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비둘기 괴물은 2페이즈에 돌입하자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다. 내 검에 꿰뚫렸던 머리통 하나가 축 처진 채로 덜렁거리는 한편, 몸에서는 여러 장의 날개가 더 돋아났다. 날개만 스무 쌍이 넘으니, 이젠 비둘기가 아니라 그냥 날개로만 이루어진 괴물처럼 보인다. 이 비둘기와 동족이라는 15층 보스의 2페이즈도 대충 이런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던데. 신앙에 기생하는 생태며 이만한 땅을 하늘에 띄워 올리는 힘이며, 대체 뭐 하는 생물인가 싶다. 하지만 가장 어이없는 것은, 역시 저 비둘기가 가진 기상천외한 양의 마력이다. -쿵! 마력강화를 통해 신체능력을 끌어올리고, 진각을 밟으며 놈에게 전진했다. 선수필승, 사용하는 무기는 가장 손에 익은 검으로 충분하다. 칼날에 마력을 씌우며 앞으로 내지른다. 비둘기는 수십 개나 되는 날개를 펄럭이더니 푸르게 빛나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스탯이 절반까지 깎여 나갔음에도, 여러 스킬과 마력강화의 보조를 받은 내 일격은 그리 쉽게 막아낼 수 없다. 에르웬이 만들어 준 새까만 검이 방어막을 찔러 부수며 나아갔다. -콱! 방어막은 관통했으나, 여러 겹으로 겹친 날개를 반쯤 꿰뚫은 것으로 끝이었다. 2페이즈로 넘어가더니 물리 방어력도 증가한 건가. 아니면 방어막의 완충 효과가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에 흘려 넣은 마력으로 [라이트닝 차지]를 발동한다. 거기에 [대전] 스킬을 추가로 사용해, 검 끝에서 강렬한 전광을 터트린다. -파지지직! 방출된 번개 속성의 마나는 상대를 감전시킴과 동시에 폭발을 일으킨다. -쾅! 전기 폭발을 정면에서 맞은 비둘기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생각보다 쉽게 공격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자빠졌던 비둘기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어섰다. 다시 한번 날개를 활짝 펼치며. 대기 중의 마력이 떨린다. 분명 뭔가 성가신 공격을 할 셈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이 정도 거리를 좁히고 다시 일격을 넣는 건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신속] 순간적으로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동굴을 단숨에 가로질러 한 번 더 일격을 뻗었다. -쾅! 필살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위력이 나왔지만, 이번 공격은 비둘기가 펼친 방어막에 막히고 말았다. 조금 전보다 방어막의 구성이 더 치밀하다. 짐승 수준의 지성을 갖고 있다더니, 믿기지 않는 학습속도다. 그래도 괜찮다. 일격으로 뚫리지 않으면 연격으로 전환하면 그만. “인벤토리.” 장검과 장창, 도끼와 망치, 곤봉과 단검, 각기 다른 무기를 쏟아내며 쉴 새 없이 공격을 이어나간다. 그에 맞춰서 계속해서 생성되는 방어막과, 방어막이 뚫린 자리를 메꾸는 여러 겹의 날개. 계속해서 두들겨도 도통 유효타를 입히기가 힘들다. 오히려 점점 더 방어막이 단단해지는 느낌까지 든다. “후우……썅, 이거 왜 이렇게……” 고작 수십 번 방어막을 두들겼을 뿐인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역시 점점 더 단단해지는……아니, 잠깐만. 이런 일로 내가 숨이 가빠질 리가 없는데? ** 들고 있는 무기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지친 것과는 별개로 공격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방어막이 점점 더 단단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상태창!” 위화감을 느끼고, 나는 재빨리 상태창을 켜 스탯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진혁 Lv.69 (전사) HP : 1300/1300 MP : 780/780 근력 : 43 (100+10)(!) 민첩 : 43 (95+11)(!) 내구 : 48 (99+15)(!) 지능 : 42 (90+12)(!) 15층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스탯이 더 낮아져 있다. 거의 40레벨 수준으로. 그래, 그러고 보니 천계에 펼쳐져 있는 제약 자체가 저 비둘기놈의 힘이었지. 그걸 더 강화한 건가. 