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시련의 탑 16층 갑옷을 잠깐 벗어두고, 깨끗한 수건 하나를 꺼내서 목덜미를 닦았다. 식은땀이랑 피가 뒤섞여서 아주 지저분하다. 하필 숙소를 구하기 힘든 16층에서 이렇게 될 줄이야. 뭐라 형언하기 힘든 고통은 이제 완전히 잦아들었고, 소진되었던 MP도 다시 차올랐다. 다른 컨디션도 모두 정상. 젠장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시작은 비둘기 괴물과 함께 사이좋게 맵을 뚫고 떨어진 이후, 돌연 나타난 이상한 메시지였다. ‘[상위 존재 : GM ■■■가 당신의 시야를 차단합니다.]’ 상위 존재, GM이 나의 시야를 차단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주변이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었다. 그 순간 나는 정체 모를 공포를 느끼고, 발작하듯 시야를 가리는 어둠에 저항했다. 죽음의 위기를 넘나든 적은 이제껏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무언가에 공포를 느껴본 건 이번이 두 번째. 고블린 로드에게 쥐어터지고 질질 짰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내가 공포를 느낀 상대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아예 없지는 않다. GM이라는 존재에게 눈이 가려진 순간 공포를 느꼈으니, 당연히 상위 존재라는 그 GM에게 공포를 느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있는지도 몰랐던 GM이라는 게 왜 내 눈을 가렸는가다. 커뮤니티의 어떤 글을 뒤져봐도, GM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이 시련의 탑의 주인 같은 존재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전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존재가 나한테 직접 간섭했어야만 하는 이유는 뭐가 있을까. 시스템이 만든 장벽을 뚫고, 맵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거기에, GM이 내게 간섭한 부분은 시야를 가린 것 하나만이 아니다. 나를 이곳에 보냈다는 점.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5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미궁 지역이 혼자 클리어 처리가 되고, 전이문을 쓰지도 않았는데 16층으로 갑작스레 옮겨졌다. 클리어 처리 자체는 미궁이 붕괴한 탓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16층으로 바로 전송됐단 말인가. 기본적인 정보가 너무 적어서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내가 아직 한참 약하다는 점. 고작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에 저항하겠답시고 발버둥쳤을 뿐인데, 가진 마력을 모두 써 버렸다. 그랬는데도 결국 제대로 저항할 수 있었던 건 1초도 안 되는 잠깐뿐이었고. 그 잠깐 목격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잠깐이지만 무너져 내렸다. 상위 존재, 말 그대로 격의 차이라는 것 때문일까? 그저 잠깐 눈으로 봤을 뿐인데 이 꼴이라니, 한심하다. 나를 미치게 만든 게 눈을 가린 GM인지, 아니면 맵 바깥의 다른 무언가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게 탑의 시스템과 어느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즉,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만 하는 상대. 그런데 내 수준으로는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아직 멀었다 이거지?”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 16층의 배경은 바다 한 가운데에 고립된 거대한 섬이다. 오랜만에 나오는 미궁 중심으로 이루어진 단순 전투 위주의 층으로, 주요 몬스터는 미노타우로스. 1층의 미궁 지역에서 다양한 고블린이 나왔듯, 16층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미노타우로스가 나온다. 고블린 층 보스가 고블린 로드인 것처럼, 당연히 이곳의 보스도 미노타우로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곳의 보스는 특정한 기믹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체 하드 모드로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히든 보스가 없는 대신, 일반 보스에 히든 페이즈가 있는 느낌. 히든 페이즈에 진입한 보스의 강함은 으레 그렇듯 층수에 맞지 않는 강함을 갖고 있지만, 딱히 엄청난 것도 아니다. 아마 지금 당장 싸워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다. 고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스와 몬스터의 강함이 아닌, 이 16층의 또 다른 특징. NPC나 서브 퀘스트가 아예 없다는 것, 자율 훈련에 매진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거다. [검령 각성] 칼레온에 하급 마법석을 끼우고, 검령을 소환했다. “이번엔 어디냐,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소환되자마자 위험하게 검을 붕붕 휘둘러 대는 검령. 나는 쓸데없이 흥분한 검령에게 곧바로 진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깡! “크악!” 미스릴 완드에 정수리를 강타당한 검령은 곧바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이런 모습만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이 녀석의 검술은 한번 얼핏 봤을 뿐인데도 분명 대단했다. 