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마왕 출현 마족은 생긴 것과 똑같이 노는 놈들이다. 악마같이 생긴 만큼 하는 짓도 악마랑 크게 다를 것 없고, 힘의 크기에 따라 그때그때 태도가 바뀐다. 뭐, 진짜 악마랑은 좀 다르다고 하긴 하지만. 아무튼 마족은 죄다 그런 놈들이라는 거다. 나는 이미 이놈들이 나를 배신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들끼리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거든. 건방진 인간 놈의 사지를 찢어서 어쩌고저쩌고, 킬킬대면서 아주 잔인한 소리를 다 했었지. 내가 못 들을 줄 알았나? 이 놈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9층의 하이엘프 왕이 했던 것처럼 전음을 통해 대화했었다. 전음은 귀를 기울인다고 엿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마음 놓고 떠들고 있었던 거겠지만. 정말 공교롭게도, 나는 전음을 도청할 수 있다. 12층의 주요 몬스터가 일종의 군체형 생물,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저그 비슷한 것들이었는데. 그 놈들이 서로 텔레파시를 사용해 의사소통했었다. 그것들이랑 뒤엉켜 싸우다 보니 주파수가 살짝 맞은 적이 한 번 있었다. [마력 지배] 스킬을 가진 덕분에, 마력을 이용한 모든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의 경험을 살려, 마력의 파장을 맞추는 것으로 텔레파시나 전음 같은 걸 몰래 엿듣는 기술을 체득한 게 대충 한달 전쯤.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대강이나마 익혀 둔 기술을 바로 활용할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네놈에게 당한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마!” 한 마족의 선언과 함께, 무수한 마법 세례가 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내 몸에 어지간한 마법은 아예 안 통하지만, 딱 봐도 어지간한 마법들이 아니다. 확실히 엄청 파워업했군. 가장 앞서 날아오는 암석 탄환을 검으로 쳐냈다. 암석탄은 검에 닿자마자 폭발하며 파편을 뿌렸다. 파편 하나하나가 상당한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 내 몸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한 수준.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철벽]스킬을 두른 채 전진한다. 이 수많은 마법을 날린 것은 한 놈이 아니다. 이곳의 마족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공격한 거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합을 맞춘 공격이 아니라서 빈틈이 많다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팅! 방패에 마력을 두르고 암석 파편 하나를 특정한 경로로 튕겨냈다. 그러자 몇 개의 마법이 서로 부딪혔다. 내 가장 큰 특기는 지금도 여전히 투척술이다. 지금 이건 투척은 아니지만, 투사체에 관한 거라면 뭐든 내 전문이다. 튕겨나간 암석탄에 의해 궤도가 뒤엉킨 마법들이 서로 부딪혀 제멋대로 터져나갔다. 그 중 몇 개는 아예 다른 마족을 노리고 날아가기까지 했다. 나한테 적중한 마법은 별로 없는 수준. 역시, 탄막은 결국 한번 막이 뚫리면 그다음은 쉽지.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마법 세례를 한 번 몸으로 뚫고 나니, 다들 빈틈투성이다. 힘을 되찾고 나니 오만함이 다시 치솟으셨나? 고작 이 정도 마법 세례만으로 나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웃기지도 않네. 죄다 나한테 한두 방 맞고 뻗은 새끼들이, 왜 내 밑천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내 방어력을 뚫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약해빠진 인간족은 쉽게 뻗을 거라고 여겼던 걸까. 뭐, 그럴 만도 하지. 죄다 순식간에 털려서, 아직 [초재생] 스킬은 구경도 못 해봤잖아. “이딴 건 침 바르면 나아, 병신들아!” 마족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 일곱 개의 뿔을 전개하고, 마법을 두른 도끼 두 개로 내게 덤벼드는 노란 마족. 힘의 정수를 되찾으며 기본적인 신체능력과 마법 능력 모두가 향상된 지금, 그 기세는 예전과 크게 달랐다. 나는 놈과 똑같이 인벤토리에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맞서 달려들었다. -콰직! 내 어깨에 놈의 도끼가 찍혔다. 나는 그 상태에서 똑같이 도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콰직! 놈의 반대편 손이 도끼를 내려쳐, 내 쇄골을 찍었다. 나도 도끼를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찍었다. 나와 노란 마족은 서로 합의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몸을 향해 있는 대로 도끼를 찍어 댔다. -콰직! 콰직! 콰직! 인간보다 신체와 마력 모두 우위에 있는 마족과 이런 맞치기를 한다는 건 당연히 미친 짓이다. 서로 똑같이 도끼를 찍어도, 기본 체급과 스펙이 딸리는 인간 쪽이 훨씬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지만 나의 방어력과 전투 지속력은 그 당연함을 대놓고 거스른다. 미친 듯이 도끼가 난무했다. -콰직! 콰직! 콰직! 도끼질이 이어질수록, 내 도끼는 더 빨라지고 놈의 도끼는 점점 느려진다. 상처의 숫자가 점점 달라진다. 그리고 상처의 깊이는 처음부터 달랐다. 내 도끼가 더 정확하고 깊게 놈의 몸에 꽂히고 있다. 고작 수 초간 이어진 수십 번의 도끼질 맞대결, 그 끝에 쓰러진 것은 노란 마족 쪽이었다. -털썩. 무릎을 꿇은 노란 마족의 정수리를 향해,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최대 출력으로 두른 도끼를 내려찍었다. -콰르릉! 