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마력을 최대한 멀리 퍼트린다. 주변을 뒤덮고 있는 마력의 밀도 탓에 감지가 쉽지 않다. 힘을 약화시키는 모종의 결계 같은 게 작용하고 있는 건가. 심지어 점점 그 밀도가 짙어지고 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네. “범위를 좁혔군.” 제약이 걸리는 범위를 천계 전체에서 급격하게 좁히는 것으로, 제약의 정도를 강화한 거다. 그렇다면 좁혀진 범위 바깥으로 나가면 제약도 당연히 약해질 터. 이 스탯으로 그냥 맞서기에는 너무 불리하다. 나는 재빨리 뒤돌아 동굴 바깥으로 향했다. -펄럭! 그러자, 장식인가 싶었던 날개를 퍼덕이며 어마어마한 속도를 낸 비둘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새끼 봐라.” 내가 제약 범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셈인가. 여기서 말려 죽이겠다 이거지? 좋아, 어디 한번 죽어 보자. 인벤토리에서 어떤 검 하나를 꺼내, 마력을 가득 담은 뒤 지면에 깊숙히 박아넣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날개를 펼치고 마법을 사용해, 광선 같은 것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역시 이놈은 새대가리치고 지능이 높다. 지면에 검을 박아넣은 행위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공격해 온 거다. 하지만 역시 새대가리군.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무작정 공격만 한다고 다가 아니거든. -후웅! 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비둘기를 두고, 놈이 몸으로 막고 있던 출구 방향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이번에 집어 던진 검은 그냥 검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마검……이었던 것. 나한테도 그리 많지 않은 상급 마석을 끼운 칼레온을 출구로 던져넣고, [검령 각성] 발동.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 방향으로 뛰어! 개짓거리 하면 또 죽여버릴 거니까!” “뭐, 뭐라……? 크윽, 몸이 천근 같군!” “범위를 벗어나면 힘이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괜히 싸울 생각 말고 멀리 달려!” 그동안 몇 번이나 죽인 보람이 있는지, 검령은 이번에는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저놈한테 자유를 주려는 건 아니다. 칼레온의 본체인 검에 마력으로 마킹을 해 뒀다. 그 반응으로 이 결계의 작용 범위를 대충 알 수 있을 거다. 저 개복치가 뒈지지 않고 범위 밖으로 나갈 때의 이야기지만, 상급 마석을 썼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서진혁 Lv.69 (전사) HP : 1300/1300 MP : 780/780 근력 : 42 (100+10)(!) 민첩 : 42 (95+11)(!) 내구 : 47 (99+15)(!) 지능 : 41 (90+12)(!) 문제는 안 그래도 처참한 수준까지 떨어진 내 스탯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건데. 순수 스탯만 보면 1층 클리어 당시와 비슷한 수준, 물론 실질 전투력은 그때랑은 비교가 안 된다. 숨이 턱턱 막히는군. 그래도 뭐, 못 버틸 정도는 아니겠지. 도박 한번 해 보자. **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깃털 세례가 미친 듯이 쏘아진다. 처음에는 투척으로 쉽게 맞받아칠 수 있었던 깃털이지만, 이젠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치명적이게 느껴진다. 이런 씨발 양심이라고는 없는 비둘기 대가리 새끼,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콰과과곽! 온 몸을 내던지듯 굴러서 간신히 깃털을 피해내고, 조금 전에 다쳤던 다리를 살폈다. 놈의 부리 공격에 당했던 다리가 완전히 아작이 나 있었다. 마력강화가 아니었다면 다리가 잘려나갔을 거다. [초재생]이 없었으면 걷지도 못했을 거고. 2페이즈로 넘어왔지만, 비둘기의 공격 능력은 1페이즈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문제는 내 스탯이 버러지 수준으로 깎였다는 점, 비둘기의 공격 하나하나가 즉사기에 가깝게 변하고 말았다. [강철의 혼]을 비롯한 각종 방어력 증폭 수단이 없었다면, 이미 마법 공격에 맞고 가루가 됐을 거다. 