추측이지만, 검 한 자루로 마계를 평정한 전적이 있다는 말도 아마 허세가 아니었을 거다. “야, 나 검술 좀 가르쳐주라.” 다크엘프식 검술을 넘어 한 번 더 스텝 업을 할 차례가 됐다. “흥,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이제껏 일회용 고기방패로 써 온 탓인지,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내 말에 검령은 어마어마하게 뻗댔다. 스승 대접을 하겠다고 맹세하라느니, 존칭을 쓰고 큰절을 올리라느니, 아주 개소리를 다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잠깐 진중한 설득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내 빈약한 말재주로 이 꼰대 검령을 설득하기란 매우 어려웠지만, 다행히 미스릴 완드는 답을 알고 있었다. -깡! “크악!” -깡! “끄억!” -깡! “썩을!” 참고로 하급 마법석으로 소환한 검령의 맷집은 딱 미스릴 완드 세 대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래 이놈아, 어디 계속해 봐라! 몇백 번을 두드려도 나를 꺾을 수는 없을 거다!” 검령의 멘탈과 자존심은 그보다 훨씬 단단했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몇 백번을 두드려도 꺾을 수 없을 거라고? 이놈은 내가 가진 마법석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지? 마법석 한 개에 세 대, 마법석 개수는 3천 개 언저리, 대충 만 대 가까이 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그만, 그만해라! 이 썩을 놈아, 가르쳐 주마!” 검령 칼레온, 항복. ** 나는 우선 칼레온에게 오러와 검기를 다룰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물론이다, 나는 검 하나로 마계를 평정한 검사지. 인간의 몸으로 마족을 베려면 오러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역시 그때 내가 본 건 오러가 맞았던 모양이다.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어떻게 오러도 다룰 줄 모르면서 마왕을 쓰러트린 거지?” “그깟 놈 하나 잡는데 뭐 오러씩이나 필요해?” “흠, 마족 놈들이 영 허접하긴 하지. 무기술에 능한 놈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듣자하니 칼레온은 회색 마왕의 저주에 당해 검에 처박힌 게 아니라, 말년에 스스로 빙의하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검술의 극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것이 아쉬워, 생명을 연장할 방법을 찾다가 그렇게 됐다나. 단순히 연명하는 것만이라면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이왕 검사인 만큼 저주를 받더라도 검이 되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 탓에 회색 마왕의 저주에 그대로 침식당하고 사악한 에고 소드로 전락했지만, 후회는 딱히 없었다고. “하지만 네놈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줄 알았다면 그만뒀을 거다.” “그러게 누가 그따위로 거들먹거리래? 검술 하나 알려주는 게 뭐 별거라고.” “이놈이, 내 검술을 배우고 싶어 애걸복걸하던 이들이 몇이나 있었던 줄 아느냐!” 칼레온은 시끄럽게 외치며 버럭댔지만, 내가 미스릴 완드를 꺼내 들어 올리자 다시 얌전해졌다. “제기랄, 내가 생전이었으면……최상급 마법석만 있었다면……크흑.”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검술 훈련. 칼레온은 우선 내 실력을 먼저 보자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실력을 뭐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했는데, 칼레온은 자신을 들고 한번 기술을 펼쳐 보라고 했다. 거창한 걸 보여줄 필요 없이, 기본적인 동작이나 움직임만 봐도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나. 다만 오러를 가르쳐 달라고 한 만큼 마력의 운용 능력도 본다고 했으니, 마력은 꼭 사용하라고 했다. -쿠르릉! “오오.”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칼레온을 쥐자, 검령이 감탄했다. “아직 젊은데 마력강화를 할 수 있군,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이 몸에게 배울 자격이 있지.” 나는 검령의 감탄을 뒤로하고 적당히 검술을 펼쳐 보였다. 다크엘프 검술의 기초 동작들 위주로.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놈의 검령 새끼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는 것. “음, 흐음, 아앗, 크흐, 후음……” 검을 휘두를 때마다 뭔가 느껴진다는 듯 추임새를 넣어대서, 자꾸 산통을 깬다. 그뿐만이랴, 검에 마력을 주입할 때는 아주 지랄을 떤다. “그아앗! 이 마력은 너무 크구나앗!” “젠장, 용사! 이 마력은 대체 뭐냐!” “검신이, 검신이 달아오르고 있잖아!” 진지하게 이 새끼가 나를 방해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생각해봐야 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검령의 개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대강의 기술을 펼쳐 본 후, 검령이 내린 평가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너 뭐하는 인간이냐?” 칭찬인지 욕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