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정상회담 에르웬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자리에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모두가 웅성거렸다. 예외가 있다면, 엘레노어의 얼굴을 모르는 인간족 왕국군의 대표인 군단장-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의 남자뿐. “당신이 다크엘프의 여왕인가?” “어이구, 여왕이라니. 나는 그냥 철 두드리는 늙은이다.” “각 종족의 대표가 모이기로 했을 텐데, 여왕은 오지 않는 건가?” 그는며 자리에 앉는 에르웬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에르웬은 너저분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엘레노어가 저런 걸 끼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반지에는 내 견장에 박혀 있는 정찰대 마크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다크엘프 왕실의 문양일 거다. “제대로 그 아이한테서 역할을 넘겨받고 왔으니, 안심해라. 덩치 큰 인간족아.” 덩치 큰 인간족이라고 불린 군단장- 라인하르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일개 대장장이가 종족을 대표한다니, 이 상황을 어지간히 가볍게 보고 있나 보군.” 사실 상황에 대해서라면 가장 모르는 형편이면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나. 뭐, 딱 봐도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원탁에 앉은 에르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이해는 한다. 엄연히 삼대 세력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인데, 저런 꼴로 나왔으니. 하지만 지금이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인가. 왜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거지? “인간족아, 너야말로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냐? 여기가 뭘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각 종족의 미래를 놓고 협상을……” “흐음, 이게 협상이라는 단어를 올릴 수 있는 상황 같으냐. 인간족은 저 커다란 뱀을 보지 못했나 보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리켰다. “우리에게 남은 미래는 둘 중 하나다. 다 함께 저것에게 멸망하거나, 다 함께 힘을 합쳐 승리하거나.” “엘레노어- 우리 여왕이 그러더구나. 서로 선택지가 없는 이상 이건 외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그러니 머리를 굴려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보다, 상대에게 앙금이 깊지 않은 이가 나가는 게 맞을 거라고.” 동맹은 당연한 전제, 이루어지지 못하면 멸망. 필요한 건 결국 서로 손을 맞잡는다는 행위뿐. 그렇다면 서로 목소리를 높일 일이 없도록, 마음이 넓은 일반인이 원탁에 앉는다. 상황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서. 정확하게는, 이렇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리려고 시위를 벌인 셈이다. “무얼, 나는 다크엘프 최고의 연장자다. 사이 나쁜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일에는 도가 텄으니 말이다.” 도발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을 내뱉고, 생긋 웃어 보이는 에르웬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 에르웬은 일개 대장장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크엘프의 장로나 다름없는 존재다. 애초에 왕국 측에서도 왕이 아닌 장군이 나왔으니, 다크엘프 진영이라고 꼭 여왕이 나올 필요는 없었다. 왕국군 측도 더 시비를 걸려고 하지는 않았고, 곧 삼대 세력의 연합을 위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초반은 저 뱀의 위험성을 이야기했고, 이후 그 책임 소재에 대해 떠들고 있었던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에르웬의 중재로 누가 잘났니 못났니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역시 외교적인 이야기가 더해졌다. 왕국군에서 병사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니 없느니, 병기 동원은 경제적으로 힘드니 어쩌니.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왕국군 측에 문제가 많다. 하이엘프의 인간 혐오 못지않게, 왕국군 소속의 인간족은 엘프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불법체류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징하게 떠들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알겠고, 개씹좆프의 혐성을 겪어 본 탓도 있기야 하겠다만. 결국 저놈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리적인 조건을 자꾸만 걸려고 하고 있었다. 일정한 규모의 금전적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대수림의 일부를 영토로 할양하라느니 어쩌니. 에르웬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답답해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계속 돌고 돈다. 레이드를 위한 작전 브리핑 단계에서 꺼내려 했던 거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담판을 지어야지. “야, 야, 너 닥쳐. 그만 말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장군 옆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모사꾼 새끼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뭔 씨발 말끝마다 뭘 내놓으라니 말라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왕국군 측의 인원들이 발끈하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당연히 무기를 꺼내서 이놈들을 썰어버리고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건 아니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일부러 안 보여주고 있었던 건데.” 나는 인벤토리의 골드 탭을 눌러, 에르웬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대량의 금화를 자리에 쏟아부었다. -촤르르르르르르! 갑자기 뭘 하나 싶어서 지켜보던 왕국군 진영의 인간들이 점점 아연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돈과 이익이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주마, 이 돈벌레 새끼들아. 1층에서 9층까지 올라오면서 모았던 골드를 모두 아낌없이 쏟아붓고, 이후에는 아이템도 꺼냈다.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갑옷이며 무기만 해도 수백 개 이상. 메르세데스와의 결투에서 박살 난 걸 제외하고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까울 것도 없지. “저 뱀 새끼랑 싸워서 살아남으면, 남은 건 다 가져도 돼. 내 조건은 하나야.” 나는 아이템과 골드를 몽땅 쏟아부은 뒤, 마지막으로 내 애검을 꺼내서 모사꾼 놈에게 집어 던졌다. -콱! 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맞지 않고 벽에 박힌다. 일부러 안 맞춘 거지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익’ 이랑‘ 돈’이라는 단어 말했던 새끼들은 다 작전에서 배제하고 시작하는 거.” 저런 놈들을 두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분명 남겨 먹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니까. **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삼대 세력 간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남은 건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 다행히 시간은 아직 그럭저럭 남아 있다. 정상회담 종료 후, 나는 내가 알아낸 뱀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다 풀어놓았다. 속성 약점, 중첩되는 축복의 효과,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각 진영의 병기들. 대체 그런 것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적당히 얼버무리니 따지려 들지는 않았다. 이들도 결국 NPC인 이상, 시스템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 의문은 깊이 파고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차 공략 회의를 마치고 난 이후, 나는 에르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엘레노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에르웬이 대표 역할로 나온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엘레노어가 아예 나오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에르웬을 대신 내보낸 것도 상당히 급하게 결정된 듯하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내 물음에, 에르웬은 잠시 고민하는 듯- 제 턱을 쓰다듬다가 말을 꺼냈다. “혼자서 준비해야 할 일이 조금 있는 모양이더구나. 바쁘니까 당분간은 찾지 말아달라던데.”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지간히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음……마음이 많이 복잡한 모양이야. 인간족아, 혹시 그 애한테 뭔가 상처 주는 말을 한 건 아니냐?” “짚이는 게 없는데.” “너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물어봐도 도통 말하려고 하질 않으니- 하여튼 사랑이란 참 어렵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등을 팍팍 두드렸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뭔 소리야. 곧 에르웬은 대장간 일이 바빠질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최근 들어 많이 나빠졌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분명 제 입으로 잠은 푹 자고 있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모양새여서 신경이 쓰였었지. 어차피 조만간 깡통 NPC로 돌아갈 상대에게 무슨 걱정을 하고 신경을 쓰겠냐만은. 날이 갈수록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고는 했다. “나랑 상관이 있다고?” 나는 에르웬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나빠지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일까. 에르웬은 멋대로 사랑이 엮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초부터 얄팍한 관계였는데. “아, 몰라.” 나는 한숨 쉬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달리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았다. 엘레노어가 어떤 상태건 뭐 어쩌랴, 결국 저 월드 보스를 잡지 못하면 다 끝장인 것을. 지금은 잠시 잊어버리고,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