땅에 박힌 깃털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마법 공격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데, 저 깃털만큼은 막을 수가 없다. 아마 맞으면 확실하게 죽는다. 그래도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나름대로 잘 버티고 있다. 즉사기 수준의 공격을 난사하는 말도 안 되는 적이지만, 오랜만에 위기를 맞이한 내 집중력은 어마어마하게 치솟아 있다. 아슬아슬한 간극을 유지하며 공격을 피하고, 아슬아슬하게 스킬을 사용해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역시 나는 위기 앞에서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지난 일주일간의 단련보다, 지금 몇 분간 성장한 것이 더 크다. 당장 마력강화만 해도 그렇다. 한 번 발동한 마력강화를, 지능 스탯마저 떨어진 상황에 이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을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미친 소리 같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급성장의 쾌감인지.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검령을 통해 결계의 범위도 파악이 끝났고- 곧 싸움은 끝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심호흡하고 있던 순간, 돌연 머릿속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 너……졌다……나, 이겼다. 너 내 먹이다. “뭐여 씨벌.” 지금 저 새대가리 새끼가 말한 건가? 짐승 수준의 지능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그러기는커녕 말까지 하네? 근데 조류 새끼가 누구보고 먹이래? 비둘기 대가리를 달고 있으면 얌전히 옥수수나 쪼아먹을 것이지. - 나……너보다 강하다, 그러니까 너, 내 먹이다. 하늘에 있는 건 다 내 거다. 나 천신이다. “얼씨구, 비둘기 새끼가 진짜 지가 신인 줄 아네.” - 나 신 맞다……신으로 될 수 있다고 했다……우리 거래했다…… “거래?” 비둘기는 뭐라 뭐라 계속해서 떠들었으나, 어눌한 어투와 유아 같은 말투 탓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 새대가리랑 대화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걸로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 너 잡아먹을 거다……너 약해졌다, 너 이제 죽는다…… 비둘기 괴물은 결계를 한계까지 좁히고, 이제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선언했지만. 이긴 건 나다. 나는 마력을 가득 담아 땅바닥 깊숙이 박아넣었던 검- [피를 먹는 나선검]을 향해 마력을 날렸다. 미리 연결해 둔 마력의 패스를 통해 [대전] 스킬을 사용해, 번개 속성의 마나를 전송. 혼자 회전하여 천계의 밑바닥까지 구멍을 뚫은 나선검은, 그것을 신호로 머금고 있던 마력을 단번에 토해낸다. -꽈과광!! 한계 이상까지 머금었던 마력이 쏟아지며 일어나는 대폭발이, 그대로 붕괴를 낳는다. -쿠구궁! 지반이 무너지며 나선검이 뚫었던 긴 구멍이 거대한 싱크홀로 변해 나와 비둘기를 집어삼켰다. 구멍은 천계의 바닥까지 그대로 뚫려 있다. 즉, 이 아래로 떨어지면 그대로 지상. -펄럭! 비둘기 괴물은 날개를 퍼덕여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닭둘기 아니랄까 봐 반응이 무척 느렸다. 제약을 강화하기 위해 한계까지 좁혔던 결계의 범위는, 이렇게 구름 밑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벗어났다. 고로 내 스탯은 원래대로 복구되었고- 공중에서 비둘기 새끼의 날개를 자르는 건 일도 아니게 됐다. -촤악! 소드 차지를 사용해 놈에게 달라붙은 뒤, 날개를 죄다 뜯어내 버렸다. “벌써 까먹었냐, 새대가리 새끼야? 땅으로 떨궈 준다니까.” 천계는 고도 몇천 미터에 있었을까. 뭐, 최소한 구름보다 높이 있던 건 확실하다. [철벽] [혼신] [불굴] 마력강화를 포함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사용하고. 비둘기의 몸에서 돋아나는 날개를 계속해서 뜯어가며, 그대로 지면을 향해 자유낙하했다. 나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 죽을 자신 있는데, 너는 어떨까. -꽈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