벼락이나 다름없는 일격, 마족의 머리통이 쪼개짐과 동시에 노릇하게 구워졌다. 이곳에 함께 도착했던 상급과 마왕급 마족은 이미 반 이상을 쓰러트렸다. 물론 남은 마족은 아직 더 있다. 하지만 남은 놈들은 정수를 되찾았음에도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는지, 소극적인 마법 견제만을 날리고 있었다. 사나운 개한테 소심하게 돌을 던져보는 초등학생들이랑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 개한테 목줄이 없다는 것. 나는 곧바로 외야를 향해 뛰어들어 칼부림을 벌였다. 또 몇 놈이 쓰러지고, 몇 놈이 남는다. 그러자 이제는 돌을 던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다 비켜!” 그러던 중, 한 마리의 상급 마족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다른 이들을 제치고 달아나려 했다. 어허, 그건 안되지 새끼야. 건방지게 구는 것도, 나를 얕잡아보는 것도, 다 봐줄 수 있어. 근데 정수만 먹고 튀는 건 용납 못 하지. [신속] [혼신] 두 가지 버프를 사용해 민첩 스탯을 높이고, 달아나려는 놈의 뒷덜미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놈의 면상을 처박고, 방 안을 반 바퀴 뺑 돌았다. -콰콰과과곽! 졸지에 얼굴로 벽을 갈아버린 놈은 발버둥치며 내게 공격을 날려 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월드 보스 레이드 보상으로 얻었던 유니크 무기 중 하나다. [피를 먹는 나선검] 날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붉은 대검. 이 검은 기본 옵션도 괜찮지만, 독특한 기동 효과를 갖고 있다. 액티브 옵션을 사용하면 날의 꼬인 부분이 모조리 날처럼 변해서, 회전한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도주를 시도한 마족의 배때기에 나선검을 꽂아넣고, 전용 옵션을 가동했다. -기이이이잉……가가가가각! 거대한 드릴이 된 나선검이 마족의 뱃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내장을 갈아버린다. 마족은 ‘어거걱’ 말고는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지를 경련하다 배에 지저분한 구멍이 뚫려버렸다. 내 사지를 찢니 마니, 꼬챙이에 꿰어 버리니 마니, 그딴 소리를 했던 주제에 아주 기겁들을 한다. “혁명 동지들을 두고 혼자 도망치려 하면 안 되지, 새끼야.” 니들한테 도주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쫄지 않고 덤비면 편하게 보내 줄 수는 있다. 그런 의미로 본보기를 한 번 보이자, 마족들은 부들부들 떨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다, 당신께서 새로운 마왕이십니다! 추,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얼씨구, 이 새끼들 봐라. 내가 덤비랬지 언제 항복하랬냐? 그리고 인간보고 왜 마왕이래? 기분 나쁘- [업적 달성 : 마계의 지배자] -지 않네, 그냥 내가 마왕 하지 뭐. **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마왕 노릇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 나는 항복을 선언한 놈들과도 억지로 싸움을 벌여 다 처치하고, 놈들의 힘의 정수를 빼앗아 부수기까지 했다. 삼켜서 흡수했던 만큼 그냥 배를 째 버리면 다시 뽑아낼 수 있더라고. 아쉽게도 내가 흡수한다거나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퀘스트는 딱 한 놈의 몫만 제외하고 모든 조건을 만족한 채로 완료했고, 의도치 않았던 업적까지 하나 달성했다. 보상으로는 대량의 경험치를 얻어 레벨이 하나 올랐고, 새로운 스킬인 [어둠 정령의 가호]를 얻었다. 정령의 가호 계열 스킬은 하나하나가 든든한 국밥 스킬이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본방은 지금부터다. 내가 일부러 살려놓은 마왕급 마족인 로투랑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빨리빨리 좀 했으면 좋겠는데.” 혼자 은신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녀석을 모른척하기도 지친다. 나는 아예 자리를 피해 다른 중급 마족 사냥에 나섰다. 마왕성에 함께 쳐들어온 백여 명의 마족을 모두 죽이고, 겸사겸사 마왕성에 자리 잡고 있던 마족도 몇 놈 죽였다. 하나같이 수준은 대단할 것 없었던지라, 천천히 싸웠는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업적 달성 : 마족 학살자] 그리고 도중에 업적이 하나 더 달성되었다. 보상은 지능 스탯을 조금 올려주는 정도. 천천히 이번에 얻은 보상을 확인하고 정리한 다음, 나는 다시 힘의 정수가 보관되어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로투랑은 슬슬 준비를 거의 다 마친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닌, 회색 마왕의 몸에 자신이 빙의할 준비를. “크흐흐……이걸로 너도 이제 끝이다, 건방진 인간 놈!” 전음을 도청하던 중에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회색의 마왕이 없다면, 다른 놈을 회색의 마왕으로 만들면 되는 거였다. 빙의 마법도 겸사겸사 좀 봐둘 수 있고, 14층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적과 싸워볼 수도 있다. 이 정도쯤 되는 일이 아니면, 내가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꺼내 먹을 일도 없었을 거다. [마계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 이 자리에서 다시금 부활하노니.] [뻣뻣하게 서 있는 목은, 모두 회색의 마왕의 손안에 들어오리라.] [온 마계의 생명들이여, 겸손히 주인께 경배하라.] [HIDDEN BOSS - 반쪽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