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는 이번 월드 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커뮤니티의 도전자들에게 내 스펙을 일부 공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교 대상인 랭커들의 스펙에 대해서도 일부 알게 되었다. 내 짐작대로, 현재의 내 스펙은 25층에 체류 중인 저층 랭커들을 확실하게 웃돌고 있었다. 물론 노멀 클래스의 한계로 액티브 스킬의 다양성 등에서는 아무래도 밀리긴 했지만. 딱 하나, 전체 스펙 중에서 딱 한 부분 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내성 스킬. 비교적 최근에 습득한 [대마법 내성]이나 [주문 내성]등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얻어서 꾸준히 성장시킨 [화염 내성]이나 [독 내성] 같은 스킬은 비교 대상이 마땅히 없을 정도였다. 듣기로는, 75층 이상에 체류 중인 최상위 랭커급도 이 정도의 내성 레벨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랭커급 중에서 드물게 나와 비슷하거나 높은 내성을 가진 이들도 있기는 있다는 모양이지만. 그들 마저도 나처럼 다양한 방면의 내성을 골고루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로, 화염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현시점의 뱀용이 내게 유효타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콰직! 힘차게 내려친 전투망치가 뱀용의 거추장스러운 팔 한쪽을 으스러트렸다. “크아아악! 네 이노옴!” 말 그대로 덧붙였던 사족을 상실한 뱀용은 추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저 외침 자체에도 마법적 효과가 있는지, 몸의 상처 이곳저곳이 욱신거리더니 불길이 피어났다. 나와 함께 맨 앞에서 싸우던 메르세데스와 군단장도 함께 불에 휩싸였다. 다만, 마법사로서 후열에서 싸운 엘레노어에게선 불길이 피어나지 않았다. 저 검이나 몸에서 돋아난 가지로 입힌 상처만이 발화하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양심 없는 패턴이다. 화염의 위력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지만, 입힌 피해에 비례하는 광역 회피불가 패턴인 것 아닌가. 나한테 화염 내성이 없었다면 불합리하다고 온갖 욕을 쏟아냈어도 모자라다. “재주는 다 부렸냐.” 상처에서 돋아난 불길을 툭툭 때려서 꺼트리고, 다시 무기를 쥔 채로 뱀용에게 달려들었다. 뱀용은 기겁하며 마구 가지를 뻗어댔지만, 처음보다 뻗을 수 있는 가지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불타는 몸도 점점 작아져서, 이젠 월드 보스라는 거창한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푹! 길쭉한 창이 뱀용의 몸에 꽂혔고, 놈은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며 커다란 몸을 꿈틀대었다. 이젠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여주고 있다. 하긴, 그 한참을 나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발악이랍시고 내보였던 패턴도 다 파훼해버렸고, 보아하니 마땅히 날뛸 힘도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끝내자, 징그러운 새끼야.” 나는 뒤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엘레노어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달려들었다. 일격의 공격력은 나보다 메르세데스가 높고, 공격 속도는 인간 군단장 녀석이 더 빠르다. 나는 저 최상급 NPC 두 사람에 비해, 마력강화의 수준이며 기본적인 스탯이며 모두 뒤떨어진다. -슈루룩! 하지만 내 몸에 휘감기는 검은 그림자, 엘레노어의 보조 마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르륵! 쾅! 터져나온 폭염이 함께 달려든 두 사람을 밀어내지만, 화염을 견딜 수 있는 나는 저지당하지 않는다. 뱀용은 그런 나를 향해, 불타는 가지들을 있는 대로 쏟아내었다. 행색이며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이것이 마지막 발악. 나는 마땅히 피하기 힘든 그 공격을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어렵게 찾아낸 뱀용의 역린을 맞찔렀다. -푸학! 붉은 빛으로 터지는 크리티컬 이펙트, 그리고 가지에 찔린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바닥을 보였던 HP 바가, 다시금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깎여 나간다. 나는 죽어가는 몸은 무시한 채, 그대로 놈의 역린을 연달아 찔렀다. -콱콱콱콱콱! 모든 찌르기가 크리티컬을 터트리고, 놈의 공격도 내 몸을 모두 관통했지만. 처절한 맞찌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타오르는 뱀 쪽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쿵! 놈이 쓰러졌다.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를 처치하셨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공격대를 모두가 칭송할 것입니다!] [공격대 명단 : 서진혁 (1명)] [레이드에 참가한 모든 공격대원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알림창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하나하나 다 읽기 힘들 정도였다. 이만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성장의 쾌감이나 뿌듯함은 뒤따르지 않았다. 월드 보스를 클리어했다는 것은,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고른 작별이 찾아왔다는 뜻이니까. “아무튼……이겼네.” 나는 쓰러진 뱀용의 머리를 짓밟고 작은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했다. “이제 정말로 작별이겠구나, 그대.”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엘레노어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쓰게 웃었다. ** 요란하게 올라온 보상 관련 알림을 모조리 꺼 버리고, 엘레노어에게 다가갔다. “저걸 쓰러트렸으니 이제 퀘스트라는 건 끝났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의식이 사라지는지를 모르겠구나.”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드 시작 직전과는 다르게 후련한 모습이다. “보상을 수령하고 나면 거기서 끝이야. 