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작은 불씨 청색 마탑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하루에 3시간씩 수면을 취했다. 필요할 때는 몇 날 며칠이고 밤을 새울 수 있지만, 너무 장기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루틴이 잘못 잡혀 버린다. 나는 이제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를 꺼리지 않는다. 내 욕망을 불꽃 삼아 솟아오르는 화살이 되기로 했으니까. 한편 에인은 하루에 8시간씩을 잔다. 연령대를 고려하면 못해도 9시간 이상은 자야 할 텐데, 이 꼬마는 좀처럼 쉽게 잠에 들질 않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방의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에인은 좀처럼 등을 침구에 붙이려 하지 않았다. “얌마, 너 벌써부터 이렇게 안 자면 어쩌려고. 그러다 키 안 큰다.” “난 원래 안 컸어.” “그러니까 앞으로 커야 할 거 아니야, 그거 내려놓고 어여 누워.” 당장은 워낙에 귀염상이라 키가 작아도 괜찮겠지만, 나중에 나이가 먹고 2차 성징이 오면 또 어떻게 역변할지 모르는 법. 얼굴이 꽃미남이어도 키가 작으면 깨는 법이라고, 대학 동기가 사무치게 한탄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에인에게서 마법서를 빼앗은 다음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기본적으로 얌전한 애라서 딱히 반항은 하지 않는다. “진혁악마님은 안 자잖아. 왜 나만 자야돼?” “악마는 원래 안 자도 돼.” “아닌데, 악마도 잠은 잔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오늘따라 말대꾸를 길게 하는 에인, 악마도 잠은 잔다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걸까 싶었다. “저번에 책에서 봤어. 선생님한테도 물어보니까 그랬어. 악마도 잠은 잔대.” 선생님이란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청색 마탑주와 에올피아를 말한다. 에인이 스스로 배운 단어 중 하나다. 상식도 어휘도 너무나 부족했던 에인은, 마탑에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며 스펀지처럼 여러 지식을 흡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악마에 대한 지식도 뭔가 접한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면서도 나를 악마라고 부르나. “책이 항상 옳은 건 아니야. 나는 좀 특별해서 안 자도 돼.” 어차피 에인의 지식은 마법 쪽에 극단적으로 편중되어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거다. 애초에 악마에 관한 지식도 별로 대단한 수준까지 갖춘 건 아닐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나를 ‘진혁악마님’이라고 부를 리가 없으니까. 얘는 아직도 악마가 뭔지 잘 모른다. “응, 선생님도 진혁악마님은 특별한 악마님이랬어.” 에인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악마라, 그런 말을 다 했었구만. “악마는 되게 나쁘댔어. 막 사람도 죽이고 저주도 내리는 게 악마래. 엄청 나빠서 꼭 물리쳐야 된다고 그랬어.” “그렇겠지.” “근데 진혁악마님은 특별한 악마라서 착하대. 진혁악마님같은 악마는 하나밖에 없을 거랬어. 선생님이.” 듣다 보니 괜히 낯간지럽다. 나를 악마라고 믿는 꼬맹이를 위해, 특별한 악마니 뭐니 하면서 내 칭찬을 했다는 거니까. 세상에 둘도 없을 착한 악마- 그 고집불통 마탑주가 그랬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 에올피아가 말한 거겠지. “큰 선생님이 그랬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눈가만 빼꼼 내놓고 있는 에인이 덧붙였다. 마탑주가 그랬다니, 그건 좀 의외네. 괜히 웃음이 나와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악마에 대해 몇 마디 해주었다. 18층에서 칭하는 악마가 마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진짜 악마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말고 다른 악마는 다 사악한 쓰레기들이니, 괜히 악마소환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응, 진혁악마님 말고 악마는 다 나빠.” 사탕 주는 아저씨를 쫄래쫄래 따라가면 안 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충고해 두었다. 뭐, 그런 아저씨가 있으면 내가 대가리를 깨 버리겠지만. **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동안, 나는 미궁 지역을 방문해 에인의 완드에 필요한 재료를 모은다. 18층 보스의 리젠에 걸리는 시간은 24시간, 하루에 한 번씩 반복해서 잡다 보니 점점 클리어 타임도 줄어만 간다. [코끝을 찌르는 진득한 썩은내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몸, 바다에 빠져 죽은 시체가 걷고 있었소.] [이것은 질 나쁜 괴담이 아닌, 그 공방의 주인이었던 마법사의 말로요.] [무모한 모험가여, 부디 저 끔찍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고……]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오늘은 아예 시스템 메시지가 끝까지 나오기도 전에 잡아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걸로 습득한 파편의 숫자는 총 25개, 조합을 통해 심연의 근원을 두 개까지 만들고도 몇 개 남는 갯수다. 