의 검이 가진 상징성은 어마어마했다. 무려 신을 베어버린 검이다. 그거 하나만으로 검에 신성이 깃들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초대 황제가 한 일이 어디 한두 개인가. 따라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대 황제의 검을 탐낼 것이었다. 허나 헤이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소문이 퍼져서 검림만 소란스러워졌잖아. 초대 황제의 검이라니. 그런 보물이 진짜 검림에 있겠냐고.” “헤이즈 님은 초대 황제의 검에 관심이 없나 보네요?” “신외지물에는 더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거든.” “그럼 헤이즈 님은 왜 검림에 왔나요.” “나? 나는 뭐, 심부름이지.” 헤이즈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였다. 편지를 팔랑이던 헤이즈는, 편지를 다시 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걸 대단하신 분에게 가져다줘야 돼서. 그거 때문에 지금 살짝 긴장되긴 해.” “누구인데요?” 내 물음에 헤이즈는 잠깐 고민했다가, 검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머릿속에 갈고리를 띄웠다. 쟤는 왜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검을 건드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헤이즈는 가볍게 설명을 추가했다. “현재 이 세상에서 검 그 자체가 상징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헤이즈가 누구를 만날 예정인지 말이다. 이 넓은 세상엔 강한 사람이 참 많았다. 제국제일검 발리온 드라고밀. 영원을 사는 공화국의 괴물, 아크 리치 산토스 벨고릭. 2황자의 왼팔이자 반란국의 두뇌, 7위계 마법사 모르페우스. 수인 왕국의 광재(狂才), 묘인족 알론 트라스. 엘프 왕국의 수호단장, 하이엘프 반록 퀴르즈딘. 드워프 왕국의 제1명장, 크벤토르. 나열하자면 조금 더 나열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7위계급 강자였으며, 하나하나가 국가와 필적하는 힘을 보유했다. 모두가 무시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산을 부쉈으며, 바다를 갈랐고, 대지를 꺼트렸다. 다만. 그들이 정점은 아니었다. 정점이란, 고작 산을 부수는 정도론 부족했으니. 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에 다섯밖에 없는, 보다 정확히는 생존이 확인된 다섯의 정점을 다음과 같이 불렀다. 제자 육성에 미친 제국의 8위계 대마법사, 아델리안 크로프트. 영원히 잠을 자는 수인 왕국의 잠룡, 용인족 천백. 전지하기에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엘프 왕국의 현자, 락토르. 하늘을 재련하려는 드워프 왕국의 몽장(夢匠), 그레이스. 그리고. 현 검의 정점이자, 생존이 확인된 유일한 검의 초월자. 천검(千劍), 실버즈라. 아무래도 그 사람이 헤이즈가 편지를 건넬 사람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