이미 보상은 인벤토리에 들어왔으니까, 곧 이겠지.” “흐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는 건가. 아직은 깡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니까. 너도 내 기억에서 봤을 거 아니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거.” 메르세데스와 군단장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둘 다 NPC니까. “근데, 작별 인사라면 우리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모르겠구나, 그걸 작별 인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뱀용의 시체에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는 둘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살짝 떨어져 이야기했다.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은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제대로 입 밖에 낼 자신이 없구나.” 엘레노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 쉬었다. “이야기하다 도중에 끊겨 버리면, 분명 오해를 낳을 게 뻔하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중간하게 대화하다가 돌연 깡통으로 변해 버리면, 충격이 클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통해,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깡통으로 변해버리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그 때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도. “승전고를 울리고, 피해를 수습해야겠어. 그대는 그동안 떠나도 괜찮고- 승리를 만끽해도 좋다.” 마음같아서는, 아니- 결심한 대로라면 바로 떠나야겠지.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지금 바로 떠났을 거다. 내 재생에도 한계가 있기는 한 모양인지, 몇 번이나 연달아 반죽음에서 살고 나니 회복이 더뎌졌다. 이 꼴로 마력강화를 계속 사용한 반동 탓일지도 모르겠다. 펜던트도 이 꼴이고. -절그럭. 내게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줬던 펜던트는 격한 싸움 도중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내구도가 깎인 게 아니라 아예 파괴 판정인지, 아이템 이름과 분류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월드 레이드 보상으로 얻은 게 많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력강화 펜던트를 잃어버리고 말다니. 소모한 아이템과 골드를 생각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최종적으로는 손해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잃은 것을 모두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 나는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미궁 구역을 찾았다. 미궁 구역 자체는 월드 보스 레이드로 소멸했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이문은 이곳에 있었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완료 처리가 되긴 했지만, 아직 랭크를 산정 중이라나. 랭크 산정이 끝나면 보상은 자동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다음 층으로 올라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다. 보상을 받기 전인 만큼, 아직 엘레노어는 깡통으로 변하지 않았겠지만. 괜히 따로 작별 인사를 해서 무언가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나온 거다. “뭐, 다들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봤으니까……” 그래도 지난 하루 동안, 후일담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었다. 엘레노어는 세계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처치된 뱀용의 시체를 가져가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메르세데스는 왕자를 위한 묘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설프지만 남은 하이엘프들을 이끌어 보겠다고 말했다. 왕국군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만, 군단장이라는 놈이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건네고 떠나갔다.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왕국으로 오라고, 나만 한 실력자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나. 물론 내가 9층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로 맹세했으니.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이 세계를 지켜냈다는 약간의 자부심 정도만을 갖고 떠나서- 괴로울 때면 가끔 떠올리자. 아니, 아니지. 자부심은 무슨, 내가 그런 걸 가져도 될 리가 있나. 잊어버리자.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나는 곧바로 10층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이문을 활성화했고. -쿵!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먼 곳에서 터져 나와 하늘을 울렸다. 그리고 마력감지에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의 파장. 위치는 다크엘프의 요새가 있는 그쪽이다. 뭐야 이게, 에픽 퀘스트는 이미 클리어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끝이 아니라고?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다, 계층 전이문은 아직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퀘스트는 다 끝났다. 하지만 정신 차린 순간, 나는 이미 다크엘프의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야, 이게, 이게 다 뭔, 지랄 마 진짜.” 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정체불명의 검은 쐐기에 배를 관통당한 엘레노어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