에인이 파편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해서 일부러 넉넉하게 구한 건데, 이 불길한 아이템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심연의 파편에 어떤 설정이 붙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수호 : 저번에 물어본 거 알아봤음, 캡쳐 보낼테니까 직접 읽어봐] 고고학자 성향의 도전자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해, 파편과 호문쿨루스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아 보았다. 그 밖에도 이 18층에서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들에 대한 정보도 있는 대로 수집했다. 우선 내가 가장 걱정한 심연의 파편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파편은 불길한 마력을 풍기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냥 마력의 성질이 조금 특이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다. 여러 정보를 근거로 추측해 보면, 파편에 담긴 마력이 미궁을 오염시킨 원인일 가능성은 있다곤 하지만. 파편에 담긴 마력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만큼 사악하고 위험한 무언가는 결코 아니라는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마력은 그냥 마력, 결국 중요한 것은 마력을 다루는 사용자의 의지라고. “다행이네.” 에인이 심연의 파편에 관심을 두는 모습을 보고, 자꾸만 쎄한 기분이 들어서 조사해 본 거였는데. 내가 알아낸 내용이 확실하다면, 에인의 완드 재료로 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완드에 갈아 넣은 시점에서 재료 원본의 성질은 흐려지고, 마력은 주인의 뜻을 따르게 된다고 하니까. 에인이 파편의 마력을 이용해 악마 소환을 시도한다거나, 호문쿨루스 제조를 시도한다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된다. 그 조그만 꼬마가 그런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고- 혹시 몰라 악마에 관해서는 단단히 교육해두기도 했으니. 에인은 내가 들려주었던 다크엘프의 동화 속에 나오는 멋진 현자가 되고 싶어한다. 악마와 마왕을 무찌르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현자가. 그런 꼬마 에인이 심연의 파편으로 나쁜 짓을 벌인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뭐, 애초에 가진 마력 자체가 쥐꼬리만 해서 뭔가 거한 사고를 벌이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 매일같이 비슷한 일만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청색 마탑에 체류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 사이 에인의 마법적 성취는 놀랄 만큼 진보했다. 고질적인 마력량 부족 때문에 거창한 마법은 역시 쓸 수 없지만, 습득한 마법의 레퍼토리는 어마어마한 수준. 최대 일곱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으며, 기교 면에서는 이미 마탑주에 버금간다고 한다. “마력량만 많았어도 진짜 전설속의 현자가 되고도 남았겠어, 아깝단 말이지.” 청색 마탑주는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다. 듣자하니, 에올피아의 마법사 명단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에인은 거기서 제 엄마를 찾아내 짚은 모양이고. 주문을 맡긴 완드도 거의 완성 직전이라고 하니, 청색 마탑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소리다. “나중에 엄마랑 진혁악마님이랑 또 올게, 선생님.” “오냐, 꼭 와야 한다.” “작은 선생님도, 나중에 또 봐.” 에인은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했다. 마탑주는 에올피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예쁜 꼬마가 그 성질 나쁜 불쟁이년의 자식이라니, 속이 다 쓰리구만.” 에인이 지목한 ‘엄마’는 다름 아닌 적색 마탑의 마탑주, 내가 에인의 엄마 후보로 꼽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마탑주님도 에인 못지않은 자식을 가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식 계획은 여전히 없으십니까?” “내가 자식은 무슨 자식이냐, 나는 갓난아기 돌볼 자신 없다.” “갓난아이 때는 제가 돌볼 텐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갓난아이만 아니면 잘 돌보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 사실이 마탑주와 에올피아에게 묘한 영향을 미친 모양이지만,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에인의 ‘엄마’에 대해서도 그간 걱정이 많았지만, 적색 마탑같은 메이저 마탑의 탑주라면 그나마 걱정을 덜었다. 여기서부터 적색 마탑과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하루 정도면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겠지. 내일 아침 완성된 완드를 받아서 출발하고, 에인을 바래다주기만 하면 퀘스트는 끝. “진혁악마님, 나 빨리 엄마 보고 싶어.” 그리고 퀘스트가 끝나면, 에인은 깡통 NPC가 되고 만다. 그 사실은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지만, 결국은 찾아올 이별이었다. 아쉽지만 괜찮다. 내 목표는 단순히 엘레노어를 되살리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엘레노어에게 ‘다음’을 약속했다. 탑의 시스템에 얽힌 영혼- 깡통 NPC 에겐 결코 있을 수 없는 ‘다음’을. “그래, 엄마 보러 가자.” 그렇다면, 이 꼬마에게도 똑같이 ‘다음’을 주면 그만이다. 나는 무수한 욕망을 불태워, 탑의 천장을 뚫고 나아갈 불화살이다. 이번에는 그저 작은 불씨가 하나 더 붙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